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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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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어떤 부활
막16:5-7
2009.4.12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절을 기점으로 합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유대교를 개혁하고 갱신한 게 아니라 '부활절'을 기점으로 독자적으로 성립된 종교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예수의 부활이 역사 속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교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일무이한 사건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소산이라고 믿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이 위대한 사건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절 신조는 기나긴 역사를 갖는 동안 그리스도교의 전통의 핵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컨대 교회의 신앙고백에 익숙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에서 말한 부활절 신학을 신앙의 본질로 인지하게 됩니다. 만약 자의적으로 그런 고백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교회안에서 그런 강요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활신앙의 무의식은 그리스도인에게 세계에 대한 '무관심, 무배려'의 태도를 낳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의 부활은 유일무이하니까, 역사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까, 부활이라는 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역사적인 문제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더욱 이 유일무이한 사건에 개입할 자격이 잇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신앙 안에서 역사의 현안을 담아내려는 일체의 인간적 의지를 말살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감독회장 문제로 불거진 감리교 사태가 이번 고난 주간에도 더욱 혼탁의 농도를 더하게 된 근저에는 바로 이런 '부활 이해'가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안을 담아내려는 의지가 결핍된 결과입니다. 물론 어느 곳에나 예외가 있듯이 이런 신조 속에서도 역사적 실천에 깊이 연루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해 온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통 그리스도교의 주류는 대체로 자기시대의 역사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난 신학적 . 신앙적 세계관을 형성해 왔습니다.
이게 여기서만 끝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세계에 대한 무배려나 부관심의 신앙적 태도는 자신의 삶에 '부활신앙'을 연결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때 거기서' 오직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삶 속에서는 '그때 거기'에서 같은 생생함으로 결코 재생될 수 없으니까 문제지요. 그것은 '지금 여기'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하소연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지 옛날 얘기만을 회고하는 것으로밖에는 대답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체현되는 그 부활이 아니라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어떤 부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의 부활은 예전 속에서 의례로만 남아 있는 오래된 유골이 되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30년 뒤에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늘 다시 살아납니다. 1997년 복제인간 이야기가 한창일 때 어느 기관이 조사를 했습니다. 복제가 가능해진다면 과연 누구를 복제하면 좋을까 하는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1위가 누군지 아시지요? 그렇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생가로 가서 죽은 그가 나눠주는 '생기'를 받아먹는다고도 합니다. 그는 '그때 그 사람'아니라 '지금 여기'살아나서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박근혜의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수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게 모두 그녀의 아버지가 딸에게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의 얼굴로 태어난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살아서 활동하고 있잖아요? 그는 죽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편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사건은 지금도 사람들의 삶과 가슴에 부활하여 강력한 생명력을 역사 속에 또는 추종자들의 삶속에 펼치고 있습니다. 미국은 링컨이거나 케네디 같은 이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가수나 배우 또는 운동선수를 통해 이런 경험들을 넓혀갑니다.
엊그제 임마누엘 교회에 모여 억지로 총회라는 걸 열면서 소란을 떤 일단의 감리교 목사들과 장로들이 과연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지금 여기'에 다시 재현되는 사건으로 받아 들였다면 그럴 수 있겠어요? 교회가 개인으로나 공동체로서 행하는 온갖 악한 일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그때 그 사건'으로 끝내놓고 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정말 여기서 지금도 부활의 사건이 발생한다고 믿는다면, 그런 부활 신앙을 갖고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오직 예전을 행할 때만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절이나 되어야지 아버지 생일 차리듯 '부활'을 기념합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의 역사 속에선 개인에게나 공동체에 아무런 영향력도 파급력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으로만 "싸움은 모두 끝나고 생명의 승리 얻었네. 개선가 높이 부르세 할렐루야!"(찬송가 156장)라고 소리 높여 찬송하는 주인공 예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예전과 찬송은 그리 확고하지 못하고 드높지 못하지만 계속해서 역사와 사람 속에서 후속 사건들을 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그 사건을 예수의 부활 사건과 비교하려는 자체가 모순이 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전 대통령 박정희 부활신화는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닙니다. 한 번 일어나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개입해 들어가고, 끊임없이 그 상황의 계기를 이루는 역사의 구체적인 인물 속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설사 부활할 만한 상황이 없어도 그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잠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3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태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만남은 그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개입해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죠. 사람들을 거룩한 성소로 불러내는 종교와는 달리, 역사를 외면하고 따로 골방으로 불러내는 게 아니라 사람들 자신이 살고 있는, 그들의 현장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사람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십자가의 부활'을 믿는 우리네 부활과, 시속의 현장에서 거듭거듭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저들 속에서 일어나는 부활과 다른 점입니다. 지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로 걸어 들어가 만남으로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장속으로, 사람들의 모든 사건 속에서 그는 부활신화의 주인공으로 그 사건들과 결합함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합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희망을 불어 넣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우석 박사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가 아무리 나쁜 사라이라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가 죽어도 그에게 희망을 걸고 살 겁니다.
