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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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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예수가 온다, 왜?
눅3:4-6
2009.4.5
고대 이집트는 이미 주전 5천 년 전부터, 바벨론은 주전 3천 년 전부터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거대한 제국체제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강제노역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독자적으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건설한 나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없는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를 사사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명칭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왕' 대신 '사사'라는 계급이 통치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사'는 통치자거나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를 [평등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합니다.
사사는 세습되지 않고 특정 계급을 이루지도 않습니다. 그 사회의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문득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을 모두 해결한 후에는 곧 바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사사입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아버지의 공을 힘입어 자신이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문자적 의미는 '나의 아버지 왕'이란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으로 군림하려고 이 평등사회를 엎어버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아버지 기드온의 후광을 힘입어 자신의 왕국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조각에 맞아서 숨지게 됩니다. 그렇게 그 일은 끝납니다(사사기 9장).
그리고 그 일을 교훈 삼으려고 이야기를 꾸며 대대로 전승을 했습니다. 그게 사사기 9:8-15에 나오는 '왕을 비웃는 가시나무 설화'입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들 각자는 '기름을 내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일을 어찌 놔두고 다른 나무들 위에 날 뛰겠느냐'며 그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아무 쓸모없는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달라고 하니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으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론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하고 위협하며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같은 고대의 노래인데 여기서 왕은 아주 우스운 존재로 묘사되어 있죠? 이스라엘이 후에 왕정을 거치면서도 이런 노래들이 아직 살아있어 성서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이룩한 평등사회는 계급적 왕권사회로 부터의 강력한 부정이며 동시에 대안적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는 이런 평등시대(사사시대)에 대한 전통이 강력하게 살아있습니다.
후에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사무엘은 '왕을 세우면 너희의 아들, 딸들을 잡아가 군사와 궁녀로 만들며, 네 소득의 십일조를 거두어 가고, 결국 너 까지도 노예로 삼을 터인데 왜 왕을 요구하냐'며 반대합니다(삼상 8,10-18 ; 12,19). 이렇게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왕이 없는 사회는 인류가 아직 왕정을 경험하기 전에 부족시대로부터 왕정으로 넘어가는 자연스런 역사의 발전과정 중에 생기는 단순한 역사발전의 흐름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이집트라는 거대한 제국의 희생자였고 그 한 복판에서 살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국에 대한 반동으로 계급이 없고, 불평등이 없는 이상적 형태의 공동체 건설이 바로 [출애굽 공동체]였습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성서는 계속 반복적으로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노예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고 하며 출애굽 사건을 회상시킵니다. 열 가지 재앙, 바다를 가른 이야기,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메추라기의 기적들과 무용담들이 성서 전반에 걸쳐 원초적 해방의 경험으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불붙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를 부르시어 중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야훼]로 계시하시며 '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는 명령을 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노예들을 '내 백성'이라고 일컬으시며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내게 들렸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성서는 바로 이 야훼께서 자기백성이라고 동일시하신 노예들을 이끌어 가나안이란 땅을 주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워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고대 종교가 가지는 사회적 기능은 한 사회의 체제를 유지해 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었습니다. 왕을 정점으로 시작하여 귀족, 평민, 노예 등으로 이루어지는 계급적 피라미드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력과 군사적 강제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정신적 작용,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신의 아들로, 노예들은 신에게 저주받은 존재로 그들의 계급적 차별을 천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기능을 종교가 감당했던 것입니다.
또 한편 최고 정책결정자인 왕의 정책을 신의 뜻으로 받들어 지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가령 왕이 전쟁을 결정하고 선포하였으나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이때 왕의 결정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해서 모두가 따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종교가 감당하였습니다.
