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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시간의 예배가 더 중요하다.

사도행전 박신 목사............... 조회 수 2028 추천 수 0 2012.02.02 22: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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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7:44-53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whyjesusonly.com/ 
167시간의 예배가 더 중요하다.
사도행전강해 (32)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이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7:44-53)

적반하장격인 유대공회

유대 공회의 재판정에 선 스데반의 변론이자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모세가 세운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을 직접 지은 솔로몬마저 그 헌당 예배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고 천하가 전부 당신의 성전이라고 고백했다고 상기시켰다.(왕상8:27) 요컨대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그 성전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앞서 그는 선조들이 율법의 최초 수여자 모세를 배척한 이야기를 했다. 이제 너희들도  성전 제사에 관해서 최초의 성전 건축자 솔로몬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너희는 재판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고소할 자격도 없다고 말한 셈이다. 바꿔 말해 만약 모세나 솔로몬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절대 자기를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로 고발 내지 재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스데반의 변론에는 여러 뜻이 있다. 중요한 몇 가지만 들면 우선 하나님이 성도에게 임재하신 곳은 어디라도 성전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갈대아 우르나,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혀 있던 애굽 시위대장의 감옥이나, 모세가 늙도록 양치가 하며 시련을 겪고 있던 미디안 광야, 그 모든 곳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예배에서 문제는 장소나 방식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느냐 여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오직 사람이 지은 전 안에만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면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보다 더 커져버린다. 하나님을 보잘 것 없는 한 장소에 가두어 두는 셈이 된다. 또 성전과 제사 자체가 하나님보다 더 숭배할 대상이 되며 자연히 그 형식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 제사장들더러 바로 너희들 생각이 이렇지 않느냐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다시 짓겠다.”고 했으므로 성전 제사의 의미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솔로몬의 고백에 적용하면 사람이 지은 전에 가두어 놓은 하나님을 다시 풀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정말 인간이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 놓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재판도 성립하고 또 그 벌도 달게 받겠다고 말한 셈이다. 스데반은 지금 논란의 핵심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의 날카로운 변론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많은 선지자들이 잘못된 제사에 대해 수도 없이 경고를 했으나 우리 선조들은, 정확히 따지면 지금 재판을 맡고 있는 제사장 지파의 선조들이 가장 듣지 않았고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전문가들인 너희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21:3) 하나님은 인류(구약) 최초의 제사였던 가인과 아벨의 때부터 형식에 치우치는 제사보다는 통회하는 심령을 당신께 바치기를 원하셨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의 통한의 외침을 들어보라.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6,10)

말하자면 스데반은 지금의 상태가 말라기 선지자 때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말씀도 구약 선지자들의 경고와 그 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이 “성전 문들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라고 하신 말씀을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직접 성취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구약 제사장들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이 당신의 대언자로 보낸 선지자들을 죽였다. 지금 유대 공회에 참석한 자들 모두도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죽였다. 하나님께 정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구약 제사장들보다 더 심한 죄악을 범했다. 또 예수님을 몰라 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마저 교만하게 목이 곧아져서 마음과 귀를 관통하는 심령에 할례를 받지 못해 성령의 음성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 까닭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준엄한 스데반의 지적인가?

그의 지금껏 변론한 내용을 압축시킨 마지막 한 마디는 그들의 마음에 여지없이 쐐기를 박았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지금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이  오히려 율법의 신과 의를 살리며 온전한 산제사를 드리는 스데반을 재판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이 얼마나 적반하장(賊反荷杖)인가?

그런데 사실은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놀랍고도 예리한 변론으로 말도 안 되는 적반하장을 오히려 거꾸로 뒤집고 있다. 현실적 역사적으로는 스데반이 유대공회에서 재판 받고 있지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공판장에선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를 통해 유대공회를 재판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자들이 율법으로 재판한다는 지적에 격분한 공회원들이 곧 스데반을 죽이려 들 것이다. 구약 선지자들과 하나님 독생자를 죽인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당하고도 똑 같은 잘못을 하나님이 세운 종 스데반에게 범하는 것이다. 야단을 맞으면 맞을수록 반성과 회개는커녕 수치와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야단맞은 잘못을 더 저지르는 것이 예수 없는 인간의 추악한 실체다.

