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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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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8: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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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우리 신앙의 솔직한 현주소
사도행전강해 (35)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8:4-25)
땅 끝으로 가는 징검다리
스데반의 순교사건에서 보듯이 예수 믿는 신자들을 가장 먼저 핍박한 계층은 로마가 아니라 동족 유대인들이었다. 스데반이 그들을 메시아 예수를 살인한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천사가 전해준 율법도 제대로 지키지 아니한다고 지적하자 이를 갈며 신자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바울로 회심하기 전의 사울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잔멸하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 결국 사도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는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본문은 그가 사마리아 지역에 내려가 전도한 결과를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도하라고 명하셨다. 아니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제 그 약속의 말씀대로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독교 세력권이 지리적으로만 확장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8세기에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앗시리아에서 온 이주민들과 혈통적으로 혼합 되었다. 종교적으로도 변형된 유대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체 성전을 지어 제사를 드렸고 수정된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믿었고 ‘타렙’으로 불리는 자기들 종족만의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이 사마리아라고 말할 때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북왕국 자체나, 그 수도와 인근의 지역과, 인종적으로 혼혈유대인을, 또 문화 관습 종교적인 혼합주의(Syncretism) 등을 뜻한다.
당시로선 헬라어가 로마제국 전체의 공용어인지라 복음 전도에 불편은 없었지만 사마리아가 지니는 이런 특성 때문에 교회선교사적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마리아는 유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꼭 그곳을 통과해야만 이방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과 혼합했기에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들을 멸시하고 그 지역을 통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유대인과 가치관과 사고방식 등에서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이방의 문화, 관습, 종교에 많이 물들어 있었다. 한 마디로 이방인은 유대인과 완전히 다르다면 그들은 반은 이방인 반은 유대인인 셈이었다. 사도들이 지금껏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전도하기 위해선 반드시 건너야할 중간 징검다리였다.
물론 복음은 인간의 영혼에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인간적 장벽도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는 자는 여전히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문화, 관습, 종교 등 상황에 맞추어 적절한 방식으로 복음을 소개할 필요는 있다. 로마인이자 유대인이었고 또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던 바울조차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방식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는가? 말하자면 스데반으로 인해 일어난 초대교회에 대한 최초의 박해는 하나님이 신자들을 땅 끝까지 보낼 십자가 군병으로 양성하는 훈련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성직매매
성경은 지금 그런 와중에 복음을 잘못 오해했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를 길게 기술하고 있다. 반면에 빌립이 설교할 때에 귀신이 쫓겨나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낫는 표적이나 무리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여 성중에 큰 기쁨이 일어났던 일은 상세히 기술하지 않았다.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이 일어나면 이적이나 참 된 회개가 따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 외형적 결과에 관심을 가질 것 없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면 부흥은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이루신다. 대신에 특별히 길게 기록된 사건에는 세밀히 주목하여야 한다.
시몬은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13절) 그러나 그의 관심은 오직 이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자기보다 빌립이 훨씬 크다는 데에 가있었다. 틀림없이 자기는 전부 눈만 속이는 사기술이었지만 생전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게 되어 너무 놀라고 진짜 신기하게 여겼을 것이다. 마술사니까 그런 이적은 인간에 의해선 도무지 일어날 수 없음을 더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빌립이 보여준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번져나가는 상황을 알아보러 예루살렘에서 내러온 사도들로부터 크게 야단만 맞았다. 성경은 사도들이 새로 믿은 사마리아인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신자들이 방언을 했을 것이다. 시몬으로선 마술사들이 자기 기술을 제자에게 전수하듯이 안수를 통해 사도가 갖고 있는 능력이 신자에게 넘어가는 것처럼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려고 했던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인간이 고안해 낸 비술이나 계책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들을 당신의 뜻에 따라 온전한 믿음의 신자들에게 나눠주실 뿐이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역이 더 활성화되게 하는 목적과 용도로만 그렇게 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권능이 전해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만약 사도나 신자가 온전한 믿음 위에 서있지 않으면,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으면, 아무리 사도가 안수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몬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시몬의 시도는 사도들을 마술사 수준으로 깔본 것을 넘어서 하나님과 장사하자는 꼴이었다. 하나님을 돈에 따라 움직이는, 심하게 말해 돈을 밝히는 분으로 격하시키는 짓이었다. 열심과 정성을, 그것도 신전에서 돈이나 물품으로 바꾸어 더 많이 바치면 더 많은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방의 우상숭배 습관에서 나온 짓거리였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경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한 큰 죄를 범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그 자리에서 벌을 받아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시몬의 더 큰 잘못
그의 잘못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로선 자신이 권능을 받는 것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려면 사도들에게 안수 기도를 받아서 자기도 방언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사도들처럼 자신이 안수하면 그 받은 자에게도 권능이 나타나길 원했던 것이다.
신자가 사도들처럼 되고 싶다면 그보다 선한 것이 없을 텐데 과연 무엇이 잘못인가?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가 안수하면 권능이 남에게 나타나게 되기를 원한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의 추종자를 모아서 명예, 권세, 재물을 얻고자 한 것이다. 마술사 중에서 최고 마술사가 되려 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에 놀라긴 했지만 일개 마술로 취급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에 비추어 영어로 Simony라는 성직매매(聖職賣買)를 뜻하는 단어가 생겼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기독교 전 역사에 걸쳐 돈으로 성직을 사는 일은 수 없이 발생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결심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개혁으로 그 잘못된 관습이 근절되지 못하고 지금도 Simony가 성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가톨릭 쪽이 아닌 개신교에서 말이다. 예컨대 개교회의 안수집사나 장로 선발 투표를 필두로 교단의 총회장 선거까지 돈 봉투가 알게 모르게 난무하고 있다. 간혹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치졸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심심찮게 기독교 공격과 비방의 빌미를 외부에 제공한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인이 타락한 것이지 기독교 자체가 변질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으로 불리는 인간이 문제다. 성경에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또 그로 인한 값없이 은혜로 얻는 구원에 관한 진리는 지난 이천 년간 변한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
또 초대교회 때에, 아니 창조 이후부터 하나님의 자녀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권능은 지금도 살아서 바로 이 시간 이 예배당에도 충만하게 임재해 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 승천 이후 하나님의 신이 만민에게 부어졌다.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게 된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처럼 지금도 신유의 기적을 일으키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일들이 풍성히 일어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탈도 많고 말도 많을뿐더러 신자들이 똑 같이 치사하고 죄를 짓기에 믿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쉽게 말한다. 물론 일부, 아니 상당수 교회와 교인이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너무나 엄청난 손해를 자초한다는 사실이다. 남이 잘못한 것과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무리 부패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의 십자가 죽음에서 보여주신 영광의 빛은 영원하다. 교회나 교인들의 부조리를 핑계로 그 빛을 거부한다면 남들이 어찌 되었든 본인은 영원한 심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앙의 대상과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절대적으로 영원히 자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땅의 가시적인 종교 체계가 결코 아니다. 기존의 조직체 교회들은 그 중에서도 일부분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유업을 소망하며 사는 일과 교회의 멤버가 되는 일을 서로 혼동해선 안 된다. 전자는 항상 후자를 포함할 수 있어도, 후자가 전자를 자동으로 수용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간혹 새 교인들 중에 저희 교회가 탈이 없고 치사한 꼴을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져 출석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은 많이 부족한 판단이자 큰 오산일 수 있다. 저희에게 비교적 문제점이 적을지는 몰라도 아예 없다고는 장담 못한다. 때대로 저를 필두로 교회가 비성경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불안전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모였기 때문에 탈이 없을 수 없다. 제발 그런 기대를 갖지 말기 바란다. 대신에 과연 얼마나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치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지 여부를 세밀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시몬보다 더 어리석은 현대 교인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예수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만약 세계 인구의 10% 만 기독교인이라 쳐도 모든 신자가 평생 두세 명만 전도해도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 세대 안에 주님이 다시 오실 수 있다. 전도 받은 자도 다시 전도할 것이므로 간단명료하게 그런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2천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신자들이 전도를 전혀 하지 않았거나, 전도하는 자가 참 신자가 아니라 잘못된 전도를 했다는 이유 밖에 없다. 한 마디로 기독교인은 많아도 참 신자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가지 못한다.
