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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3: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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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계약의 갱신
요13:31-35
2009.3.15 주일 설교
뉴우톤의 만유이력의 법칙을 '인과율'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양자 물리학은 뉴우톤을 넘어서 있습니다. 하이젠베르그는 그 이론을 '상대성의 원리'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서로 상관하는데서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은 서로 관계되어 있다는 겁니다. 관계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 친구관계, 연인관계, 노사관계 등등 삶은 이렇게 '관계'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디 이 뿐이겠어요? 나라와 국민들 사이도,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관계되어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요즘 들어 '그린'이니 '에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또 어떻습니까? 이렇게 '관계'없이는 살 수 없는 게 사람이고 우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항상 이 관계 정신을 무시하거나 잊습니다. 힘이 생기면 관계를 잊고 부리려고 합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복종당하는 것을 즐기려고 합니다. 상대방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겁니다.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창고에 물건이 넘치면 나누려고 하지 않고 독점합니다. 자기 자신의 안일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도 독차지합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바벨탑의 오만입니다. 그리고 이 傲慢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은 결국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야훼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 가운데 등장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시내 산에까지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들 밑에서 짓밟혔던 사람들과 계약함으로써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 그들을 구출한 야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 어떤 우상도 섬기지 못한다.
* 하나님의 이름을 생명을 살리는 일 외에 오용하지 못한다.
* 일주일에 하루는 편히 쉬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줄 부모를 공경 해야 한다.
* 생명을 죽여서는 아니 된다.
* 도적질해서도 아니 된다.
* 간음해서도 아니 된다.
*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아니 된다.
* 탐심을 품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일종의 조건입니다. 이 계약 조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꽁꽁 묶으려고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또는 사람을 구속하던 그 '오만'한 자들의 악랄한 행태를 호통치고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애급의 통치자들의 통치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러기에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공동체는 "아멘"하고 하나님과 계약하고 관계를 재정립했습니다. 그리고 이 "못한다"라는 계약은 얼마동안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계속되고 인지가 밝아지면서 사람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이것을 회피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야훼의 이름을 부르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야훼의 뜻보다 자기 뜻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돌과 나무로 우상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권력, 명예, 재물 등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입으로는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악법을 만들어서 야훼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어처구니없이 강조함으로 오히려 이것을 지기 어려운 짐이 되게 했습니다. 칼을 들어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나 시기와 질투로 이웃을 들볶아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웃의 창고에서 물건을 훔치지는 않으나 그들의 노동을 착취함으로 새로운 형태의 절도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거짓 증거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강자들의 편리에 따라 언제나 창출이 되었습니다. 탐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게 어디 구약에 국한된 이야기일까요? 예수님 당시의 기득권자들은 더 말할 것 없고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너무나 자주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과의 계약을 무시하고 삽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새 계약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계약이 그것입니다. '사랑'이란 '관계'에 대한 실천입니다. 요한이 이해한 바로 그 [사랑]이 새로운 계약조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다음에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신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새 계약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라고 선언하셨지요. 이 계약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준 계약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옛 계약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 계약의 일 점 일획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못한다", "못한다"하는 옛 계약은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질책하는 능력은 가졌으나 사람들로 그것을 지키게 하는 힘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범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묘한 술수를 써서 이 계약을 어김으로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줄 것인가?" 하고 외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못한다" "못한다" 라고 하시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을 주셨습니다. 미숙해도 좋으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일시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좋으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서 사랑의 샘구멍이 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봄 동산의 새싹처럼 사랑의 생명력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본능 가운데 사랑하고 싶은 본능이 가장 기본적인 본능입니다. 모두 중심에서는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강아지들이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노는 것을 보세요. 어린이들이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노는 것을 보세요. 젊은이들이 사랑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보세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 오랫동안 시기와 질투의 차디찬 엄동설한에 시달려서 사랑의 샘구멍이 얼어붙어 버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장미꽃 가지에 솟아야 하는 새 싹이 솟아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런 우리더러 사랑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인가요? 폐병 3 기에 있는 사람을 치열한 경기장에 내 보내는 것과 같은가요? 너무나 오랫동안 짓밟히고 쪼들린 인간들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사랑하라는 말인가요.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 보라는 말인가요? 사실 많은 사람은 사랑이라는 말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현실을 너무나 잘 아신 예수님은 그러기에 그냥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계약이란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토대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사랑'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해 주심으로 우리 속에서도 사랑의 샘구멍이 터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대로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게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길 잃은 양과도 같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허물밖에 없는 우리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껴안아 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이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공동체를 이룩해 주셨습니다. 그는 인내력을 가지고 우리를 깨우치셔서 진리의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해치려는 무리들에게서 몸을 던져 도전하셨습니다. 그는 말로만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의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삶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도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개의치 않고 그들을 껴안아야 합니다.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헤아려 돕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내력을 가지고 서로 깨우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해치려는 악의 세력에 과감히 도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맺은 우리들의 새 계약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계약의 백성이 되어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아십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네 양을 치라!"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가 창립 된지 50년을 맞습니다. 우리의 지난 50년과 미래의 50년은 여전히 교회가 예수님과 맺은 이 계약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계약의 상호신뢰와 실행 가운데서만 그 계약은 유효하고 실효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의 계약을 갱신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살겠다는 계약 말입니다. 이 계약위에서만 성암 교회의 내일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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