유일무이한 사건, 오직 예수만이 가능한 사건, 그것이 부활사건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단 백만분의 일초만 살았다가 죽은 인간이 있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형질상으로는 유일무이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존재가 '유일무이하다' 또는 '그의 죽음과 부활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할 때,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로 30여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으로는 결코 사람들에게 기억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이미지는 백만분의 일초를 살다가 죽은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30여년의 시간의 길이가 2천년이나 지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유일무이사건'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 역사적인 사건들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들의 삶에 재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이 전하는 올바른 부활의 논리이며 이해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처형을 당했지만, 그 때 그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야기가 '지금 여기'서 사람들에게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지만, 예수님의 생명력은 제2, 제3의 예수를 통해 계속 역사의 무대 위에 살아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물학적으로 단지 한 사람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의 생명력은 역사 속에 살면서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희망의 원리로 기억하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부활하여 역사를 창조하는 새 힘, 새 근거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래서 우리들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지금'도 '내일'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전이나 기념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너희들은 해골을 숭배하는 예전주의적 종교"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동안 '예수님의 부활'이 교회 안에서, 예배형식을 통해서만, 성직자의 예전을 통해서만 전통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더 이상 교회는 부활사건을 이어가지 못하는 게 사실 아닙니까?
막16:5-7
이 구절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승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부활의 목격자들은 '여인들'로 나옵니다. 성서시대의 여자들이 어떤 격을 갖고 살았는지 아시지요? 사람축에 들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여인들은 그래서 법정의 증인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의 살에서도 증인이 될 수 없었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인하는 유일한 목격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마치 누가복음이 예수님 탄생의 목격자를 가장 천대받던, 그래서 증인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목동'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녀들의 부활 목격담이라고 하는 것도 고작 '빈 무덤'을 보았다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뭐 6하 원칙 이란 것도, 그것을 증빙 할 만한 자도 없습니다. 그녀들의 목격을 목격한 증언자도 없습니다. 의학적인 설명은 더더욱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그런 의심 가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읽은 가장 오래된 성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본문이 담고 있는 것은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여인들에게 이렇게 얘기 했다는 것뿐이죠. " 그 분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다." 이 '갈릴리'는 세례요한이 체포되었을 때도 예수님이 거론 하신 장소입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갈릴릴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나라 사건을, 고향에서 실종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사건을 계속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예수를 보고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서 '요한의 부활'을 생각 했다는 것입니다(막6:1-).
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한 예수님, 그러나 이제 그분의 사건은 그때처럼 다시 갈릴리에서 불붙게 될 겁니다. 예수님의 고향이 있고, 가족이 있고, 청중이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 있는 곳, 그곳에서 예수님의 사건이 계속될 거라는 주장인 겁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부활]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아직 기독교가 예전이 되어서 교회 안에 갇혀 버리기 이전에, 초기 기독교 전승자들,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전도자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다시 세상에 보여주며 살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을 보는 것은 곧 예수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전도 전통도 없었지만 부활하신 예수와 같은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처럼 세상을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삶과 역사의 현장에서 체현되는 '예수의 부활'이었다는 말입니다. 마가는 이걸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예수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고 기리는 예수의 부활은 이 땅위에서, 예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가슴과 삶 속에서 '그때 그 사건'을 '지금 여기'서도 계속 이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부활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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