지금도 돈 봉투를 뿌려대며 싸우는 목사, 장로 들은 단언컨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로 참 기독교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 마귀에 붙잡힌 자녀 내지는,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예수님과 등을 지고 있는 상태다. 현대판 Simony를 예사로 시행하고 있으니 하나님에게서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다”는 선고를 받아야 한다. 그 악함을 회개하고 제거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게 Simony를 자행하는 자들은 사실은 전체 교인 중에 극소수다. 나머지 대다수 신자들은 대체 무엇을 하기에 땅 끝까지, 아니 소속된 사회나 공동체마저 복음화 시키는 일이 이렇게 더딘가? 사실은 모든 신자들 사이에 Simony가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돈으로 집사, 구역장, 성가대장 직분 등을 사려한 적이 전혀 없는데 무슨 말인가 싶은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너무나 자주 Simony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시몬이 범한 잘못의 내용이 무엇인가? 복음의 진리에는 건성으로만 동의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얻고자 했다. 그것도 밑천을 투자하여 몇 배로 남길 궁리를 했다. 바울로 인해 에베소가 복음화 되자 그곳의 마술사들이 자기들 비술을 적은 책을 전부 들고 나와 불에 태웠는데 그 값만 무려 은 오만이나 되었다.(행19:19) 책값만 그러하다면 마술을 시행해서 얻는 이익은 그 수백 수천 배다. 시몬이 돈을 들여서라도 성령의 권능을 얻을 만했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의 능력을 자기 계획과 욕심대로 조종하려 했다.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아 추종자들을 모으고 크게 이름을 높이고 치부하며 권세를 부리려 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계획과 소원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 얻으려는 동기에서 시도하는 모든 일들이 Simony다. 그것도 자기가 바친 만큼 몇 배로 돌려주실 것이라는 예상, 기대, 믿음의 바탕에서 말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진지하게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헌금을 바치며 심지어 전도 봉사해도 근본 신앙 사고가 그렇다면 Simony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 하나님께 잘 보여 보상받아야겠다는 사고는 필연적으로 진지하고도 경건한 열심과 정성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시몬은 우리에 비해 아주 순진한 셈이었다. 신앙수준이 아직은 눈으로 보고 들은 것으로만 판단했다. 성경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고 체계적인 신앙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던 때였다. 사도가 안수하니까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므로 단순히 사도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매개체 역할을 맡았다고 판단했고 자기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 그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촉구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24절)라고 자신의 문제마저 사도들더러 대신 기도해달라고 당부했다. 여전히 사도를 통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인은 마술 비법을 절대 알 수 없으며 특별히 뽑힌 제자에게만 은밀히 전수되는 것과 같으리라 착각한 것이다. 또 당시의 모든 우상 종교에선 사제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종교적 행위도 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비슷하리라 여긴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그런 중개자가 필요 없다. 제삼자의 개입이 전혀 없이 하나님과 신자 간에 일대일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교통이 이뤄진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이 내주하여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아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부터 성령이 간섭하시어 그분을 향해 완악했던 마음을 바꾸고 열어서 믿음 자체를 심어주신 것이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신자에게 이미 내주하는데 인간 중개자가 따로 필요할 리 만무하다. 또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의 종교적 체계나 조직과 사람들에 문제가 있어도 십자가 예수님의 진리와 영광은 불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는 시몬 때와는 다르다. 마술 같은 미신이나 주술이 거짓의 아비 사탄의 위계임을 잘 알고 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 누구나 성경을 소유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도 시몬과 하나 다를 바 없이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 하니 대체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시몬보다 더 어리석은 것인지, 더 영악한 것인지, 아예 사탄의 장단에 춤을 추는지, 아직도 그 수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중개인이 필요 없는 이유
시몬은 자기가 안수하여 능력이 나타나면 추종자들이 모일 것이며 자기의 조종여하에 따라 그들이 돈과 권세와 명예도 함께 바치리라 계산했다. 중세 가톨릭도 아닌 현대 개신교 교회들 안에서 성직매매가 성행하는 이유도 하나 다를 바 없다. 총회장, 노회장, 지방회회장, 장로, 안수집사, 같은 직분을 통해 돈, 권력, 아니면 최소한 명예는 응당 따를 것을 기대, 아니 계산한 것이다.
성경이 그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 마음이 부패한 정도를 넘어서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선언한다. 진리를 잃어버렸다면 아예 성령이 임재해 있지 않았거나, 잠시나마 사탄에 미혹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만약 그런 자가 거듭난 참 성도라면, 그런 일을 하는 중에 성령은 속에서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고 있고, 하나님은 사탄에 넘어간 것을 잠시 묵인하셔서 그를 연단시키는 중이다.
