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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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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7:5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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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역사상 최고로 큰 전도
사도행전 강해(3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 옥에 넘기니라.”(행7:54-8:3)
폭포에 뛰어든 스데반
스데반은 유대공회의 재판정에서 변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는데 법정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전도한 셈이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당부하셨다. 전도란 신자로 부름 받은 소명의 핵심이자 평생을 두고 할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행해선 안 된다. 신자가 처한 세상의 상황을 비유하자면 이렇다. 모든 불신자들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떠내러 가고 있는데 그 앞에는 천길 폭포가 기다리고 있다. 신자는 이미 건짐을 받아 강둑 밖으로 나와 있는 자다. 신자가 건져주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 자기 가족 친구 친지들이 있는데 어찌 가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건져내거나 빠져 나오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것이 전도다.
스데반은 너무 안타까워서 보다 못해 물에 뛰어들어 건지려다 빠져 죽은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들 모두 순교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강둑에서 구명 튜브, 조끼, 로프를 던지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십자가 복음을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전하면 된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어 씨만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몫이다.
그런데 스데반이 목숨을 걸고 전도했다면 몇 명이라도 건져낸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기독교 최초의 순교라면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은 몰라도 최소한 그 자리에서 몇 사람이라도 감동시키는 일이 일어나야 마땅하지 않은가 말이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지금은 그와 비슷하기는커녕 아예 정반대 현상만 일어났다. 그날에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이왕에 믿은 신자들마저 곳곳에 흩어졌다. 신자는 숨기 바빴고 유대인들은 잡으러 다녔다. 너무나 초라하며 치사한 모습이다. 믿음으로 당당하게 승리하거나 세상을 변혁시키는 모습은 눈 닦고 찾으려 해도 없다. 하나님마저 무력해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사도행전 기록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핍박을 동원해 신자들을 천하 각국으로 흩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땅 끝까지 가서 전하라고 명한 말씀을 잘 수행하지 않자 강제적인 간섭을 하신 것이다. 결국 흩어진 성도들이 이방 땅 곳곳에서 이교도들을 상대로 이름도 빛도 없이 묵묵히 전도함으로써 기독교가 단기간에 당시의 세계 전역에 염병같이 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은 신자를 꼭 고생을 시켜야 하는지 의아스럽다. 빌리 그래함이 여의도 광장에 백만이 넘는 인파를 모아놓고 전도 집회를 하듯이 멋지게 할 수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매번 신자만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방법인지 곤혹스럽다. 스데반이 최초로 순교한 사건도 너무나 비참한 결말로 끝나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런 의아심과 아쉬움은 우리가 전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성경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대충 읽고 치우는 까닭이다.
전도하여 자기 교회로 이끌어라.
먼저 전도에 대해 잘못된 관행과 인식 몇 가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전도를 자기 교회로 교인을 끌어 모으는 것으로 오해한다. 총동원 주일이나 교인 배가 운동 등을 예사로 전개한다. 물론 나름대로 전도에 대한 소명의식을 고취하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 교회가 자기 교인 숫자 늘리기에 급급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 가뜩이나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신자마저 그 대상으로 삼는 경우마저 있으니 말이다.
전도할 때에 전하는 권면이 주로 어떠한가?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설교를 잘하며, 우리 교회 성가대 찬양이 얼마나 은혜로우며, 교회 전체 분위기는 정말 따뜻하고 자유로우며, 등등 시종일관 자기 교회의 자랑뿐이지 않는가? 심지어 교회에 어떤 유명인들이 출석하는지도 떠벌린다.
오죽하면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는 워낙 사회 저명인사들이 많이 출석하는 바람에 친교를 터고 싶어 교회 주변으로 몰리는 바람에 근처 집값이 오를 정도였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실제로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그 교회의 구역장을 하는 것을 아주 큰 자랑으로 여겼는데 장관, 장군, 재벌회장이 자기 구역원으로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도(傳道)가 자기 교회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자칫 사교 클럽이나 교회 멤버십을 파는 장사처럼 보여선 안 된다. 말 그대로 기독교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물론 자기 교회로 일단 나와 보라고 권하는 것이 일반 신자가 취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책이긴 하다. 그러나 오직 그런 전도만 한다든지, 전도가 그런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져선 결코 안 된다.
작금 교인 숫자 증대에 초점을 맞춘 전도가 되다보니 사실상 교회끼리 교인 뺏기처럼 되어버렸다. 불신자가 처음으로 예수를 알게 되기보다는 기존 교인들의 수평적 이동이 예사다. 이곳 이민 사회는 한정된 교민 숫자에 교회는 늘어만 가니까 그런 현상이 더 심하다. 전도할 대상은 가장 먼저 불신자이며 그 다음으로 이단 교회의 교인이어야지 기존 교회 교인더러 우리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해선 안 된다.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바로 전해서 어느 교회든 자기 형편에 맞는 곳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교회로 데려 오는 것이 백번 옳고 꼭 그래야만 한다. 다시 말하지만 교인 빼앗기는 절대 아니다. 전도 실적을 올려 담임 목사에게 잘 보이고 성도들 사이에 자랑으로 삼으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신자라면 섬기는 교회에 충성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전도가 교인 숫자 채우기가 아니고 정말 한 죄인으로 하여금 온전한 구원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구원의 진리를 바로 가르쳐서 그 인생이 뒤집어지며 믿음이 성장토록 해야 한다. 불신자에서 또 한 사람의 새로운 전도자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전도한 자와 그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동료 성도들도 함께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섬기며 격려 고무해야 한다. 해당 교회와 성도들부터 십자가 복음에 온전하게 바로 서야함은 물론이다.
한 마디로 전도 후의 Follow-up까지 해야 전도가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없이 단지 예수님을 전해 믿게 한 것으로 그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도 간혹 생긴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지만 다시 소제되고 수리된 자기 집으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할 수 있다고 경고했듯이(눅11:24-26) 말이다.
사탄에 미혹되어 있었던 한 영혼이 예수를 처음으로 알고 믿게 되면 오히려 힘든 일이 더 많이 생긴다. 불신자들이 가족 중에 예수 믿으려는 자가 나오면 집안에 우환이 생길 것부터 염려하여 극렬 말리지 않는가? 사탄이 자기 종 한 명을 빼앗기니까 별의별 악랄한 수단을 다 동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나면 형통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렇지 못하다. 갓 전도한 자에게 닥칠 그런 사탄의 방해와 옛 사람의 본성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말씀으로 잘 무장시켜야 한다.
나아가 예수를 처음으로 알게 된 기쁨이 말할 수 없이 큰데 비해 막상 교회 안에 들어와 보면 실망할 일이 많을 수 있다. 가뜩이나 교회 밖에선 신자들이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위선자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이제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열심히 믿으면 나도 저렇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까지 하다.
가장 영적으로 충만하기도 하지만 가장 불안정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예수 믿기 시작한 때다. 한 명 전도 해왔으니 이제부터는 목사, 장로, 구역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까운 전도자가 초신자의 영적 상태도 가장 잘 알 수 있다. 구역모임을 비롯해 가능한 전도자와 같은 소그룹 모임에 편성시켜 보살펴야 한다. 실망할 때에 용기를 주고 쓰러질 때에 일으켜 세우며 눈물 흘릴 때에 함께 울어주어야 한다.