스데반은 목숨을 잃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외에 인간이 소망을 가질 대상은 단 하나도 없다는 진리를 자신의 죽음으로 여실히 증거 했다. 신자는 가는 곳마다, 행하는 걸음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야 한다. 정말로 그는 최초의 순교자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다웠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다.

이 재판의 배경에는 사단과 예수님의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단의 하수인이 항상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그런 잘못은 지금도 여전히 성행되고 있음도 간과해선 안 된다.      

물론 유대인들이 성전을 숭상하듯이 오늘날의 신자가 교회 건물이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예배 절차를 신앙의 절대적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또 하나님이 교회 건물 안에만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교회가 건물이나 조직체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며 건물과 조직체는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점도 안다.

구약시대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도 여호와 하나님보다 성전이 더 우위에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문제의 초점은 율법의 뜻보다 성전제사의 형식을 더 중요시 여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는 드리되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만약 예수님이 오늘날 오셨다면 교회를 다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만한 교회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요컨대 교회가 제 본질을 회복하려면 예배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교인들더러 주일날 왜 교회에 가느냐고 물으면 일률적으로 예배를 보러 혹은 예배드리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는 학생더러 왜 학교 가느냐고 물으면 공부하러 간다는 것과 같은 유의 대답이다. 학생이 공부하고, 회사원이 직장에서 근무하고, 주부가 집안 일 하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일이다. 신자가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으면 아예 신자가 아니다. 이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있다. 그런데 왜 예배드리는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으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럼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 형식적으로 예배드리고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 예배를 드리는지도 모르니까 바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그 생각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 한다. 말하자면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것 같지만 엄밀히 따지면 신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내용에 잘못되거나 부족한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선 신자가 되었으니 기독교 특유의 종교 의식에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고 간주하고 치운다. 주일은 교회 가는 날이라는 단순한 개념뿐이다. 또 말로는 예배에 참여한다고 하지만 과연 진정으로 참여하고 있는지도 문제다. 외적 모습으로는 분명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서고, 성경 보라면 보고, 찬송가 부르라면 부른다. 그러나 비록 절차는 따라 하고 있지만 그 심경은 극장에서 영화 보듯이 하고 있으면 참여자가 아니라 청중일 뿐이다.

간혹 설교 들으러 온다고도 말하는데 그럼 목사의 원맨쇼를 보러 온 셈이다. 집에서 테이프를 들으면 되지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며 구태여 교회까지 올 필요는 없다. 통계에 따르면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 대부분의 성도가 설교 내용의 거의 모두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제목조차 기억 못한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만 따지면 주일날 교회에 그저 왔다 그냥 가는 꼴이다. 그나마 설교 듣는 목적이 최우선이었는데 그마저 별로 남는 것이 없지 않는가?

솔직히 많은 교회에서 습관적 형식적 예배가 일상화 되어 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이미 말한 대로 신자들이, 심지어 인도자조차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데에 있다. 예배의 본질은 연약하고 무능한 죄인이 너무나도 거룩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 합당한, 정확히 말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말 예배 보는 그 장소에 좌정하고 있다는 확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신자라면 그 정도 확신은 마땅히 다 갖고 있는 것 같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자면 제사 드릴 때에 얼마나 엄숙하게 지내는가? 물론 집안 어른들이 다 모여서 유교식 절차에 따르니까 자연히 엄숙해질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지적 받은 말은 이 자리에 할아버지가 와있는데 왜 떠드느냐는 것이었다. 정말 돌아가신 조상이 그 앞에 있는 양 믿으니까 엄숙해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와있는 공식적인 자리라면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하게 그 모임에 임하며 그가 하는 말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모든 신경을 다 집중하지 않겠는가? 과연 예배드릴 때에 그러한가 말이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나누고 싶다. 초신자 시절에 원체 음치인지라 찬송가를 부를 때에 건성으로 입만 벙긋 벙긋 하고 치웠다. 어느 순간 못 부르는 찬송가지만 정말 열심히 불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종교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두 가지였다. 우선 하나님이 와계시는데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실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또 건성으로 때우는 그 시간만큼 낭비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정말 정신 차려서 열심히 찬송가를 따라 불렀더니 우선 가사 내용부터 은혜가 되었다. 차츰 곡조에 익숙해지면서 감정도 고양되어 은혜는 배가(倍加) 되었다.