또 성경은 불신자가 교회 안에 섞여 있거나, 하나님이 참 신자를 연단시키는 중이거나 간에 Simony의 결과는 다툼이 일어난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돈, 권력, 명예만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구하려 하기에 하나님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사탄에게 미혹된 그 상태대로 두신다. 필연적으로 서로 간에 인간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많이 차지하려고 충돌이 일어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조차 다툼이 일어난다면 일단 그 분쟁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무조건 분쟁 자체를 멈추어야 한다. 모든 당사자가 교회 일을 자기 혹은 자기편의 현실적인 돈, 권력, 명예를 도모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는지 솔직하고도 철저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성직매매 같은 부정을 개혁하려 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바로 교회 안의 돈, 권력, 명예 다툼을 중지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부정부패의 죄악을 없애는 방안으로 단순히 제도적 개혁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평신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날 수 있음을 알게 해서 교회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도록 바꾸려 했다.
그때까지 가톨릭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권한을 중간에 가로채어서 독점했다. 자연히 돈, 권력, 명예가 교회에 집중되었고 또 교회는 부패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부패를 고친다고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을 신자들에게 돌려주어 그들로 직접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해야 했다. 당연히 가톨릭은 그동안 독점해 오던 종교적 권력체계가 붕괴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극렬히 반발했고, 반면에 기존의 독점적 종교체계에 저항하는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가 태동된 것이다.
다른 말로 개신교는 성직매매와는 절대로 담을 쌓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잘못을 고치려 생긴 교회가 똑 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 단순히 그런 부정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 돈, 권력, 명예를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신앙생활 전반에 교회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런 것을 알선해 주는 중간자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해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잠간 언급한 대로 너무나 간단하다. 이제는 성령님이 신자 모두에게 내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신자의 형편을 속속들이 아시기 때문이다.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아니하시고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고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 신자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입술의 말과 마음의 생각까지 모르는 바가 전혀 없다. 그 출입을 처음부터 영원까지 지켜보고 계신다.
신앙의 본질
따라서 신앙이란, 엄밀히 따져 말하자면, 신자가 하나님을 알아 나가는 작업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그렇다. 또 신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가야 한다. 잠언의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고, 또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하나님을 몰라서 망한다고 경고했다. 정말 그분을 평생토록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또 실제적인 인격적 대면과 그분의 인도하고 보살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알아 나가야 한다.
그분을 알아나가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싸움이자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분의 크고 풍성하심, 엄청나게 위대하신 능력,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사랑과 공의, 그분의 진리 됨과 아름다움과 선하심 등은 도무지 인간의 지혜로 온전히 알 수 없다. 그 규모마저 측량은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평생을 두고도 그분의 오묘한 섭리와 완벽하신 다스림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분을 알아나가는 싸움을 쉬지 않고 벌여야 한다. 그래서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인가? 도무지 우리 스스로는 그분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분 쪽에선 우리를 너무나 정확하게 우리보다 더 세밀하게 전부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횟수가 자꾸 늘어난다. 나아가 그분은 우리를 알고 계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도무지 그럴만한 형편과 자격과 공적이 우리에게 전혀 없는데도 그분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된다.
따라서 신앙이란 날이 갈수록 내가 그분을 아는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엄밀히 말해 본질적으로 그분을 알아가는 싸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우리가 그분을 아는 것에 비해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심이 엄청나게 많고 세밀하다는 것을 확인해 가는 작업이 신앙이 된다. 나아가 그분이 나를 보호 인도해서 이끌고 가려는 궁극적 목적지와 그곳에서 얻을 열매가 너무나 영광스럽다는 진리를 차츰 더 확실하고도 명료하게 깨닫게 되는 작업이다.
정말로 그분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지금 나를 채우고 계시며 또 유업으로 주시려고 너무나 풍성하게 예비해 놓았음을 확신하고 그분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다. 그분에 대한 갈망이 갈수록 커져가기에 현재의 나의 현실적 형편과 상황은 전혀 문제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분의 능력을 빌려 이 땅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를 쌓으려는 생각이 진짜로 추호도 없어지는 단계에 이르려는 싸움이 바로 신앙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이유를 시편 103편의 기자가 잘 설명하고 있다.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그래서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기 위해서였다.(10-12절)
한마디로 죄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그 죄과를 도무지 옮길 수 없었기에 그분이 대신 옮겨주셨다. 동은 서에서 먼 정도가 아니다. 동은 서를 절대로 만날 수 없다. 영원토록 완전 반대편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를 경외하는 자는 지옥의 진노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천국의 영생의 유업이 완전히 보장된 정반대의 자리로 이미 옮겨진 것이다. 이 두 자리는 절대 영원토록 공존은커녕 만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기에(15절),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어”(13절),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고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주케 하셨다.
신앙의 대상
이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응당 오직 하나님과,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의 독생자와, 그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하며 그 은혜 안에서 자라게 하는 성령님 삼위에게 국한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와 별도로 멀리 떨어져서 존재하는 국외자 내지 방관자가 아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다. 신자에게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는 법이 없다.
바꿔 말해 우리 신앙의 시작과 끝은 오직 주님이시다. 신앙을 심어 주시는 이도, 키워 주시는 이도, 완성시키는 이도 주님이시다. 당연히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인간 위주의 신앙이 되어선 당장에 변질하게 마련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인간의 욕구, 이익, 안전, 자존심, 정신적 평강, 사후보장, 만족, 행복을 위한 목적과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생긴 것이 절대 아니다.
나아가 어떠한 모습이나 형태라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신앙이 존재 유지 성숙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쉽게 말해 신앙이 가져다주는 반사 이익을 바라보면 이미 신앙이 아닌 것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유익한 사항을 목표로 하면 아무리 의롭고 선한 것이라 해도 이미 변질된 신앙이다. 그 가운데는 기도로 병을 낫게 하겠다든지, 인격적 성품을 말씀에 따라 의롭게 바꾸려 노력하겠다든지, 믿음으로 정서적 평강과 위로를 얻겠다든지 하는 것조차 신앙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신앙이란 도저히 도망가려야 도망갈 수 없는 주님의 너무나 크신 사랑과 권능을 직접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계시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데 반해, 아니 오히려 그분의 극렬한 저주를 받아 마땅함에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구원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그분을 앎으로써 그 앎에 가장 적합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분을 깊이 알아나감으로써 오히려 그분이 나를 더 잘 알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개자가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단순히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에게서 보상 받을 유익을 위해 동원되는 모든 것이 사실은 다 중간 매개체다. 시몬에게 사도들이 중개자였으며, 또 그 중개자와 자기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돈이라고 착각했다. 돈으로 성령의 권능을 사려했다. 마찬가지로 보상을 받으려 목적으로 신자가 바치는 헌금, 봉사, 기도, 예배, 성경공부, 심지어 믿음도 바로 시몬의 돈과 하나 다를 바 없이 더럽고 추한 제물이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지 않는 어떤 것도 절대 받지 않으신다.