새롭게 신자가 된 자를 자기 교회로 인도하여 끝까지 책임지라는 것은 그도 새로운 전도자가 되게 하라는 뜻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지 단순히 전도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당신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확실히 못을 박았다. 제자란 부하, 종, 교회 멤버, 봉사자, 일군, 도우미 등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반드시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이 가진 것 전부를 전수 받아서 나중에는 스승을 능가해야 한다. 그가 또 다른 제자를 만들어야 한다. 전도 받은 자가 새로운 전도자가 되는 것이 전도의 완성이다.
전도란 동기부여다.
결국 사탄의 노예였던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는 작업이 전도다. 따라서 전도의 메시지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향해서든 “당신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죽을 죄인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천국이 임박했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대신해 죽으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예수님만이 죄에 빠진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확신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세대는, 특별히 젊은 세대에 이런 메시지가 거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헐벗고 굶주렸을 때는 하나님을 믿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볼까 하고 그런대로 큰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였다. 지금 세대는 전혀 어려움 없이 자란데다 다른 종교에는 구원의 길이 없고 예수만 유일한 길이라고 하니까 코웃음만 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예수 믿는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도 처음부터 벽에 부딪힌다. 구원의 핵심교리를 전하다 보면 성경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 불신자의 심령에 어느 정도의 찔림은 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은 베드로나 빌립 당시의 사람들에 비해선 아무래도 그 반응이 싱거울 수밖에 없다. 아니 바울이 이미 지적했듯이 모든 불신자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
여느 종교와는 다른 기독교만의 신비 중의 하나는 교리를 믿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고 나니까 교리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도하려면 어쨌든 교리를 먼저 전해야 한다. 전도 현장에서 겪는 큰 모순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용을 전해야만 하고 또 그 전하는 것과는 별개로 구원이 이뤄진다면 대체 왜 전해야 하는가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전도란 사단에 묶인 노예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본인 혼자서든, 전도자와 힘을 합하든 인간 스스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여 타락한 죄인의 영혼을 깨끗케 해야만 비로소 복음을 받아들인다. 바울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2:4) 이뤄진다고 했듯이 말이다.
제가 믿게 된 개인적 체험도 마찬가지다. 정말 한국 최고대학을 나온 최고 지성인이 아주 논리정연하게 복음을 설명해주었는데도 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거기다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여 봐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딴죽 걸기 일쑤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어느 순간 믿게 되었고 또 믿고 나니까 성경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을 전혀 의심치 않게 되었다.
가뜩이나 현 세대에 복음이 먹히지 않는데다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면 전도자가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접근부터 해보자. 전도란 어떻게 되었든 기독교의 구원진리에 대해 상대를 설득시켜야 하는 작업이다. 단순히 복음을 납득하여 동의하는 단계에 그치면 안 된다. 상대에게 예수를 정말로 믿을 마음이 생겨야 한다. 그런 결단과 실행으로 옮겨지기 위해선 반드시 그럴만한 동기부여가 일어나야 한다.
쉽게 말해서 믿으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긴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믿은 후에 그 보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있어야, 최소한 믿는 자가 아주 부럽기는 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와 교회들이 전도를 아주 손쉽게 하려 든다. 믿으면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고, 자식도 공부를 잘하고, 기도하면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전지전능의 하나님만 소개한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방식도 이제는 먹히지 않는다. 아무리 잘 믿어도 돈이 없어 쩔쩔 매고 중병에 걸려 고생하는 모습을 주위 신자들 중에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아주 궁핍하여 힘들게 살던 때나 먹히던 전도다. 물론 오늘 날도 너무 힘들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오는 자는 간혹 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전도보다는 고난 자체가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그럼 인격적으로 변화하여 선행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물론 신자라면 꼭 그래야 하고 전도의 좋은 방안이 된다. 그러나 불신자 가운데도 의롭고 선한 자는 많다. 오히려 신자들이 말만 앞서고 뒤로는 호박씨 까는 위선자라는 비난을 더 많이 듣고 있다. 또 무엇보다 의로워지는 데에 꼭 종교가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정적인 동기부여로는 작용하지 못한다.
진짜로 전해야 할 것은?
그럼 신자가 불신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첫 째 가는 측면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신자와 불신자가 가장 크게 다른 점을 보여주면 된다. 그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이 또한 너무나 간단하다. 바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다. 너무 싱거운 대답 같은가? 아니다.
기독교 고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해서 교리만 전하거나 특유의 종교 의식을 보여주라는 뜻이 아니다. 살아 계신 예수를 전해야 한다. 모든 신자에겐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 성령으로 와 계시며 절대 떠나지 않으신다. 신자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예수의 생명력이 겉으로 넘쳐 나와야 한다. 그래서 불신자도 그 힘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예수라는 보배를 가졌으므로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고후4:7) 불신자로 알게 해야 한다. 기도하여서 암이 낫고 사업이 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단순히 해석하면 안 된다. 성경은 훨씬 다른 의미를 말하고 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모습이다. 기도하여 크게 흥한 모습이 아니다. 단지 세상의 핍박에 절대 굴하지 않는 모습일 뿐이다.
어떤 열악한 환경에 처해도, 아무리 힘든 고난이 닥쳐도, 요동치 않으며 오히려 감사와 기쁨과 소망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주위의 힘든 자를 위로하며 섬길 수 있는 모습이다. 신자의 속에 진짜로 예수가 있으므로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믿음을 내보여야 한다. 세상 사람은 환난이 닥치면 돈, 권력, 지식, 건강, 심지어 요행에만 의지하지만 신자는 그런 것들이 근원적이 해결책이 결코 될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그분 외에서 만족, 행복, 능력, 안전 등을 절대 구하지 않아야 한다.
신자의 그런 확신과 실천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하면서 자신을 택하여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올리신 그 사랑은 절대로 취소는커녕 줄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권능과 은혜가 언제 어디서나 넘치도록 자신을 붙들고 있음을 알기에, 아니 그것들을 누리며 살기에 세상과 사람과 죄악과 사탄과 나아가 죽음 앞에서도 아주 당당해지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세상의 어떤 것들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불신자들을 전도하려면 정말 예수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고, 예수로 인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고, 예수로 인하여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단순히 그런 구절들을 말로만 외우거나, 액자에 달아 놓고 쳐다보면서 인격수양 하듯 하지 말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환난 중에도, 아니 바로 눈앞에 죽음이 닥쳐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를 바라보는 불신자들이 정말 이상하게 여기게끔 해야 한다. 도대체 저 사람들이 뭘 믿고 어떻게 생각하기에 저럴 수 있는가? 우리와 사는 방식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고 의아심, 호기심,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너희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한 번 믿어보고 싶다는 동기가 유발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신자라도 환난이 닥치면 괴롭고 힘들다.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기는커녕 기도도 하기 힘들 때도 있다. 때로는 이전의 나쁜 습관이 도지거나 세상 쾌락과 죄악에 넘어가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최소한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그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큰 소리 치면서 불안과 초조에 떨며 불신자와 동일하게 안절부절 하든지 세상 방식을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조금만 힘들면 그저 울고불고 방방 뛰는 모습을, 기도는 열심히 할지언정, 보여주는데 누가 신자를 부러워하겠는가? 또 병이 낫고 공부 잘하고 돈 버는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전문가다. 구태여 기도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처리하고 더 형통한다. 명색이 신자라면서 염려하기는 마찬가지이고 주일날 교회 가는 것 말고는 자기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면 구태여 시간과 경비를 손해 보며 예수 믿을 필요는 전혀 없지 않겠는가?