설교 말씀도 마찬가지다. 객관적인 기독교 교리로 간주해선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는다. 예배 중에 좌정하신 하나님이 목사의 입을 통해 직접 나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말한 것이니까 무조건 은혜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성경 진리에 반하는 설교를 하는 경우도 간혹 있기에 정말로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고 있는지, 그 진리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에게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묵상하면서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부합된다면 아주 간단하고 어눌한 설교일지라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능력이 되어 자신에게 다가온다.

요컨대 예배의 모든 절차에서 신자가 진정으로 그 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에게 인격적으로 반응해야만  예배드린다는 진정한 의미가 실현된다. 아주 단순하게 가정해보라. 진짜로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서 나와 교통할 수 있는 한 인격체로서 나를 만나주고 있다고 말이다. 그럼 내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저절로 그분 앞에 무릎 꿇고 오직 그분의 은혜만 갈망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예배가 아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온당한 반응을 하는 것이라면 주일날만 예배 드려선 안 된다. 신자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 있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동행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를 진정으로 구주로 영접한 신자에게는 성령님이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주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신자를 항상 지켜보고 있으며 때로는 미세한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럼 주일에 목사에게 설교 듣는 것 이상으로, 아니 최소한 동등한 예배가 평소에도 실제로 이뤄져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종교 행위나 훈련을 항상 하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신자가 행하는 곳 모두가 예배당이요, 함께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는 교회다. 바울 사도가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고 해서 고난과 핍박을 자초하며 고생하거나 희생 제물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다. 삶 전부가 예배가 되어야 즉, 항상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의 교회 활동도 마찬가지다. 성경공부, 기도모임, 성도교제, 등등 모두가 예배다. 실제 초대 교회는 성도간의 교제인 애찬(愛餐)도 예배의 공식 절차에 포함시켰다. 교회에 나오니까 성도들끼리 말 많고 탈도 많으며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신자들이 죄를 더 짓는 위선을 떨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정말 싫다. 그래서 주일 예배만 살짝 보고는 바로 줄행랑친다. 주일 예배만 예배이고 나머지는 예배와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와 사건과 사람에만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고 여기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은 말만 앞세우는 위선적 교인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큰 교만이 없으며  하나님 앞에도 큰 죄가 된다. 나는 저런 자와는 다르다고 아주 크게 착각한 것이다. 남의 눈의 티만 볼 줄 알지 내 눈에 들보는 평생 가도 못 보는 셈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반면에 남들은 죄인이라고 판단 정죄하고 있다. 우선 본인부터 똑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판단하실 몫을 인간인, 그것도 사면 받은 사형수 주제에 대신 행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죄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감히 그렇게 생각하고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신자는 반드시 교회 즉, 어떤 형태든 교인들의 모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함께 봉사하고 교제해야 한다. 다 같이 모난 돌끼리 흠 없이 반듯한 모퉁이 돌, 예수님께 붙어 반듯해지도록 깎이고 다듬어져야 한다. 정말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듯이 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의 놀라운 권능으로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잘 믿고 의롭게 사니까 그 보상으로 현실적 축복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항상 영적 소생과 충만이 가장 먼저이자 거의 전부다. 교회 안에 일단 들어와서 정말 모든 사람을 주께 대하듯 해보라. 무엇보다 자신의 영적 무지와 미숙한 면들을 하나씩 깨닫게 해주신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노력하여 고치기보다는 그분께서 자연스레 깨어지고 부수어지지 않을 수 없는 기회를 만나게 해주신다. 성령이 상대에게도 함께 역사하시지만 우선 나부터 새롭게 고쳐주신다. 그래서 싫은 사람이 많아도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남들을 위선자로 보았는데 알고 보니 자기도 다른 성도들에게 똑 같이 위선자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심지어 위선자로 보였던 동료 신자에게서 자기보다 더 의로운 모습을 발견케 해준다. 무엇보다 누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면 똑 같은 죄인으로 불쌍할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고의 구분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치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당장에 강대상에서 설교하고 있는 목사부터, 없다는 진리를 절감하게 된다.