대체 하나님의 독생자가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며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아 인을 쳐 주셨는데 더 이상 중개인이든 중간 매개물이든 무엇이 필요한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바쳐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아들과도 장사하는 장사꾼이지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지 않는가?
불이 나도 뛰어내리지 못하는 신자
그런데도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비유하자면 이렇다. 집에 불이 났는데 이층 난간에 매달린 아이와 같다. 밑에선 뛰어내리라고 아빠가 아무리 소리치는데도 그저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른다. 물론 연기가 번져 미처 아빠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소리만 들어도 아빠인 줄 빤히 알지 않는가? 그 아빠가 밑에 침대 매트를 깔아 놓았으니 무조건 뛰어 내리라고 해도 아빠나 매트가 안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곧 불에 타 무너질 난간만 하염없이 붙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아빠와도 도무지 비교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세밀하게 다 보고 계시다. 아니 현재의 상황과 여건으로 인도하신 이가 바로 그분이다. 또 비록 그분을 우리가 볼 수는 없어도 음성은 이미 들을 수 있다. 아니 이미 수도 없이 들어왔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 세상에 울려 퍼졌고 또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된 그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시쳇말로 바꾸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발 알아먹으라는 것이다. 내가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느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의 사랑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너희를 대신해 죽는 일 말고 더 이상 따로 해줄 일이라곤 아예 없지 않느냐? 단지 그 사랑을 받아 들여서 나에게 진정으로 겸비하게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앞의 비유에 대비하자면 하나님은 불이 난 이층 집 밑에 너무나 푹신한 매트를 온 사방에 널찍하게 깔아 놓았다. 그리고 긍휼에 가득 찬 눈길로 우리를 안타깝게 쳐다보고는 제발 빨리 떨어지라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든, 어떤 모습으로든, 심지어 머리가 먼저 떨어져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라도 뛰어 내리기만 하면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준비 해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 머릿속은 온갖 궁리로 복잡하다. 연기와 불길이 연신 치솟는데도 내 체중이 얼마며, 바람의 속도와 방향이 어떠하며, 이층 난간의 높이가 얼마인지 계산하기 바쁘다. 계산 결과는 도무지 살아날 것 같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계산도 할 줄 모르면서 떨어져 내릴 담력과 믿음이 없어서 불길과 연기가 잠잠해지기만 한 없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면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거인 같은 소방수를 보내서 자기를 업고 같이 뛰어내리게 해 줄 것이라고 착각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소방수 같은 재난전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이끌거나, 그분의 능력을 더 많이 우려낼 수 있는 중개인이나 매개물은 없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예수님이 당신의 몸을 바쳐 그 피로서 그 때까지 인간과 하나님을 가로 막고 있던 모든 휘장을 다 찢어서 없애 버렸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태에 있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겸손히 나가기만 하면 된다.
신자에겐 정말로 영화 인디아나 존스 3편의 마지막 장면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보물이 숨겨진 마지막 관문 앞에 다다른 주인공 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로 사이가 벌어진 캄캄한 허공만 가로막고 있었다. 건너갈 수 있는 다리나 붙잡을 줄이라고는 없었고 소리는 끝없는 반향으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되돌아가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말고는 길이 없었다. 존스는 믿음으로 정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새카만 허공에 한 발을 내딛었고 바로 그 순간 다리가 짠하고 나타났다.
아무리 먹장구름이 하늘을 막아도 태양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 그 위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단지 안 보인다 뿐이지 태양은 항시 그곳에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당신의 백성을 떠나는 적은 없다. 신자가 연기, 불길, 바람, 캄캄한 허공, 사방이 막힌 담 등으로 인해 단지 보지 못할 뿐이다.
어그스틴은 신앙을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우리 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다면 구태여 우리가 그분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무슨 중개인과 중개물이 필요한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과 권능에 힘입어 그분을 그냥 아빠라고 부르면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된다. 그분에게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전부를 완전히 비워 내어드리면 성령님이 인도해 주신다.
사마리아처럼 변한 교회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중개인이 필요 없다고 교회나 목사마저 무용하다는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가톨릭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을 중개해 주는 권세를 독점하려는 교회와 목사는 당연히 필요 없다. 또 그렇기에 올바른 목사와 교회는 오히려 더 필요하다. 교회 안에 누구라도 그런 중개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또 그렇게 믿고 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돈, 제물, 봉사, 전도 등의 열성과 정성이 아니라 오직 갈급하고 가난해진 심령만 있으면 된다고 가르치기 위해서 교회와 목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과 지금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성경대로 가르치고 실천에 옮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혹시라도 기복적 신앙관을 갖고 교회에 나온 자들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할 책임이 교회와 목사에게 있다는 뜻이다. 중세 가톨릭이 범한 비성경적 잘못들을 절대로 다시 따르지 않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교회와 목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이 세대 안에서 당신을 다시 볼 자가 있겠다고 했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다시 오시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나도 세계 복음화는 요원하다. 초대 교회 시절엔 염병처럼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던 복음의 불길이 아주 가느다란 성냥불처럼 작아졌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없다. 그 때는 사도들이 시몬처럼 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려던 사람을 그 자리에서 회개하라고 야단 친 것에 비해, 지금은 오히려 목사와 교회가 그런 일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아직도 알게 모르게 Simony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자신의 형편이 어떻게 되던, 심지어 하나님이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죽으려는 준비와 헌신이 된 채로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도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너무나 큰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서 그분의 사랑을 증거치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아무리 도망치고 거역하려 해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벗어날 수 없으며 성령께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완전히 주장하고 있었기에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요컨대 사도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예수님과 똑 같은 생각과 방식으로 따랐다. 반면에 우리는 그와 반대로 가거나, 가는 시늉만 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서있거나, 겉으로는 같은 길을 가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 빌립 집사와 사도들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라고 하신 주님의 명을 그대로 따랐다. 당연히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일어났고 그들이 가는 각 성마다 큰 기쁨이 있었다. 특별히 돈으로 즉, 인간적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려는 시몬을 물리치니까 사마리아에 복음이 더 확장되었다고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늘날에도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전도해야 할 교회와 신자들 중에 상당수가 오히려 사마리아처럼 혼합주의로 변질되었다. 아니 처음부터 사마리아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사마리아를 넘기는커녕 사마리아를 넘어설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각자의 신앙의 정확한 현주소가 어딘지 정말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당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와 진짜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또 그래서 하나님의 분깃을 받을 확신이 있는가?