신자도 불안하고 힘들 수 있고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전혀 갖지 못한 아니 알지도 못하는 “십자가에 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가? 그분이 평생을 두고 땅 끝까지 내가 가는 길에 동행하여 주시지 않는가? 세상 사람과 똑 같이 염려하고 종교적 형식만 제외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예수님과는 도대체 왜 동행하는가? 아니 과연 그분이 동행해 주실까?
현실적으로 아쉬운 것 전혀 없이 다 갖춘 불신자, 예컨대 재벌회장이라도 평생을 두고 절대로 못 가지는 것이 하나 있다. 인생에서의 참 평강과 참 기쁨이다. 대체 자기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타락한 영혼은 공허와 허무로만 가득 차 있어서 무엇을 해도 갈급하기만 하다. 불행하게도 아무리 해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허공만 치고 향방 없는 달음질만 하다가 일생을 마친다. 그들 속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영혼이 그분의 보혈로 씻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는 다르다. 자기의 자기 된 바를 오직 예수 안에서 발견한 자다. 자기는 이제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자 친 자녀가 되었기에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을 더 이상 흔들거나, 넘어트리거나, 더럽게 하거나, 죽일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 영혼이 예수님의 보혈 가운데 날마다 새롭게 되기에 죄악과 사탄과 죽음 앞에 너무나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된다. 비록 현실적 겉모습은 날로 후패해도 속사람은 천국의 소망으로 더더욱 강건해진다. 언제 어디서든 참 평강과 참 기쁨을 예수 안에서 회복할 수 있다.
현세대는 절대적 진리가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는다. 또 종교적 믿음으로 현실적 고통을 해결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나아가 세상은 역사상 최고로 풍부한 물질과 앞선 기술이 주는 안락에 젖어 있다. 인격적 성숙도 스스로 알아서 자기 생각대로 하면 그만이다. 이런 그들 앞에 신자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다. 예수로 인해 어떤 경우가 닥쳐도 평강과 기쁨을 드러내는, 최소한 잃지 않는 모습이다. 저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세상 사람이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어야 조금이라도 믿어볼 생각을 가지게 될 것 아닌가?
스데반의 헛된(?) 죽음
스데반의 변론은 순교로 끝났다. 그 전도가 사실상 아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아니 기존의 신자마저 핍박을 받아 곳곳에 흩어져 버렸다. 비록 그들이 흩어진 곳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긴 했지만 스데반이 유대법정에서 그렇게까지 논리정연하게 변론했음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역사상 가장 큰 전도가 일어났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한 번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킨 것보다 더 큰 전도다.
바울이 전도된 것이다. 바울이 누구인가?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13권을 저작했고 특별히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설명했던 자다. 또 당시로선 땅 끝까지 전도하여 곳곳에 초대교회를 세웠다. 후대의 모든 신자들은 사실상 그로 인해 전도되었다고 해도, 최소한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지 않는가? 정말 역사상 최대의 전도로 꼽힐 만하다.
그가 스데반에 의해 전도되었다는 비밀은 “사울(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이름)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라는 기록에 숨겨져 있다. 아니 사울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고 또 신자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끌어다 옥에 넘겼는데 어떻게 전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그가 스데반 순교로 인해 신자들을 더 핍박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 이전에 스데반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그다.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7:58) 율법에 의하면 이단이나 우상 숭배자를 죽일 때에 재판장이 먼저 돌로 치게 되어있다.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백성이 손을 대라.”(신13:9) 증인들이 사울의 앞에 옷을 벗어 두었다고 한다. 사울이 먼저 옷을 벗고 돌을 던진 것을 암시하는 표현임에 틀림없다.
그럼 점점 더 그가 전도당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가? 그러나 스데반이 그런 모습으로 순교당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까지 예수의 가장 큰 대적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가 작심하고 신자를 잔멸하기로 나섰기에 어쨌든 그럴만한 동기가 부여된 것만은 틀림없다. 단순히 스데반의 변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유대교에 저촉되는 나사렛 이단으로 간주해선 그렇게까지 날 뛸 수는 없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가 광분(?)하게 된 계기 즉, 동기부여가 된 단초를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행6:8-10)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 유대인들은 각지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율법에 따라 일 년에 세 차례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성전 제사를 드렸다. 또 수시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각 지역출신 별로 만든 회당을 방문하여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누었다. 지금 그런 각 회당에서 헬라파 집사인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복음으로 변론할 때에 아무도 능히 당치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길리기아인도 있었는데 바로 사울이 그곳 출신이었다.(행22:23) 무슨 뜻인가? 사울도 스데반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변론 해봤지만 복음의 진리에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토론에 진 앙심을 품고 그 재판장에서 스데반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고 또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어쩌면 고소하게 여겼던 것이다. 물론 성경에 그런 명시적인 언급이 없지만 구태여 길리기아 사람이 스데반과 토론했었고 또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의 죽음을 주도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충분한 개연성은 있다.
어쨌든 사울이 도에 넘치는 미움으로 신자를 핍박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럼 그도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이 크게 찔렸던 것도 사실이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달려들어 성밖에 내친 군중들과 동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스데반이 하는 말을 하나 빠트리지 않고 들었고 또 그의 모습도 아주 찬찬히 관찰해 보았을 것이다.
비록 청년 때인지라 변론에 졌어도 스데반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결과 나름대로 큰 쇼크를 받은 것은 틀림없다. 스데반은 유대공회원들에게 메시아를 살인한 죄인이라고 선고했다. 심지어 율법을 받아 가르치는 자들이 오히려 더 지키지 아니하는 죄인이라고 지적했다. 그 말을 들은 사울도 분노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나중에 자신들의 사역 즉, 전도나 선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유대 법정에서 그는 망하는 자가 되어 스데반에게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자신의 죄가 있는 그대로 지적당하자, 물론 그 당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겠지만,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죽임을 주도하고 죽임 당함을 고소하게 여기고 더 이상 그런 자들을 세상에 놓아둘 수 없다고 설치게 댄 것이다.
결국 스데반은 유대공회에서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너무나 훌륭한 전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십자가 복음으로만 사망과 생명, 심판과 구원 둘로 확연하게 나누었지만 당시 법정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뛰어든 것이다. 말하자면 스데반이 사울에게 사망의 길로 가도록 확실한 동기부여를 했던 것이다.