흔히들 교회에 사람보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만나러 간다는 말을 한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다. 그것도 단순히 틀린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못되었다.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짐짓 무시 외면하고 오직 설교 말씀으로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된다고 여긴다면 여전히 자신은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교만이 깔려 있는 셈이다.

예배 중에, 설교 중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현실적 도덕적 종교적 깨우침이나 감동을 받는 정도가 아니다. 단순히 신자로서의 종교 행위를 한 것뿐일 수 있다. 그런 정도로 하나님을 만나 은혜 받았다고 간주하니까 예배를 통해 감동은 있지만 영적인 변화나 성숙이 없다. 하나님께 온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교회에 사람 대신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는 말도 사실은 너무나 궁색한 논리로 형식적 예배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자기가 남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치장하는 것밖에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로 당신이 하나님의 실체를 만났다면(real encounter) 어떻게 되겠는가?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기 말고는 아무 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는 인식을 가졌는데 그야말로 진리다. 인간이 그분 앞에 제대로 내세울 것이라고는 단 하나 없고 오로지 더럽고 추하며 죄악에 찌든 모습뿐이지 않는가? 그분의 구원의 긍휼 말고 소원할 것이 있겠는가? 살리든지 죽이든지 당신의 처분에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신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영원한 살림을 받았다. 그분 앞에 드릴 것이라고는 오직 감사와 찬양과 경외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 본성을 다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성전에서 하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이자, 하나님을 실제로 만난 모습이라는 뜻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간혹 예배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보다 우리의 가진 것을 전부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아주 겸손한 것처럼 혹은 아주 진지한 열심을 내는 것처럼 말하지만 예배의 본질을 모른다는 잘못을 여전히 범하고 있다. 물론 우리말로는 예배를 드린다는 것 이상의 좋은 표현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가장 좋은 표현 자체가 도리어 신앙적으로 모순된 내용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면에선 예배를 보는 것보다 더 틀린 것이다. 예배를 보는 것은 최소한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소원, 그분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열심은 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다고만 하면 자칫 그런 소원과 열심이 없어도 된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신자로서 해야 할 일만 해드린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해드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하나님에게 드려도 될 만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직 죄의 본성에 찌들려 있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그렇다.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서 특별히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나온다.

솔직히 예배드리러 교회 나오기 직전까지 아내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치사하게 싸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그리고는 둘 다 정장 차림에 아주 거룩한 표정으로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낯간지러운 일인가? 옆에 앉아 있는 남편과 아내는 미워 죽을 판이고 교회 안에 선남선녀에게 괜히 알게 모르게 시선이 더 가는 것은 어떤가? 또 교회 안에 누가 형통하면  배가 살살 아파오지 않는가?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예배 올까 말까 망설이다 마지못해 오는 경우도 자주 있지 않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분명히 선언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말이다. 예수님도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7:15,16)고 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21,22절)를 들었지 않은가?