7/7/2009
12/1/1996 유타대학촌교회 주일설교를 보완 정리한 것임 -->
사도행전강해 (35)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8:4-25)
땅 끝으로 가는 징검다리
스데반의 순교사건에서 보듯이 예수 믿는 신자들을 가장 먼저 핍박한 계층은 로마가 아니라 동족 유대인들이었다. 스데반이 그들을 메시아 예수를 살인한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천사가 전해준 율법도 제대로 지키지 아니한다고 지적하자 이를 갈며 신자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바울로 회심하기 전의 사울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잔멸하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 결국 사도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는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본문은 그가 사마리아 지역에 내려가 전도한 결과를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도하라고 명하셨다. 아니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제 그 약속의 말씀대로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독교 세력권이 지리적으로만 확장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8세기에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앗시리아에서 온 이주민들과 혈통적으로 혼합 되었다. 종교적으로도 변형된 유대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체 성전을 지어 제사를 드렸고 수정된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믿었고 ‘타렙’으로 불리는 자기들 종족만의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이 사마리아라고 말할 때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북왕국 자체나, 그 수도와 인근의 지역과, 인종적으로 혼혈유대인을, 또 문화 관습 종교적인 혼합주의(Syncretism) 등을 뜻한다.
당시로선 헬라어가 로마제국 전체의 공용어인지라 복음 전도에 불편은 없었지만 사마리아가 지니는 이런 특성 때문에 교회선교사적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마리아는 유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꼭 그곳을 통과해야만 이방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과 혼합했기에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들을 멸시하고 그 지역을 통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유대인과 가치관과 사고방식 등에서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이방의 문화, 관습, 종교에 많이 물들어 있었다. 한 마디로 이방인은 유대인과 완전히 다르다면 그들은 반은 이방인 반은 유대인인 셈이었다. 사도들이 지금껏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전도하기 위해선 반드시 건너야할 중간 징검다리였다.
물론 복음은 인간의 영혼에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인간적 장벽도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는 자는 여전히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문화, 관습, 종교 등 상황에 맞추어 적절한 방식으로 복음을 소개할 필요는 있다. 로마인이자 유대인이었고 또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던 바울조차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방식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는가? 말하자면 스데반으로 인해 일어난 초대교회에 대한 최초의 박해는 하나님이 신자들을 땅 끝까지 보낼 십자가 군병으로 양성하는 훈련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성직매매
성경은 지금 그런 와중에 복음을 잘못 오해했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를 길게 기술하고 있다. 반면에 빌립이 설교할 때에 귀신이 쫓겨나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낫는 표적이나 무리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여 성중에 큰 기쁨이 일어났던 일은 상세히 기술하지 않았다.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이 일어나면 이적이나 참 된 회개가 따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 외형적 결과에 관심을 가질 것 없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면 부흥은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이루신다. 대신에 특별히 길게 기록된 사건에는 세밀히 주목하여야 한다.
시몬은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13절) 그러나 그의 관심은 오직 이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자기보다 빌립이 훨씬 크다는 데에 가있었다. 틀림없이 자기는 전부 눈만 속이는 사기술이었지만 생전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게 되어 너무 놀라고 진짜 신기하게 여겼을 것이다. 마술사니까 그런 이적은 인간에 의해선 도무지 일어날 수 없음을 더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빌립이 보여준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번져나가는 상황을 알아보러 예루살렘에서 내러온 사도들로부터 크게 야단만 맞았다. 성경은 사도들이 새로 믿은 사마리아인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신자들이 방언을 했을 것이다. 시몬으로선 마술사들이 자기 기술을 제자에게 전수하듯이 안수를 통해 사도가 갖고 있는 능력이 신자에게 넘어가는 것처럼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려고 했던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인간이 고안해 낸 비술이나 계책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들을 당신의 뜻에 따라 온전한 믿음의 신자들에게 나눠주실 뿐이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역이 더 활성화되게 하는 목적과 용도로만 그렇게 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권능이 전해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만약 사도나 신자가 온전한 믿음 위에 서있지 않으면,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으면, 아무리 사도가 안수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몬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시몬의 시도는 사도들을 마술사 수준으로 깔본 것을 넘어서 하나님과 장사하자는 꼴이었다. 하나님을 돈에 따라 움직이는, 심하게 말해 돈을 밝히는 분으로 격하시키는 짓이었다. 열심과 정성을, 그것도 신전에서 돈이나 물품으로 바꾸어 더 많이 바치면 더 많은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방의 우상숭배 습관에서 나온 짓거리였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경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한 큰 죄를 범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그 자리에서 벌을 받아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시몬의 더 큰 잘못
그의 잘못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로선 자신이 권능을 받는 것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려면 사도들에게 안수 기도를 받아서 자기도 방언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사도들처럼 자신이 안수하면 그 받은 자에게도 권능이 나타나길 원했던 것이다.
신자가 사도들처럼 되고 싶다면 그보다 선한 것이 없을 텐데 과연 무엇이 잘못인가?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가 안수하면 권능이 남에게 나타나게 되기를 원한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의 추종자를 모아서 명예, 권세, 재물을 얻고자 한 것이다. 마술사 중에서 최고 마술사가 되려 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에 놀라긴 했지만 일개 마술로 취급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에 비추어 영어로 Simony라는 성직매매(聖職賣買)를 뜻하는 단어가 생겼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기독교 전 역사에 걸쳐 돈으로 성직을 사는 일은 수 없이 발생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결심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개혁으로 그 잘못된 관습이 근절되지 못하고 지금도 Simony가 성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가톨릭 쪽이 아닌 개신교에서 말이다. 예컨대 개교회의 안수집사나 장로 선발 투표를 필두로 교단의 총회장 선거까지 돈 봉투가 알게 모르게 난무하고 있다. 간혹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치졸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심심찮게 기독교 공격과 비방의 빌미를 외부에 제공한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인이 타락한 것이지 기독교 자체가 변질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으로 불리는 인간이 문제다. 성경에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또 그로 인한 값없이 은혜로 얻는 구원에 관한 진리는 지난 이천 년간 변한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
또 초대교회 때에, 아니 창조 이후부터 하나님의 자녀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권능은 지금도 살아서 바로 이 시간 이 예배당에도 충만하게 임재해 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 승천 이후 하나님의 신이 만민에게 부어졌다.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게 된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처럼 지금도 신유의 기적을 일으키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일들이 풍성히 일어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탈도 많고 말도 많을뿐더러 신자들이 똑 같이 치사하고 죄를 짓기에 믿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쉽게 말한다. 물론 일부, 아니 상당수 교회와 교인이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너무나 엄청난 손해를 자초한다는 사실이다. 남이 잘못한 것과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무리 부패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의 십자가 죽음에서 보여주신 영광의 빛은 영원하다. 교회나 교인들의 부조리를 핑계로 그 빛을 거부한다면 남들이 어찌 되었든 본인은 영원한 심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앙의 대상과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절대적으로 영원히 자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땅의 가시적인 종교 체계가 결코 아니다. 기존의 조직체 교회들은 그 중에서도 일부분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유업을 소망하며 사는 일과 교회의 멤버가 되는 일을 서로 혼동해선 안 된다. 전자는 항상 후자를 포함할 수 있어도, 후자가 전자를 자동으로 수용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간혹 새 교인들 중에 저희 교회가 탈이 없고 치사한 꼴을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져 출석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은 많이 부족한 판단이자 큰 오산일 수 있다. 저희에게 비교적 문제점이 적을지는 몰라도 아예 없다고는 장담 못한다. 때대로 저를 필두로 교회가 비성경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불안전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모였기 때문에 탈이 없을 수 없다. 제발 그런 기대를 갖지 말기 바란다. 대신에 과연 얼마나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치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지 여부를 세밀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시몬보다 더 어리석은 현대 교인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예수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만약 세계 인구의 10% 만 기독교인이라 쳐도 모든 신자가 평생 두세 명만 전도해도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 세대 안에 주님이 다시 오실 수 있다. 전도 받은 자도 다시 전도할 것이므로 간단명료하게 그런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2천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신자들이 전도를 전혀 하지 않았거나, 전도하는 자가 참 신자가 아니라 잘못된 전도를 했다는 이유 밖에 없다. 한 마디로 기독교인은 많아도 참 신자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가지 못한다.