순교의 또 다른 냄새
그러나 사울이 단지 토론에 졌고 자기 죄가 지적당했기에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또 고소하게 여기기만 한 소인배였다면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사도로 들어 쓰실 리는 없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그가 단지 사망의 냄새만 맡고 끝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가 스데반과 변론 할 때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사울은 가미라엘 문하로 율법의 의로는 하자가 없는 자였다. 하나님을 믿는 열심과 정성에서도 누구보다 앞섰다. 한마디로 종교적, 도덕적으로 당대 최고 의인이자 율법의 최고 전문가였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율법을 풀어주었을 것이다. 예컨대 사울은 모세의 이혼장만 있으면 이혼하면 된다고 여기는데 스데반은 간음한 연고가 아니면 이혼하면 안 되고 억울하게 이혼한 여자에게 장가가면 또 다른 간음을 한 것이라고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정당한 복수는 해도 된다고 인정했는데,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고도 한다. 나아가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는데, 예쁜 여자를 보고 속으로 음란한 생각만 해도 간음한 죄를 범했기에 선행과 공적으로는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다.
사울로선 동의는커녕 도대체 이해도 안 되는 말이었다. 어떻게 로마제국 같은 민족의 원수를 사랑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여자를 보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죄를 지었다면 자기 같은 의인도 구원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그가 율법의 규정들을 갖다 대며 계속 반박해 보았지만 스데반의 설명은 알듯 모르게 거침없이 더 쏟아졌을 것이다.
대체 이런 이상한 가르침을 퍼트리는 이를 가만 두었다가는 유대교의 큰 위험요소가 될 것 같은 염려가 들었을 것이다. 결국 군중들과 함께 공회에 끌고 와서 대제사장들의 심판에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오히려 더 담담하고도 자신 있게 자기가 믿는 바를 변론하지 않는가? 십자가에 죽은 저주 받은 죄인이 메시야였으며 그를 죽인 공회원들이 오히려 죄인이며 율법도 지키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면서 말이다. 솟구치는 분노를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를 더 큰 혼란에 빠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대인들이 위협하여 공회로 끌고 왔음에도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너무나 평온했다. 또 모든 공회원들이 당장 잡아 죽일 듯이 이를 갈고 있는데도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선포했다. 공회원들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로 죽였던 예수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있다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사울에게 스데반은 미쳐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이는데도 스데반은 죽이는 자를 저주하기는커녕 도리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는 자는 듯이 평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회당의 토론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계명이라고 비방했는데 이제 본인이 가르친 그대로 실천하며 죽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사울의 가슴은 개인적 종교적 분통과 저주로 사로잡혔지만 머리는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더 복잡해졌다. 저런 사람과 또 저런 일은 생전 처음 보는 경험이었다. 논리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체계를 도무지 세울 수 없었다. 스데반이 나사렛 예수 이단에 완전히 미친 광신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반면에 혼자서 담대하게 공회원들과 맞서 변론했고 죽어가면서도 자비에 가득 차 그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했고 나아가 너무나 평안히 죽은 모습들은 사울의 뇌리에 깊이 각인 되었다.
말하자면 사울이 스데반이 죽은 후에 광분(?)하여 신자를 핍박한 것은 일종의 오기싸움이었던 것이다. 스데반과 자신 중에 과연 누가 옳은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인지 따져 보자는 것이었다. 무식한 어부와 세리들이 어떤 핍박 앞에서도 당당하여 평강을 잃지 않으며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고 다녔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갈수록 많이 나왔다. 사울로선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이성, 교육, 체험, 나아가 종교적 관습과 구약경전의 말씀 등에 비추어 보면 반드시 자기가 옳아야만 했고 스데반은 완전히 틀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문제는 스데반처럼 원수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의 이단을 당장 끌어 잡아다 처단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데도 기쁨은커녕 평강도 없고 오히려 까닭모를 공허와 갈급함과 심지어 초조 염려마저 덮쳤다. 나아가 하늘 보좌에 인자가 있음을 보는 체험은커녕 자기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지도 않았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죽음을 맞이할 자신은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그런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더욱 신자들을 핍박해 보았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옳다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그분이 승인하고 축복해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아 영혼은 더 피폐해가는 가운데 드디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사흘간 죽음과 방불한 체험을 했고 단지 예수 믿는 이름 없는 신자의 기도로 봉사 되었던 눈이 떠졌다. 그 사흘 동안에 성령이 그의 영혼을 뒤집어 놓는 역사가 일어났고 비로소 그는 예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무릎을 꿇었다.
바울로 변한 그에게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이 정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고후4:10)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이 인간의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유일한 길임을 철두철미 확신케 된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예수님과의 실질적이고도 인격적인 대면을 통해 오직 예수만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삼은 자로 거듭난 것이다.
말하자면 스데반의 변론은 앞으로 최고의 사도가 될 사울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완연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사울은 외면적, 감정적으로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맡아 지금껏 그랬듯이 망하는 자의 대열에 당분간은 서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을 어지럽힌 또 다른 냄새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였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영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려고 씨름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온전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스데반이 헛되게 순교한 것 같지만 역사상 최대의 전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상 최대의 전도사건만 설명하려는 뜻이 아니다. 역사상 최대의 전도라고 해서 스데반이 아주 특별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변론에 아무도 감동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미움만 생기게 만들었다. 그는 오직 예수만이 소망이며 그분이 없는 인간은 절망뿐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한 것뿐이다. 십자가 복음을 복음답게 온전히 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도 상대의 반응은 코웃음뿐이다. 유대 공회의 반응과는 너무나 다르다. 전도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는 사망과 생명의 두 냄새를 동시에 피워야 한다. 그래서 상대로 반드시 사망과 생명 둘 중 하나의 반응으로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전도자가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사망과 생명의 교차로를 통과하여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명과 사망을 초월하는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 속에 보배로 소유하고 있는 예수의 생명력이 남들에게까지 전해져야 한다.
너무 영적으로 심오하게 이해할 필요 없다. 스데반처럼 하면 된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또 나와 지금 함께 하고 있으므로 세상의 어떤 핍박 앞에서도 당당하기만 하면 된다. 죄악과 사탄에게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최소한 세상 사람이 사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어야한다.
혼자서만 끝까지 당당 하여 영웅적 죽음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당당함은 스데반처럼 죽으면서도 핍박자를 진정으로 안타까이 여기고 긍휼의 기도를 해주는 사랑이 함께 드러나야 한다. 십자가 복음이 자신에게 진정한 복음이 되어 있다면 그 복음 그대로 말로 전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전도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당연히 따라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세대의 사람들에게, 아니 원죄로 타락한 모든 세대의 죄인에게 예수를 믿어볼까라는 동기부여를 제대로 하려면 신자의 삶과 인생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유지되고 있는 모습을 주위에 보여주는 것 말고는 없다. 이것 외의 어떤 방식도 단지 종교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 것이지 참 전도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전도를 하고 있는가? 정말 십자가 복음이 당신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자 삶의 근원이 되어 있는가? 그래서 그분으로만 인해 살고 죽고 있는가? 또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당신이 가진 보배 예수에 대해 최소한 궁금해 여기기는 하는가?