인간이 하나님 앞에 꺼내 놓을 것이라곤 거짓과 악한 생각으로 가득한 마음과 철저하게 부패한 영혼 외에 없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심히 부패했는가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그것뿐이라는 사실조차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모든 인간의 그런 심중을 꿰뚫어 보신다.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니.”(렘17:10)

예배에서 하나님께 드릴 것은 아름답게 꾸며진 예배 그 자체도 사실 아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6,7)

하나님이 신자에겐 받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다. 자신의 그 부패한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고 또 바로 잡아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고백이다. 자신의 영혼의 가난함이 너무나 아프고 비참해서 스스로 애통해 하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실제로 신자가 예배에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곤 여전히 죄에 머물고 있는 그 존재 말고 무엇이 있는가? 애통한 마음 없이 화려하게 정장한 옷과 경건한 표정과 두툼한 헌금 봉투가 하나님 그분께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자 쪽에서 교회 안에서 행세하려는 용도 말고는 말이다.

우리가 예배를 혹은 예배에서 자신을 경건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작정하는 것 자체가 아직은 하나님을, 특별히 십자가 예수의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반증이다. 물론 모든 회중이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여 말씀에 집중하고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방향으로 최선의 지혜를 동원해 예배의 순서를 꾸미고 훈련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인간 쪽의 선하고 의로운 측면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인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만은 예배가 인간의 열성과 제물을 들고 하나님을 뵈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 갈 수 없다. 그런다고 그분을 만날 수도 없다. 그분은 그분이 만나주시기를 허락해야만 뵐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다는 뜻이 된다. 또 그 드린 것으로 그분의 마음을 열 수 있다는 뜻도 당연히 내포한다. 다른 말로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꺼내 놓을만한 그래서 그분의 마음에 흡족할 만한 선행, 공적, 회개, 희생, 심지어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예배를 비롯해 믿음으로 행해지는 교회의 어떤 종교 행위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열쇠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간을 만나주신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분을 인간의 사고, 지성, 도덕, 철학, 사상, 종교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셈이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오직 하나님이실 뿐이다. 영원토록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이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분은 오직 당신의 뜻에 의해서만 좌우될 뿐이다. 따라서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예배의 또 다른 본질이 된다.

예배는 하나님이 시작했다.

하나님과의 실질적 대면이 일어나는 것이 예배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이 그분을 만나러 올라갈 수가 없다면 예배는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 다른 길이 없다. 그분께서 스스로 인간 쪽으로 내려오시는 것이다. 예배의 시작은 오직 그분에서부터다.

예배를 제정한 자는 인간이 아니라 그분이다. 교회에서 주일 예배 의식의 순서를 제정하고 목사가 집전하고 성도는 참여하는 그런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차 강조하지만 절대자 하나님을 만난 한 죄인이 그에 온당한 반응을 하는 것과 신자로서 그분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예배다. 그럼 당연히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만나 주셔야만 예배가 성립되지 않는가?

다른 말로 예배가 인간의 필요, 목적, 계획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정한 예배의 수준이라고 해야 기껏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가 이만큼 바쳤으니 이렇게 저렇게 해주시옵소서. 아니면 최소한 이런 저런 분노와 심판이라도 거두어 주시옵소서.” 밖에 되지 못한다.

아브라함을 필두로 이스라엘 족장들은 가나안 땅에 우거할 때에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일방적으로 은혜 언약을 베푸셨다. 모세도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그를 불러내셨고 당신이 계신 곳이 거룩하니 신발을 벗으라고 했다. 거룩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오직 그분만을 주인으로 삼아 평생을 바치게 된다. 또 모세처럼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분의 권능에 의지하여 그분의 일을 담당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려와서 인간을 만나 주실 때에 비로소 예배는 시작된다. 지금 스데반이 어떻게 변증하고 있는가?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44절) 성전이 있기 전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예배를 드리는 장막마저 하나님이 만들라고 명하신 방식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말하자면 오늘날 교회 건물을 짓는 방식과 주일 예배 순서도 하나님이 정해 주셨다는 것이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할 때도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로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했다고 말했다.(삼하7:6,7) 하나님은 직접 이 땅으로 내려 오셔서 당신의 백성을 사단의 왕국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보호 인도하시며 역동적으로 간섭하시어 교제 하셨다. 한 번도 그들을 떠난 적이 없었다. 역으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임재 앞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는 하나님”이라는 진리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에서도, 지금 스데반의 변론에도 재차 확인 되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행7:48-50) 인간이 그분께 드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드릴 것이 없다면 당연히 만나러 올라 갈 일도 없지 않는가?