지금도 돈 봉투를 뿌려대며 싸우는 목사, 장로 들은 단언컨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로 참 기독교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 마귀에 붙잡힌 자녀 내지는,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예수님과 등을 지고 있는 상태다. 현대판 Simony를 예사로 시행하고 있으니 하나님에게서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다”는 선고를 받아야 한다. 그 악함을 회개하고 제거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게 Simony를 자행하는 자들은 사실은 전체 교인 중에 극소수다. 나머지 대다수 신자들은 대체 무엇을 하기에 땅 끝까지, 아니 소속된 사회나 공동체마저 복음화 시키는 일이 이렇게 더딘가? 사실은 모든 신자들 사이에 Simony가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돈으로 집사, 구역장, 성가대장 직분 등을 사려한 적이 전혀 없는데 무슨 말인가 싶은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너무나 자주 Simony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시몬이 범한 잘못의 내용이 무엇인가? 복음의 진리에는 건성으로만 동의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얻고자 했다. 그것도 밑천을 투자하여 몇 배로 남길 궁리를 했다. 바울로 인해 에베소가 복음화 되자 그곳의 마술사들이 자기들 비술을 적은 책을 전부 들고 나와 불에 태웠는데 그 값만 무려 은 오만이나 되었다.(행19:19) 책값만 그러하다면 마술을 시행해서 얻는 이익은 그 수백 수천 배다. 시몬이 돈을 들여서라도 성령의 권능을 얻을 만했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의 능력을 자기 계획과 욕심대로 조종하려 했다.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아 추종자들을 모으고 크게 이름을 높이고 치부하며 권세를 부리려 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계획과 소원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 얻으려는 동기에서 시도하는 모든 일들이 Simony다. 그것도 자기가 바친 만큼 몇 배로 돌려주실 것이라는 예상, 기대, 믿음의 바탕에서 말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진지하게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헌금을 바치며 심지어 전도 봉사해도 근본 신앙 사고가 그렇다면 Simony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 하나님께 잘 보여 보상받아야겠다는 사고는 필연적으로 진지하고도 경건한 열심과 정성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시몬은 우리에 비해 아주 순진한 셈이었다. 신앙수준이 아직은 눈으로 보고 들은 것으로만 판단했다. 성경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고 체계적인 신앙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던 때였다. 사도가 안수하니까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므로 단순히 사도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매개체 역할을 맡았다고 판단했고 자기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 그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촉구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24절)라고 자신의 문제마저 사도들더러 대신 기도해달라고 당부했다. 여전히 사도를 통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인은 마술 비법을 절대 알 수 없으며 특별히 뽑힌 제자에게만 은밀히 전수되는 것과 같으리라 착각한 것이다. 또 당시의 모든 우상 종교에선 사제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종교적 행위도 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비슷하리라 여긴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그런 중개자가 필요 없다. 제삼자의 개입이 전혀 없이 하나님과 신자 간에 일대일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교통이 이뤄진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이 내주하여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아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부터 성령이 간섭하시어 그분을 향해 완악했던 마음을 바꾸고 열어서 믿음 자체를 심어주신 것이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신자에게 이미 내주하는데 인간 중개자가 따로 필요할 리 만무하다. 또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의 종교적 체계나 조직과 사람들에 문제가 있어도 십자가 예수님의 진리와 영광은 불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는 시몬 때와는 다르다. 마술 같은 미신이나 주술이 거짓의 아비 사탄의 위계임을 잘 알고 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 누구나 성경을 소유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도 시몬과 하나 다를 바 없이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 하니 대체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시몬보다 더 어리석은 것인지, 더 영악한 것인지, 아예 사탄의 장단에 춤을 추는지, 아직도 그 수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중개인이 필요 없는 이유
시몬은 자기가 안수하여 능력이 나타나면 추종자들이 모일 것이며 자기의 조종여하에 따라 그들이 돈과 권세와 명예도 함께 바치리라 계산했다. 중세 가톨릭도 아닌 현대 개신교 교회들 안에서 성직매매가 성행하는 이유도 하나 다를 바 없다. 총회장, 노회장, 지방회회장, 장로, 안수집사, 같은 직분을 통해 돈, 권력, 아니면 최소한 명예는 응당 따를 것을 기대, 아니 계산한 것이다.
성경이 그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 마음이 부패한 정도를 넘어서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선언한다. 진리를 잃어버렸다면 아예 성령이 임재해 있지 않았거나, 잠시나마 사탄에 미혹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만약 그런 자가 거듭난 참 성도라면, 그런 일을 하는 중에 성령은 속에서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고 있고, 하나님은 사탄에 넘어간 것을 잠시 묵인하셔서 그를 연단시키는 중이다.