11/24/1996 유타대학촌교회 주일설교를 보완 정리한 것임
사도행전 강해(3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 옥에 넘기니라.”(행7:54-8:3)
폭포에 뛰어든 스데반
스데반은 유대공회의 재판정에서 변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는데 법정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전도한 셈이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당부하셨다. 전도란 신자로 부름 받은 소명의 핵심이자 평생을 두고 할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행해선 안 된다. 신자가 처한 세상의 상황을 비유하자면 이렇다. 모든 불신자들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떠내러 가고 있는데 그 앞에는 천길 폭포가 기다리고 있다. 신자는 이미 건짐을 받아 강둑 밖으로 나와 있는 자다. 신자가 건져주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 자기 가족 친구 친지들이 있는데 어찌 가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건져내거나 빠져 나오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것이 전도다.
스데반은 너무 안타까워서 보다 못해 물에 뛰어들어 건지려다 빠져 죽은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들 모두 순교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강둑에서 구명 튜브, 조끼, 로프를 던지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십자가 복음을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전하면 된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어 씨만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몫이다.
그런데 스데반이 목숨을 걸고 전도했다면 몇 명이라도 건져낸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기독교 최초의 순교라면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은 몰라도 최소한 그 자리에서 몇 사람이라도 감동시키는 일이 일어나야 마땅하지 않은가 말이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지금은 그와 비슷하기는커녕 아예 정반대 현상만 일어났다. 그날에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이왕에 믿은 신자들마저 곳곳에 흩어졌다. 신자는 숨기 바빴고 유대인들은 잡으러 다녔다. 너무나 초라하며 치사한 모습이다. 믿음으로 당당하게 승리하거나 세상을 변혁시키는 모습은 눈 닦고 찾으려 해도 없다. 하나님마저 무력해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사도행전 기록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핍박을 동원해 신자들을 천하 각국으로 흩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땅 끝까지 가서 전하라고 명한 말씀을 잘 수행하지 않자 강제적인 간섭을 하신 것이다. 결국 흩어진 성도들이 이방 땅 곳곳에서 이교도들을 상대로 이름도 빛도 없이 묵묵히 전도함으로써 기독교가 단기간에 당시의 세계 전역에 염병같이 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은 신자를 꼭 고생을 시켜야 하는지 의아스럽다. 빌리 그래함이 여의도 광장에 백만이 넘는 인파를 모아놓고 전도 집회를 하듯이 멋지게 할 수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매번 신자만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방법인지 곤혹스럽다. 스데반이 최초로 순교한 사건도 너무나 비참한 결말로 끝나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런 의아심과 아쉬움은 우리가 전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성경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대충 읽고 치우는 까닭이다.
전도하여 자기 교회로 이끌어라.
먼저 전도에 대해 잘못된 관행과 인식 몇 가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전도를 자기 교회로 교인을 끌어 모으는 것으로 오해한다. 총동원 주일이나 교인 배가 운동 등을 예사로 전개한다. 물론 나름대로 전도에 대한 소명의식을 고취하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 교회가 자기 교인 숫자 늘리기에 급급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 가뜩이나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신자마저 그 대상으로 삼는 경우마저 있으니 말이다.
전도할 때에 전하는 권면이 주로 어떠한가?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설교를 잘하며, 우리 교회 성가대 찬양이 얼마나 은혜로우며, 교회 전체 분위기는 정말 따뜻하고 자유로우며, 등등 시종일관 자기 교회의 자랑뿐이지 않는가? 심지어 교회에 어떤 유명인들이 출석하는지도 떠벌린다.
오죽하면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는 워낙 사회 저명인사들이 많이 출석하는 바람에 친교를 터고 싶어 교회 주변으로 몰리는 바람에 근처 집값이 오를 정도였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실제로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그 교회의 구역장을 하는 것을 아주 큰 자랑으로 여겼는데 장관, 장군, 재벌회장이 자기 구역원으로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도(傳道)가 자기 교회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자칫 사교 클럽이나 교회 멤버십을 파는 장사처럼 보여선 안 된다. 말 그대로 기독교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물론 자기 교회로 일단 나와 보라고 권하는 것이 일반 신자가 취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책이긴 하다. 그러나 오직 그런 전도만 한다든지, 전도가 그런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져선 결코 안 된다.
작금 교인 숫자 증대에 초점을 맞춘 전도가 되다보니 사실상 교회끼리 교인 뺏기처럼 되어버렸다. 불신자가 처음으로 예수를 알게 되기보다는 기존 교인들의 수평적 이동이 예사다. 이곳 이민 사회는 한정된 교민 숫자에 교회는 늘어만 가니까 그런 현상이 더 심하다. 전도할 대상은 가장 먼저 불신자이며 그 다음으로 이단 교회의 교인이어야지 기존 교회 교인더러 우리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해선 안 된다.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바로 전해서 어느 교회든 자기 형편에 맞는 곳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교회로 데려 오는 것이 백번 옳고 꼭 그래야만 한다. 다시 말하지만 교인 빼앗기는 절대 아니다. 전도 실적을 올려 담임 목사에게 잘 보이고 성도들 사이에 자랑으로 삼으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신자라면 섬기는 교회에 충성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전도가 교인 숫자 채우기가 아니고 정말 한 죄인으로 하여금 온전한 구원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구원의 진리를 바로 가르쳐서 그 인생이 뒤집어지며 믿음이 성장토록 해야 한다. 불신자에서 또 한 사람의 새로운 전도자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전도한 자와 그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동료 성도들도 함께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섬기며 격려 고무해야 한다. 해당 교회와 성도들부터 십자가 복음에 온전하게 바로 서야함은 물론이다.
한 마디로 전도 후의 Follow-up까지 해야 전도가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없이 단지 예수님을 전해 믿게 한 것으로 그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도 간혹 생긴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지만 다시 소제되고 수리된 자기 집으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할 수 있다고 경고했듯이(눅11:24-26) 말이다.
사탄에 미혹되어 있었던 한 영혼이 예수를 처음으로 알고 믿게 되면 오히려 힘든 일이 더 많이 생긴다. 불신자들이 가족 중에 예수 믿으려는 자가 나오면 집안에 우환이 생길 것부터 염려하여 극렬 말리지 않는가? 사탄이 자기 종 한 명을 빼앗기니까 별의별 악랄한 수단을 다 동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나면 형통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렇지 못하다. 갓 전도한 자에게 닥칠 그런 사탄의 방해와 옛 사람의 본성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말씀으로 잘 무장시켜야 한다.
나아가 예수를 처음으로 알게 된 기쁨이 말할 수 없이 큰데 비해 막상 교회 안에 들어와 보면 실망할 일이 많을 수 있다. 가뜩이나 교회 밖에선 신자들이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위선자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이제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열심히 믿으면 나도 저렇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까지 하다.
가장 영적으로 충만하기도 하지만 가장 불안정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예수 믿기 시작한 때다. 한 명 전도 해왔으니 이제부터는 목사, 장로, 구역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까운 전도자가 초신자의 영적 상태도 가장 잘 알 수 있다. 구역모임을 비롯해 가능한 전도자와 같은 소그룹 모임에 편성시켜 보살펴야 한다. 실망할 때에 용기를 주고 쓰러질 때에 일으켜 세우며 눈물 흘릴 때에 함께 울어주어야 한다.