하나님 스스로 당신의 백성을 만나러 내려오신다는 것은 인간의 상태와 조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그러신다는 뜻이다. 아니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하며 곤고하고 불쌍한지 아신다는 것이다. 사단의 종으로 묶여 있어 마음은 심히 부패되었고 죄악을 탐닉하고 있음도 꿰뚫고 계시다는 뜻이다.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며 갈급해 하는 비참한 처지를 하늘에서 감찰하고 계셨다. 인간 스스로 선하고 의로우며 평강과 위로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구태여 하나님이 내려오실 이유도 전혀 없지 않는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나님은 아예 인간을 당신을 찬송하게 하려고 즉, 예배드리라고 지으셨다고 한다.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할 목적 자체가 예배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사단에게 묶여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지도 찾지도 못하므로 당신께서 직접 예배를 회복시키려 내려오신 것이다.

예배가 회복되면 인생도 살아난다.

구약 시대와 지금 스데반을 재판하려 덤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잘못이 무엇인가? 성전 제사를 통해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갈 수 있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자기들만 하나님을 만나는 특권을 지닌 자로 오해했다.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율법과 성전을 소유했으므로 하나님은 언제든 자기들 필요에 따라 만날 수 있고 또 그러면 그분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한다고 착각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아무리 해도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 올바로 설 수 없음을 알지 못했다. 물론 하나님의 실체를 만나면 죽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단순히 종교적 원리로만 이해했다. 제물을 들고 나올 때에 심히 부패하여 아무 소망 없는 비통한 마음은 함께 들고 나오지 않았다. 흠 있고 병들고 저는 제물을 들고 나와서 왜 자기들을 빨리 복주지 않느냐고 도리어 큰소리치며 따졌다.

제사장들은 한 술 더 떴다. 성전을 자기들의 경제적 이권을 채워주는 보고로 바꾸었다. 만민이 기도해야 할 거룩한 하나님의 전을 강도의 굴혈로 타락시켰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의 처지를 비춰 보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성전 제사를 드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을 율법과 견주어 진지하게 따져 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제사를 드린 백성에게 복이 따라오는 것에도 사실상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들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다른 말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성전에서 가만히 거하도록 모셔만 놓았다. 자기들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은 완전히 실종되었다. 하나님은 아무 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단지 제사장들이 하나님에게 갖다 바치기만 하면 되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신자가 주일 날 예배를 보거나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할 바를 다 한 양 생각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이 전부다. 예배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측면은 전혀 없다. 그분이 내려 오셔서 신자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시는 일조차 없어졌다. 신자는 예배드릴 때마저 그분 앞에 서있지 않고 단지 조직체 교회에 소속되어서 인간 목사와 성도들 눈치만 본다. 신자가 된 임무와 책임으로 그냥 한 시간 예배드려주는 것이다. 그래야 복을 받을 것 같고 최소한 나쁜 일은 막을 것 같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 쪽에서 보면 받으나 마나다. 아니 받지 않느니 못하다. 실제 받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다시 짖겠다는 뜻이 무엇인가? 성전 건물을 허물고 짓는 문제가 아니라 예배를 회복시키겠다는 것이었지 않는가? 하나님이 먼저 직접 내려 오셔서 인간들을 만나주시겠다는 뜻이었지 않는가? 대신에 당신을 만나 그 앞에 진정으로 엎드린 당신의 백성들에게 참 위로와 평강과 자유를 주시겠다는 것이지 않는가? 그래서 사단의 권세를 풀고 죄를 먼저 씻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 않는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어떻게 행했는가? 기껏 종교심이 있어봐야 돈을 꽂은 돼지머리를 상 위에 앉혀 놓고 천지신명께 복 내려 달라고, 액운을 막아 달라고 빌고 또 비는 정도였다. 하나님과 등진 정도가 아니다. 죄에 빠진 정도도 아니다. 그분과 완전히 원수가 되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바로 그 원수였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모든 허물과 상처와 고통과 죄악을 당신께서 다 감당하시고 말이다.