또 성경은 불신자가 교회 안에 섞여 있거나, 하나님이 참 신자를 연단시키는 중이거나 간에 Simony의 결과는 다툼이 일어난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돈, 권력, 명예만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구하려 하기에 하나님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사탄에게 미혹된 그 상태대로 두신다. 필연적으로 서로 간에 인간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많이 차지하려고 충돌이 일어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조차 다툼이 일어난다면 일단 그 분쟁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무조건 분쟁 자체를 멈추어야 한다. 모든 당사자가 교회 일을 자기 혹은 자기편의 현실적인 돈, 권력, 명예를 도모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는지 솔직하고도 철저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성직매매 같은 부정을 개혁하려 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바로 교회 안의 돈, 권력, 명예 다툼을 중지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부정부패의 죄악을 없애는 방안으로 단순히 제도적 개혁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평신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날 수 있음을 알게 해서 교회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도록 바꾸려 했다.
그때까지 가톨릭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권한을 중간에 가로채어서 독점했다. 자연히 돈, 권력, 명예가 교회에 집중되었고 또 교회는 부패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부패를 고친다고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을 신자들에게 돌려주어 그들로 직접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해야 했다. 당연히 가톨릭은 그동안 독점해 오던 종교적 권력체계가 붕괴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극렬히 반발했고, 반면에 기존의 독점적 종교체계에 저항하는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가 태동된 것이다.
다른 말로 개신교는 성직매매와는 절대로 담을 쌓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잘못을 고치려 생긴 교회가 똑 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 단순히 그런 부정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 돈, 권력, 명예를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신앙생활 전반에 교회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런 것을 알선해 주는 중간자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해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잠간 언급한 대로 너무나 간단하다. 이제는 성령님이 신자 모두에게 내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신자의 형편을 속속들이 아시기 때문이다.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아니하시고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고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 신자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입술의 말과 마음의 생각까지 모르는 바가 전혀 없다. 그 출입을 처음부터 영원까지 지켜보고 계신다.
신앙의 본질
따라서 신앙이란, 엄밀히 따져 말하자면, 신자가 하나님을 알아 나가는 작업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그렇다. 또 신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가야 한다. 잠언의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고, 또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하나님을 몰라서 망한다고 경고했다. 정말 그분을 평생토록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또 실제적인 인격적 대면과 그분의 인도하고 보살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알아 나가야 한다.
그분을 알아나가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싸움이자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분의 크고 풍성하심, 엄청나게 위대하신 능력,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사랑과 공의, 그분의 진리 됨과 아름다움과 선하심 등은 도무지 인간의 지혜로 온전히 알 수 없다. 그 규모마저 측량은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평생을 두고도 그분의 오묘한 섭리와 완벽하신 다스림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분을 알아나가는 싸움을 쉬지 않고 벌여야 한다. 그래서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인가? 도무지 우리 스스로는 그분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분 쪽에선 우리를 너무나 정확하게 우리보다 더 세밀하게 전부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횟수가 자꾸 늘어난다. 나아가 그분은 우리를 알고 계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도무지 그럴만한 형편과 자격과 공적이 우리에게 전혀 없는데도 그분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된다.
따라서 신앙이란 날이 갈수록 내가 그분을 아는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엄밀히 말해 본질적으로 그분을 알아가는 싸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우리가 그분을 아는 것에 비해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심이 엄청나게 많고 세밀하다는 것을 확인해 가는 작업이 신앙이 된다. 나아가 그분이 나를 보호 인도해서 이끌고 가려는 궁극적 목적지와 그곳에서 얻을 열매가 너무나 영광스럽다는 진리를 차츰 더 확실하고도 명료하게 깨닫게 되는 작업이다.
정말로 그분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지금 나를 채우고 계시며 또 유업으로 주시려고 너무나 풍성하게 예비해 놓았음을 확신하고 그분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다. 그분에 대한 갈망이 갈수록 커져가기에 현재의 나의 현실적 형편과 상황은 전혀 문제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분의 능력을 빌려 이 땅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를 쌓으려는 생각이 진짜로 추호도 없어지는 단계에 이르려는 싸움이 바로 신앙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이유를 시편 103편의 기자가 잘 설명하고 있다.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그래서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기 위해서였다.(10-12절)
한마디로 죄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그 죄과를 도무지 옮길 수 없었기에 그분이 대신 옮겨주셨다. 동은 서에서 먼 정도가 아니다. 동은 서를 절대로 만날 수 없다. 영원토록 완전 반대편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를 경외하는 자는 지옥의 진노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천국의 영생의 유업이 완전히 보장된 정반대의 자리로 이미 옮겨진 것이다. 이 두 자리는 절대 영원토록 공존은커녕 만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기에(15절),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어”(13절),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고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주케 하셨다.
신앙의 대상
이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응당 오직 하나님과,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의 독생자와, 그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하며 그 은혜 안에서 자라게 하는 성령님 삼위에게 국한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와 별도로 멀리 떨어져서 존재하는 국외자 내지 방관자가 아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다. 신자에게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는 법이 없다.
바꿔 말해 우리 신앙의 시작과 끝은 오직 주님이시다. 신앙을 심어 주시는 이도, 키워 주시는 이도, 완성시키는 이도 주님이시다. 당연히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인간 위주의 신앙이 되어선 당장에 변질하게 마련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인간의 욕구, 이익, 안전, 자존심, 정신적 평강, 사후보장, 만족, 행복을 위한 목적과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생긴 것이 절대 아니다.
나아가 어떠한 모습이나 형태라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신앙이 존재 유지 성숙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쉽게 말해 신앙이 가져다주는 반사 이익을 바라보면 이미 신앙이 아닌 것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유익한 사항을 목표로 하면 아무리 의롭고 선한 것이라 해도 이미 변질된 신앙이다. 그 가운데는 기도로 병을 낫게 하겠다든지, 인격적 성품을 말씀에 따라 의롭게 바꾸려 노력하겠다든지, 믿음으로 정서적 평강과 위로를 얻겠다든지 하는 것조차 신앙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신앙이란 도저히 도망가려야 도망갈 수 없는 주님의 너무나 크신 사랑과 권능을 직접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계시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데 반해, 아니 오히려 그분의 극렬한 저주를 받아 마땅함에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구원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그분을 앎으로써 그 앎에 가장 적합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분을 깊이 알아나감으로써 오히려 그분이 나를 더 잘 알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개자가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단순히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에게서 보상 받을 유익을 위해 동원되는 모든 것이 사실은 다 중간 매개체다. 시몬에게 사도들이 중개자였으며, 또 그 중개자와 자기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돈이라고 착각했다. 돈으로 성령의 권능을 사려했다. 마찬가지로 보상을 받으려 목적으로 신자가 바치는 헌금, 봉사, 기도, 예배, 성경공부, 심지어 믿음도 바로 시몬의 돈과 하나 다를 바 없이 더럽고 추한 제물이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지 않는 어떤 것도 절대 받지 않으신다.