새롭게 신자가 된 자를 자기 교회로 인도하여 끝까지 책임지라는 것은 그도 새로운 전도자가 되게 하라는 뜻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지 단순히 전도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당신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확실히 못을 박았다. 제자란 부하, 종, 교회 멤버, 봉사자, 일군, 도우미 등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반드시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이 가진 것 전부를 전수 받아서 나중에는 스승을 능가해야 한다. 그가 또 다른 제자를 만들어야 한다. 전도 받은 자가 새로운 전도자가 되는 것이 전도의 완성이다.
전도란 동기부여다.
결국 사탄의 노예였던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는 작업이 전도다. 따라서 전도의 메시지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향해서든 “당신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죽을 죄인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천국이 임박했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대신해 죽으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예수님만이 죄에 빠진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확신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세대는, 특별히 젊은 세대에 이런 메시지가 거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헐벗고 굶주렸을 때는 하나님을 믿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볼까 하고 그런대로 큰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였다. 지금 세대는 전혀 어려움 없이 자란데다 다른 종교에는 구원의 길이 없고 예수만 유일한 길이라고 하니까 코웃음만 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예수 믿는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도 처음부터 벽에 부딪힌다. 구원의 핵심교리를 전하다 보면 성경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 불신자의 심령에 어느 정도의 찔림은 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은 베드로나 빌립 당시의 사람들에 비해선 아무래도 그 반응이 싱거울 수밖에 없다. 아니 바울이 이미 지적했듯이 모든 불신자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
여느 종교와는 다른 기독교만의 신비 중의 하나는 교리를 믿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고 나니까 교리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도하려면 어쨌든 교리를 먼저 전해야 한다. 전도 현장에서 겪는 큰 모순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용을 전해야만 하고 또 그 전하는 것과는 별개로 구원이 이뤄진다면 대체 왜 전해야 하는가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전도란 사단에 묶인 노예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본인 혼자서든, 전도자와 힘을 합하든 인간 스스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여 타락한 죄인의 영혼을 깨끗케 해야만 비로소 복음을 받아들인다. 바울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2:4) 이뤄진다고 했듯이 말이다.
제가 믿게 된 개인적 체험도 마찬가지다. 정말 한국 최고대학을 나온 최고 지성인이 아주 논리정연하게 복음을 설명해주었는데도 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거기다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여 봐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딴죽 걸기 일쑤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어느 순간 믿게 되었고 또 믿고 나니까 성경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을 전혀 의심치 않게 되었다.
가뜩이나 현 세대에 복음이 먹히지 않는데다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면 전도자가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접근부터 해보자. 전도란 어떻게 되었든 기독교의 구원진리에 대해 상대를 설득시켜야 하는 작업이다. 단순히 복음을 납득하여 동의하는 단계에 그치면 안 된다. 상대에게 예수를 정말로 믿을 마음이 생겨야 한다. 그런 결단과 실행으로 옮겨지기 위해선 반드시 그럴만한 동기부여가 일어나야 한다.
쉽게 말해서 믿으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긴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믿은 후에 그 보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있어야, 최소한 믿는 자가 아주 부럽기는 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와 교회들이 전도를 아주 손쉽게 하려 든다. 믿으면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고, 자식도 공부를 잘하고, 기도하면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전지전능의 하나님만 소개한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방식도 이제는 먹히지 않는다. 아무리 잘 믿어도 돈이 없어 쩔쩔 매고 중병에 걸려 고생하는 모습을 주위 신자들 중에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아주 궁핍하여 힘들게 살던 때나 먹히던 전도다. 물론 오늘 날도 너무 힘들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오는 자는 간혹 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전도보다는 고난 자체가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그럼 인격적으로 변화하여 선행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물론 신자라면 꼭 그래야 하고 전도의 좋은 방안이 된다. 그러나 불신자 가운데도 의롭고 선한 자는 많다. 오히려 신자들이 말만 앞서고 뒤로는 호박씨 까는 위선자라는 비난을 더 많이 듣고 있다. 또 무엇보다 의로워지는 데에 꼭 종교가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정적인 동기부여로는 작용하지 못한다.
진짜로 전해야 할 것은?
그럼 신자가 불신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첫 째 가는 측면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신자와 불신자가 가장 크게 다른 점을 보여주면 된다. 그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이 또한 너무나 간단하다. 바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다. 너무 싱거운 대답 같은가? 아니다.
기독교 고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해서 교리만 전하거나 특유의 종교 의식을 보여주라는 뜻이 아니다. 살아 계신 예수를 전해야 한다. 모든 신자에겐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 성령으로 와 계시며 절대 떠나지 않으신다. 신자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예수의 생명력이 겉으로 넘쳐 나와야 한다. 그래서 불신자도 그 힘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예수라는 보배를 가졌으므로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고후4:7) 불신자로 알게 해야 한다. 기도하여서 암이 낫고 사업이 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단순히 해석하면 안 된다. 성경은 훨씬 다른 의미를 말하고 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모습이다. 기도하여 크게 흥한 모습이 아니다. 단지 세상의 핍박에 절대 굴하지 않는 모습일 뿐이다.
어떤 열악한 환경에 처해도, 아무리 힘든 고난이 닥쳐도, 요동치 않으며 오히려 감사와 기쁨과 소망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주위의 힘든 자를 위로하며 섬길 수 있는 모습이다. 신자의 속에 진짜로 예수가 있으므로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믿음을 내보여야 한다. 세상 사람은 환난이 닥치면 돈, 권력, 지식, 건강, 심지어 요행에만 의지하지만 신자는 그런 것들이 근원적이 해결책이 결코 될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그분 외에서 만족, 행복, 능력, 안전 등을 절대 구하지 않아야 한다.
신자의 그런 확신과 실천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하면서 자신을 택하여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올리신 그 사랑은 절대로 취소는커녕 줄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권능과 은혜가 언제 어디서나 넘치도록 자신을 붙들고 있음을 알기에, 아니 그것들을 누리며 살기에 세상과 사람과 죄악과 사탄과 나아가 죽음 앞에서도 아주 당당해지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세상의 어떤 것들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불신자들을 전도하려면 정말 예수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고, 예수로 인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고, 예수로 인하여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단순히 그런 구절들을 말로만 외우거나, 액자에 달아 놓고 쳐다보면서 인격수양 하듯 하지 말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환난 중에도, 아니 바로 눈앞에 죽음이 닥쳐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를 바라보는 불신자들이 정말 이상하게 여기게끔 해야 한다. 도대체 저 사람들이 뭘 믿고 어떻게 생각하기에 저럴 수 있는가? 우리와 사는 방식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고 의아심, 호기심,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너희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한 번 믿어보고 싶다는 동기가 유발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신자라도 환난이 닥치면 괴롭고 힘들다.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기는커녕 기도도 하기 힘들 때도 있다. 때로는 이전의 나쁜 습관이 도지거나 세상 쾌락과 죄악에 넘어가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최소한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그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큰 소리 치면서 불안과 초조에 떨며 불신자와 동일하게 안절부절 하든지 세상 방식을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조금만 힘들면 그저 울고불고 방방 뛰는 모습을, 기도는 열심히 할지언정, 보여주는데 누가 신자를 부러워하겠는가? 또 병이 낫고 공부 잘하고 돈 버는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전문가다. 구태여 기도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처리하고 더 형통한다. 명색이 신자라면서 염려하기는 마찬가지이고 주일날 교회 가는 것 말고는 자기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면 구태여 시간과 경비를 손해 보며 예수 믿을 필요는 전혀 없지 않겠는가?