하나님과 대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 인격적, 체험적, 개인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의 정성과 열심을 바쳐서 그분께 복을 받으려는 목적뿐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를 만나주지 않는다. 예수의 보혈로 씻어진 자만 만나 주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두철미 자각하여 오직 긍휼만을 바라는 자라야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분이 사랑하여 택하신 자를 당신께서 만나주러 먼저 내려오셨다. 또 그분이 만나 주신 자들은 성령이 내주해 있기에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기를 소원하게 된다. 평생을 두고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전환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예배는 신자가 보는 것이 아니다. 신자 쪽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예배를 시작하고 이끌어 가시고 은혜와 권능을 베푸시며 또 예배의 마침도 그분이 하신다. 예수님만이 처음이요 끝이자 교회의 머리다.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다. 오직 예수로 살고 예수로만 죽어야 하는 것이 신자의 일생이 되어야 한다. 또 그런 일생이 바로 예배다.

주일 예배는 특별히 일주일 중에 하루를 따로 구별하여 오직 하나님과만 교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백성들과 한 곳에 모여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주일 한 시간의 예배는 나머지 167시간의 산제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나머지 167시간이 주일 한 시간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일주일 중에 한 시간만 하나님을 만나 거룩하게 보낸 것 같아선 절대 안 된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적이 한 순간도 없기에 매 순간을 예배드리듯이 살아야 한다. 실감나게 비유하자면 대통령의 수행비서라면 24시간 오직 대통령의 뜻에 따르려고 할 것 아닌가 말이다.    

위에서 예를 든 미가 선지자도 신자가 하나님께 도무지 바칠 것이 없다고 한탄했지만 오직 한 가지는 있다고 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하나님이 먼저 보이신 것에 온당히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또 그 반응은 자연히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예배에 진정으로 들고 나올 것이자, 진정한 예배를 드린 자라면 당연히 행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러 보러 온다고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 제가 왔다 갑니다.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였고 또 분에 넘치도록 바쳤습니다.”는 생각은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것에 불과하다. 목사님 설교를 도덕적 훈화처럼 적용시킬 생각부터 하지 말라. 그보다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먼저 만나려 하라. 이미 만나서 구원을 얻은 자라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그분의 십자가를 지라. 그것이 예배다. 또 그런 예배를 평소에도 드리는 자는 주일날도 오직 이 모습 이 대로 받으시라고 눈물로 십자가 앞에 엎드릴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예배란 아예 없다. 아니 예배로 성립조차 안 된다. 교회 안팎에서 오직 예수님과만 동행하라. 그분과 날마다 순간마다 교제하며 따르라. 삶에서부터 산제사를 회복시켜라.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함께 회복된다. 또 그런 회복된 모습으로 주일날에는 함께 나와서 승리의 찬양을 불러라. 강대상에서도 당연히 오직 예수의 거룩한 이름만 선포되어져야 한다. 감정적인 분위기를 고양한다고 은혜를 받고 예배가 부흥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거룩한 하나님과 비참한 죄인의 실제적 만남이 이뤄지면 자연히 예배는 회복되고 교회도, 그보다는 신자가 부흥하게 된다.

스데반은 이미 예수님이 회복하신 참 예배의 감격과 자유를 느껴 봤고 또 그랬기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다. 지금 그를 재판하려는 자는 오히려 사단에 묶여서 분노와 저주의 어두움과 절망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누구였는가? 한 마디로 성전에 그저 그냥 제사를 보러, 제사를 드리러 나온 자들이었지 않는가?  

4/29/2009
유타대학촌 교회 11/10/1996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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