대체 하나님의 독생자가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며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아 인을 쳐 주셨는데 더 이상 중개인이든 중간 매개물이든 무엇이 필요한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바쳐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아들과도 장사하는 장사꾼이지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지 않는가?
불이 나도 뛰어내리지 못하는 신자
그런데도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비유하자면 이렇다. 집에 불이 났는데 이층 난간에 매달린 아이와 같다. 밑에선 뛰어내리라고 아빠가 아무리 소리치는데도 그저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른다. 물론 연기가 번져 미처 아빠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소리만 들어도 아빠인 줄 빤히 알지 않는가? 그 아빠가 밑에 침대 매트를 깔아 놓았으니 무조건 뛰어 내리라고 해도 아빠나 매트가 안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곧 불에 타 무너질 난간만 하염없이 붙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아빠와도 도무지 비교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세밀하게 다 보고 계시다. 아니 현재의 상황과 여건으로 인도하신 이가 바로 그분이다. 또 비록 그분을 우리가 볼 수는 없어도 음성은 이미 들을 수 있다. 아니 이미 수도 없이 들어왔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 세상에 울려 퍼졌고 또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된 그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시쳇말로 바꾸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발 알아먹으라는 것이다. 내가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느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의 사랑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너희를 대신해 죽는 일 말고 더 이상 따로 해줄 일이라곤 아예 없지 않느냐? 단지 그 사랑을 받아 들여서 나에게 진정으로 겸비하게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앞의 비유에 대비하자면 하나님은 불이 난 이층 집 밑에 너무나 푹신한 매트를 온 사방에 널찍하게 깔아 놓았다. 그리고 긍휼에 가득 찬 눈길로 우리를 안타깝게 쳐다보고는 제발 빨리 떨어지라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든, 어떤 모습으로든, 심지어 머리가 먼저 떨어져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라도 뛰어 내리기만 하면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준비 해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 머릿속은 온갖 궁리로 복잡하다. 연기와 불길이 연신 치솟는데도 내 체중이 얼마며, 바람의 속도와 방향이 어떠하며, 이층 난간의 높이가 얼마인지 계산하기 바쁘다. 계산 결과는 도무지 살아날 것 같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계산도 할 줄 모르면서 떨어져 내릴 담력과 믿음이 없어서 불길과 연기가 잠잠해지기만 한 없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면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거인 같은 소방수를 보내서 자기를 업고 같이 뛰어내리게 해 줄 것이라고 착각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소방수 같은 재난전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이끌거나, 그분의 능력을 더 많이 우려낼 수 있는 중개인이나 매개물은 없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예수님이 당신의 몸을 바쳐 그 피로서 그 때까지 인간과 하나님을 가로 막고 있던 모든 휘장을 다 찢어서 없애 버렸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태에 있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겸손히 나가기만 하면 된다.
신자에겐 정말로 영화 인디아나 존스 3편의 마지막 장면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보물이 숨겨진 마지막 관문 앞에 다다른 주인공 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로 사이가 벌어진 캄캄한 허공만 가로막고 있었다. 건너갈 수 있는 다리나 붙잡을 줄이라고는 없었고 소리는 끝없는 반향으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되돌아가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말고는 길이 없었다. 존스는 믿음으로 정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새카만 허공에 한 발을 내딛었고 바로 그 순간 다리가 짠하고 나타났다.
아무리 먹장구름이 하늘을 막아도 태양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 그 위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단지 안 보인다 뿐이지 태양은 항시 그곳에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당신의 백성을 떠나는 적은 없다. 신자가 연기, 불길, 바람, 캄캄한 허공, 사방이 막힌 담 등으로 인해 단지 보지 못할 뿐이다.
어그스틴은 신앙을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우리 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다면 구태여 우리가 그분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무슨 중개인과 중개물이 필요한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과 권능에 힘입어 그분을 그냥 아빠라고 부르면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된다. 그분에게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전부를 완전히 비워 내어드리면 성령님이 인도해 주신다.
사마리아처럼 변한 교회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중개인이 필요 없다고 교회나 목사마저 무용하다는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가톨릭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을 중개해 주는 권세를 독점하려는 교회와 목사는 당연히 필요 없다. 또 그렇기에 올바른 목사와 교회는 오히려 더 필요하다. 교회 안에 누구라도 그런 중개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또 그렇게 믿고 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돈, 제물, 봉사, 전도 등의 열성과 정성이 아니라 오직 갈급하고 가난해진 심령만 있으면 된다고 가르치기 위해서 교회와 목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과 지금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성경대로 가르치고 실천에 옮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혹시라도 기복적 신앙관을 갖고 교회에 나온 자들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할 책임이 교회와 목사에게 있다는 뜻이다. 중세 가톨릭이 범한 비성경적 잘못들을 절대로 다시 따르지 않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교회와 목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이 세대 안에서 당신을 다시 볼 자가 있겠다고 했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다시 오시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나도 세계 복음화는 요원하다. 초대 교회 시절엔 염병처럼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던 복음의 불길이 아주 가느다란 성냥불처럼 작아졌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없다. 그 때는 사도들이 시몬처럼 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려던 사람을 그 자리에서 회개하라고 야단 친 것에 비해, 지금은 오히려 목사와 교회가 그런 일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아직도 알게 모르게 Simony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자신의 형편이 어떻게 되던, 심지어 하나님이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죽으려는 준비와 헌신이 된 채로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도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너무나 큰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서 그분의 사랑을 증거치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아무리 도망치고 거역하려 해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벗어날 수 없으며 성령께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완전히 주장하고 있었기에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요컨대 사도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예수님과 똑 같은 생각과 방식으로 따랐다. 반면에 우리는 그와 반대로 가거나, 가는 시늉만 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서있거나, 겉으로는 같은 길을 가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 빌립 집사와 사도들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라고 하신 주님의 명을 그대로 따랐다. 당연히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일어났고 그들이 가는 각 성마다 큰 기쁨이 있었다. 특별히 돈으로 즉, 인간적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려는 시몬을 물리치니까 사마리아에 복음이 더 확장되었다고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늘날에도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전도해야 할 교회와 신자들 중에 상당수가 오히려 사마리아처럼 혼합주의로 변질되었다. 아니 처음부터 사마리아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사마리아를 넘기는커녕 사마리아를 넘어설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각자의 신앙의 정확한 현주소가 어딘지 정말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당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와 진짜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또 그래서 하나님의 분깃을 받을 확신이 있는가?
7/7/2009
12/1/1996 유타대학촌교회 주일설교를 보완 정리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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