신자도 불안하고 힘들 수 있고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전혀 갖지 못한 아니 알지도 못하는 “십자가에 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가? 그분이 평생을 두고 땅 끝까지 내가 가는 길에 동행하여 주시지 않는가? 세상 사람과 똑 같이 염려하고 종교적 형식만 제외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예수님과는 도대체 왜 동행하는가? 아니 과연 그분이 동행해 주실까?
현실적으로 아쉬운 것 전혀 없이 다 갖춘 불신자, 예컨대 재벌회장이라도 평생을 두고 절대로 못 가지는 것이 하나 있다. 인생에서의 참 평강과 참 기쁨이다. 대체 자기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타락한 영혼은 공허와 허무로만 가득 차 있어서 무엇을 해도 갈급하기만 하다. 불행하게도 아무리 해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허공만 치고 향방 없는 달음질만 하다가 일생을 마친다. 그들 속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영혼이 그분의 보혈로 씻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는 다르다. 자기의 자기 된 바를 오직 예수 안에서 발견한 자다. 자기는 이제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자 친 자녀가 되었기에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을 더 이상 흔들거나, 넘어트리거나, 더럽게 하거나, 죽일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 영혼이 예수님의 보혈 가운데 날마다 새롭게 되기에 죄악과 사탄과 죽음 앞에 너무나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된다. 비록 현실적 겉모습은 날로 후패해도 속사람은 천국의 소망으로 더더욱 강건해진다. 언제 어디서든 참 평강과 참 기쁨을 예수 안에서 회복할 수 있다.
현세대는 절대적 진리가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는다. 또 종교적 믿음으로 현실적 고통을 해결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나아가 세상은 역사상 최고로 풍부한 물질과 앞선 기술이 주는 안락에 젖어 있다. 인격적 성숙도 스스로 알아서 자기 생각대로 하면 그만이다. 이런 그들 앞에 신자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다. 예수로 인해 어떤 경우가 닥쳐도 평강과 기쁨을 드러내는, 최소한 잃지 않는 모습이다. 저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세상 사람이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어야 조금이라도 믿어볼 생각을 가지게 될 것 아닌가?
스데반의 헛된(?) 죽음
스데반의 변론은 순교로 끝났다. 그 전도가 사실상 아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아니 기존의 신자마저 핍박을 받아 곳곳에 흩어져 버렸다. 비록 그들이 흩어진 곳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긴 했지만 스데반이 유대법정에서 그렇게까지 논리정연하게 변론했음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역사상 가장 큰 전도가 일어났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한 번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킨 것보다 더 큰 전도다.
바울이 전도된 것이다. 바울이 누구인가?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13권을 저작했고 특별히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설명했던 자다. 또 당시로선 땅 끝까지 전도하여 곳곳에 초대교회를 세웠다. 후대의 모든 신자들은 사실상 그로 인해 전도되었다고 해도, 최소한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지 않는가? 정말 역사상 최대의 전도로 꼽힐 만하다.
그가 스데반에 의해 전도되었다는 비밀은 “사울(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이름)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라는 기록에 숨겨져 있다. 아니 사울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고 또 신자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끌어다 옥에 넘겼는데 어떻게 전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그가 스데반 순교로 인해 신자들을 더 핍박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 이전에 스데반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그다.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7:58) 율법에 의하면 이단이나 우상 숭배자를 죽일 때에 재판장이 먼저 돌로 치게 되어있다.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백성이 손을 대라.”(신13:9) 증인들이 사울의 앞에 옷을 벗어 두었다고 한다. 사울이 먼저 옷을 벗고 돌을 던진 것을 암시하는 표현임에 틀림없다.
그럼 점점 더 그가 전도당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가? 그러나 스데반이 그런 모습으로 순교당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까지 예수의 가장 큰 대적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가 작심하고 신자를 잔멸하기로 나섰기에 어쨌든 그럴만한 동기가 부여된 것만은 틀림없다. 단순히 스데반의 변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유대교에 저촉되는 나사렛 이단으로 간주해선 그렇게까지 날 뛸 수는 없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가 광분(?)하게 된 계기 즉, 동기부여가 된 단초를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행6:8-10)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 유대인들은 각지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율법에 따라 일 년에 세 차례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성전 제사를 드렸다. 또 수시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각 지역출신 별로 만든 회당을 방문하여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누었다. 지금 그런 각 회당에서 헬라파 집사인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복음으로 변론할 때에 아무도 능히 당치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길리기아인도 있었는데 바로 사울이 그곳 출신이었다.(행22:23) 무슨 뜻인가? 사울도 스데반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변론 해봤지만 복음의 진리에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토론에 진 앙심을 품고 그 재판장에서 스데반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고 또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어쩌면 고소하게 여겼던 것이다. 물론 성경에 그런 명시적인 언급이 없지만 구태여 길리기아 사람이 스데반과 토론했었고 또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의 죽음을 주도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충분한 개연성은 있다.
어쨌든 사울이 도에 넘치는 미움으로 신자를 핍박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럼 그도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이 크게 찔렸던 것도 사실이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달려들어 성밖에 내친 군중들과 동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스데반이 하는 말을 하나 빠트리지 않고 들었고 또 그의 모습도 아주 찬찬히 관찰해 보았을 것이다.
비록 청년 때인지라 변론에 졌어도 스데반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결과 나름대로 큰 쇼크를 받은 것은 틀림없다. 스데반은 유대공회원들에게 메시아를 살인한 죄인이라고 선고했다. 심지어 율법을 받아 가르치는 자들이 오히려 더 지키지 아니하는 죄인이라고 지적했다. 그 말을 들은 사울도 분노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나중에 자신들의 사역 즉, 전도나 선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유대 법정에서 그는 망하는 자가 되어 스데반에게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자신의 죄가 있는 그대로 지적당하자, 물론 그 당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겠지만,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죽임을 주도하고 죽임 당함을 고소하게 여기고 더 이상 그런 자들을 세상에 놓아둘 수 없다고 설치게 댄 것이다.
결국 스데반은 유대공회에서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너무나 훌륭한 전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십자가 복음으로만 사망과 생명, 심판과 구원 둘로 확연하게 나누었지만 당시 법정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뛰어든 것이다. 말하자면 스데반이 사울에게 사망의 길로 가도록 확실한 동기부여를 했던 것이다.