또한 종교적 헌물을 통하여 왕실의 재산을 확보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열(10)을 생산한다고 가정 하고요, 여기서 인간이 생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이 여섯이라고 하면, 나머지 넷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물질적 부분입니다. 바로 이것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인류역사의 계급적 갈등의 내용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왕이나 귀족들은 대개 1/10세를 받아갔는데 그것만으로는 확대되는 행정수요를 감당할 길이 없어 민중에게 과도한 짐을 부과하기 마련인데 이것이 지나치면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리 없이 거두어들이는 기가 막히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자발적인 헌납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헌납이라는 것은 지배권력이 선호하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백성을 가난한 상태로 묶어놓아 왕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 오게 합니다. 이런 것이 고대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사회에서 성전과 신전은 왕실의 재산을 관리 보전하는 일종의 금융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의 재산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의 기능은 인간의 행복, 평등, 인권에 역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맑스는 이러한 종교의 기능을 보고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노예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해방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의 출현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인류가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종교였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출3,18)"
모세가 파라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가요? 새 민족을 세우겠다고 했습니까? 독립을 달라고 했습니까? 새로운 땅을 차지하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감히 노예들이 어찌 그런 주장을 펴겠어요? 단지 자기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으니 사흘 말미를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은 주장 같습니다. 그런데도 파라오는 그것을 계속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놀라운 주장입니다. 그 당시 종교는 전부 체제유지의 기능, 지배자의 통치를 위해 복무하는 기능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이집트에서 궁전이나 피라밋과 같은 건축에 동원된 노예들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밋이 무엇인가요? 왕의 무덤입니다. 왕 하나의 영혼불멸을 위해 20만 명의 노예가 20년 동안 죽어라 일해야 세워질 수 있는 건축물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불멸을 위해 노예 20만 명이 희생당해야 하는 종교!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기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피라밋에서 걸어 나온 왕도 없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허구의 종교, 무덤의 종교로부터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노예는 너희들이 믿는 그런 신들을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따로 섬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선언입니다. 놀라운 역사의 변동입니다. 감히 노예들 주제에 자기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니요? 일찍이 노예들이 독자적으로 종교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요? 이것은 너희들 왕과 귀족들이 세워 논 거짓종교를 부인하고, 새로운 종교, 새로운 세계를 세우겠다는 참 하나님의 의지였고 실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모세를 통해 이뤄 내셨습니다. 스스로를 하층민, 노예의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신, 노예와 하층민이 섬기기 시작한 새로운 의미의 종교는 인류의 역사가 경험하지 못한 혁명적 종교였습니다. 인간의 불평등과 계급, 신분적 차별의 벽을 허물어 가는 새로운 평등 종교의 출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구약의 긴 설명을 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 선포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나 [예수]라고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세례요한의 선포처럼 예수님이 왕의 행차처럼 당당하고 위엄 있게 우리에게로 오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물론 주인공다운 등장이긴 합니다. 전능하신 절대자의 아들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런 예수님과 세상의 권력자와는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헤롯의 권세와 다를 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권력에 굶주린 정복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처럼 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위엄 있는 권력자의 모습을 한 예수로 답을 쓰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아버지의 이름'을 흠모하고 동경하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안정과 영원을 상징합니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가겠다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은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갖는 힘에 의존하겠다는 것이고, 그 힘을 증여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부권의 상징입니다. 사람을 지배하고 부리는 매력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 본문의 주인공을 [예수]로 쓴다는 것은 예수에게서 '아버지의 이름'또는 '부권'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힘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가 그런 존재로 이 세상에 오신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변화와 청산을 갈구하는'백성들의 바램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부리는 태산 같은 권력의 횡포 앞에 무력한 사람들을 향해 예언자가 선포하는 것입니다. "산이, 그 도도함이 눕혀질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앞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선언입니다. 예수를 말하고는 있지만, 참된 주인공은 바로 위아래가 없는 세상, 누가 누구를 부리고 부림을 당하는 삶이 아닌 변화의 평등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절에는 '예수가 다시 오셨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그 예수가 어떤 예수냐 하는 걸 미리 확인해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을 잘 지켰는지 뭐 그런 것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말입니다. 구약성서의 역사와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의 본문을 통해 볼 때 예수님은 세상의 힘에 의해 차별화되고 계급화된 것들을 파괴하며 모든 인간이 평등해지는 세상을 위해 오십니다. 함께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오시는 겁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이것을 기대하며, 변화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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