순교의 또 다른 냄새
그러나 사울이 단지 토론에 졌고 자기 죄가 지적당했기에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또 고소하게 여기기만 한 소인배였다면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사도로 들어 쓰실 리는 없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그가 단지 사망의 냄새만 맡고 끝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가 스데반과 변론 할 때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사울은 가미라엘 문하로 율법의 의로는 하자가 없는 자였다. 하나님을 믿는 열심과 정성에서도 누구보다 앞섰다. 한마디로 종교적, 도덕적으로 당대 최고 의인이자 율법의 최고 전문가였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율법을 풀어주었을 것이다. 예컨대 사울은 모세의 이혼장만 있으면 이혼하면 된다고 여기는데 스데반은 간음한 연고가 아니면 이혼하면 안 되고 억울하게 이혼한 여자에게 장가가면 또 다른 간음을 한 것이라고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정당한 복수는 해도 된다고 인정했는데,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고도 한다. 나아가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는데, 예쁜 여자를 보고 속으로 음란한 생각만 해도 간음한 죄를 범했기에 선행과 공적으로는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다.
사울로선 동의는커녕 도대체 이해도 안 되는 말이었다. 어떻게 로마제국 같은 민족의 원수를 사랑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여자를 보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죄를 지었다면 자기 같은 의인도 구원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그가 율법의 규정들을 갖다 대며 계속 반박해 보았지만 스데반의 설명은 알듯 모르게 거침없이 더 쏟아졌을 것이다.
대체 이런 이상한 가르침을 퍼트리는 이를 가만 두었다가는 유대교의 큰 위험요소가 될 것 같은 염려가 들었을 것이다. 결국 군중들과 함께 공회에 끌고 와서 대제사장들의 심판에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오히려 더 담담하고도 자신 있게 자기가 믿는 바를 변론하지 않는가? 십자가에 죽은 저주 받은 죄인이 메시야였으며 그를 죽인 공회원들이 오히려 죄인이며 율법도 지키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면서 말이다. 솟구치는 분노를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를 더 큰 혼란에 빠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대인들이 위협하여 공회로 끌고 왔음에도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너무나 평온했다. 또 모든 공회원들이 당장 잡아 죽일 듯이 이를 갈고 있는데도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선포했다. 공회원들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로 죽였던 예수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있다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사울에게 스데반은 미쳐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이는데도 스데반은 죽이는 자를 저주하기는커녕 도리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는 자는 듯이 평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회당의 토론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계명이라고 비방했는데 이제 본인이 가르친 그대로 실천하며 죽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사울의 가슴은 개인적 종교적 분통과 저주로 사로잡혔지만 머리는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더 복잡해졌다. 저런 사람과 또 저런 일은 생전 처음 보는 경험이었다. 논리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체계를 도무지 세울 수 없었다. 스데반이 나사렛 예수 이단에 완전히 미친 광신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반면에 혼자서 담대하게 공회원들과 맞서 변론했고 죽어가면서도 자비에 가득 차 그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했고 나아가 너무나 평안히 죽은 모습들은 사울의 뇌리에 깊이 각인 되었다.
말하자면 사울이 스데반이 죽은 후에 광분(?)하여 신자를 핍박한 것은 일종의 오기싸움이었던 것이다. 스데반과 자신 중에 과연 누가 옳은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인지 따져 보자는 것이었다. 무식한 어부와 세리들이 어떤 핍박 앞에서도 당당하여 평강을 잃지 않으며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고 다녔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갈수록 많이 나왔다. 사울로선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이성, 교육, 체험, 나아가 종교적 관습과 구약경전의 말씀 등에 비추어 보면 반드시 자기가 옳아야만 했고 스데반은 완전히 틀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문제는 스데반처럼 원수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의 이단을 당장 끌어 잡아다 처단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데도 기쁨은커녕 평강도 없고 오히려 까닭모를 공허와 갈급함과 심지어 초조 염려마저 덮쳤다. 나아가 하늘 보좌에 인자가 있음을 보는 체험은커녕 자기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지도 않았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죽음을 맞이할 자신은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그런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더욱 신자들을 핍박해 보았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옳다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그분이 승인하고 축복해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아 영혼은 더 피폐해가는 가운데 드디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사흘간 죽음과 방불한 체험을 했고 단지 예수 믿는 이름 없는 신자의 기도로 봉사 되었던 눈이 떠졌다. 그 사흘 동안에 성령이 그의 영혼을 뒤집어 놓는 역사가 일어났고 비로소 그는 예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무릎을 꿇었다.
바울로 변한 그에게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이 정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고후4:10)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이 인간의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유일한 길임을 철두철미 확신케 된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예수님과의 실질적이고도 인격적인 대면을 통해 오직 예수만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삼은 자로 거듭난 것이다.
말하자면 스데반의 변론은 앞으로 최고의 사도가 될 사울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완연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사울은 외면적, 감정적으로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맡아 지금껏 그랬듯이 망하는 자의 대열에 당분간은 서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을 어지럽힌 또 다른 냄새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였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영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려고 씨름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온전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스데반이 헛되게 순교한 것 같지만 역사상 최대의 전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상 최대의 전도사건만 설명하려는 뜻이 아니다. 역사상 최대의 전도라고 해서 스데반이 아주 특별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변론에 아무도 감동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미움만 생기게 만들었다. 그는 오직 예수만이 소망이며 그분이 없는 인간은 절망뿐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한 것뿐이다. 십자가 복음을 복음답게 온전히 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도 상대의 반응은 코웃음뿐이다. 유대 공회의 반응과는 너무나 다르다. 전도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는 사망과 생명의 두 냄새를 동시에 피워야 한다. 그래서 상대로 반드시 사망과 생명 둘 중 하나의 반응으로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전도자가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사망과 생명의 교차로를 통과하여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명과 사망을 초월하는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 속에 보배로 소유하고 있는 예수의 생명력이 남들에게까지 전해져야 한다.
너무 영적으로 심오하게 이해할 필요 없다. 스데반처럼 하면 된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또 나와 지금 함께 하고 있으므로 세상의 어떤 핍박 앞에서도 당당하기만 하면 된다. 죄악과 사탄에게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최소한 세상 사람이 사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어야한다.
혼자서만 끝까지 당당 하여 영웅적 죽음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당당함은 스데반처럼 죽으면서도 핍박자를 진정으로 안타까이 여기고 긍휼의 기도를 해주는 사랑이 함께 드러나야 한다. 십자가 복음이 자신에게 진정한 복음이 되어 있다면 그 복음 그대로 말로 전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전도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당연히 따라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세대의 사람들에게, 아니 원죄로 타락한 모든 세대의 죄인에게 예수를 믿어볼까라는 동기부여를 제대로 하려면 신자의 삶과 인생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유지되고 있는 모습을 주위에 보여주는 것 말고는 없다. 이것 외의 어떤 방식도 단지 종교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 것이지 참 전도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전도를 하고 있는가? 정말 십자가 복음이 당신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자 삶의 근원이 되어 있는가? 그래서 그분으로만 인해 살고 죽고 있는가? 또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당신이 가진 보배 예수에 대해 최소한 궁금해 여기기는 하는가?
11/24/1996 유타대학촌교회 주일설교를 보완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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