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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복음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945 추천 수 0 2012.02.03 23: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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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예수 복음  
막1:1-8

2009.4.26

*오늘날 종교가 개인주의화 되면서부터 온갖 용어들이 개인의 취향과 이성적인 지식의 한계안에서 설명되고 이해 되어가고 있다. 한 마디로 제 멋대로다. 그러나 우리가 '한 하나님'안에 있으려면 그것을 지탱하는 공통의 이해와 지식은 버리지 말아야 될 게 아닌가? 어쩌면 오늘 날은 '예수의 삶'을 살기보다는 그걸 바로 세워 지켜가는 일조차 버거운 상태인지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행여나 나는 [예수의 복음]을 바로 이해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한 주간이었다. '초기 기독교 사회사'라는 책이 유용하게 작용하였다. 헛된 자기 지식을 [예수의 복음]에 끼워 놓고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하리라. 
    
복음서 중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에 대한 그의 증언 첫 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곧 ‘예수님이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쁜 소식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기쁜 소식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시간에 제한되지 않고, 갈릴리 또는 갈릴리 사람이라는 공간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인 예수의 복음은, 역사 속에서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2000년 전의 예수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거듭 재생되는 예수사건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더러 그런 기쁜 소식을 부활하신 예수와 더불어 재창출하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쁜 소식이란 무엇인가요? 보통 우리가 ‘기쁜 소식이다’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처한 형편과 요구에 따라 달라집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이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은 획기적인 치료약이 개발되거나, 그와 같은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식이겠죠. 직장을 구하지 못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 ‘기쁜 소식’은 뭐 별거겠어요? 예를 든다면 앞의 예가 거기에 든다는 말인데요, 이런 예는 여러분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지금 성서가 말하는 ‘기쁜 소식’은 그렇게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희망에 대한 응답 같은 게 아니겠죠. 그렇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쁜 소식’은 바로 [예수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뭐냐? 고전 15:1-4은 ‘내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즉 ‘복음’인데 그러므로 그냥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지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에 대한 소식’ 이것 자체가 이미 기쁨이죠?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기다렸습니까? 내용이 뭐냐는 거죠. 그것은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 준 거죠.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오신다는 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여인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기뻐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도 기쁠 게 없지만,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편다수의 역사적인 희망이었기 때문에, 그만 개인이 겪거나 치러야 할 아픔이나 수치를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대신 환영의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녀의 노래를 통해서 우리는 그녀와 더불어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린 것이 무엇인지, 예수가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실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를 기다렸다는 말은, 예수가 하실 일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란 ‘예수를 통해 일어 날 일’ 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대행자로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이 기대하는 일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예수 복음’입니다.

여하간, 마리아가 개인적인 아픔을 넘어서면서까지 불렀다는 기쁨에 찬 환영의 노래가 어떤 것인지 봅시다.

주님은 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자를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이 없는 이를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소민족으로 많은 세월 동안 열강 사이에서 고생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도 저들은 로마제국의 억압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외식에 찬 유대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율법조목들을 수 없이 만들어서 백성들로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룩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기에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죄인이라고 천대받는 자들을 높이셔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아 기쁨에 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룩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가면을 벗기어 그들의 흉악함을 만 천하에 폭로하셨고, 하나님의 성전을 발판으로 횡포를 하는 대사제들을 강도의 무리들이라고 질책하시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채찍을 들어 숙청하셨습니다. 그리면서 그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그들이 천대하는 세리와 창녀 같은 무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천대받던 갈릴리 사람들이 어찌 신나지 않았겠어요. 예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저들이 호산나를 높이 부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저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각성한 민중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당황한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규정해서 십자가에 달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안심을 했습니다. 두목을 죽였으니 따르던 무리들도 다 흩어지고 말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저들이 예상했던 대로 따르던 무리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 운동이 박살이 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저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용감하게 거리에 나타나서 부활하신 예수야말로 메시아라고 증언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예수가 곧 다시 오셔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증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아무도 그 기세를 꺾을 수 없을 것처럼 부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있던 백성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주후 66년부터 시작이 되었던 유다 독립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동원이 된 로마 군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은 점령이 되고, 성전을 완전히 초토화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독립군들도 전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애국적인 유대인은 물론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 역시 철퇴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 역시 메시아왕국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룩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를 중심으로 가졌던 저들의 기대가 다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기쁜 소식’은 신기루와도 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믿음과 심정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서 자란, 그리고 그의 선교의 중심지였던 갈릴리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다윗 왕국을 이룩하려고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저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슨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는 언제나 고난 받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계신다고 저들은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생각지 않고, 되레 고난 받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하나님나라의 기적을 맛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얼마 동안 그들 사이에 사시면서 새로운 삶을 창출하신 것은 기쁜 소식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저들은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서 기자는 그의 기록의 제호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에 있는 부활기사에 보면 천사는 빈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모두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라고 지시하십니다. 거기에 가서 눌린 자와 같이 계시는 예수를 만나면 다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운동이 피어오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자들의 믿음과, 갈릴리 사람들처럼 어려운 이들이 믿는 믿음이 다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계승하고 있는 부활의 믿음은 바로 저들, 갈릴리에서 부활하시고 활동하시면서 세상 어느 곳에서나, 어떤 사람에게서나 ‘하나님 나라의 부활’을 재생산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대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재연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지중해 연변에 있는 민중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쁜 소식이 요원의 불처럼 확산 된 것을 보아서 압니다. 지중해 연변에는 로마제국에 억눌려 신음하는 무리들로 깔려 있었습니다. 저들이 간절히 바란 것 역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예수를 통해서 발견하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간 곳마다 다시 하늘나라의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운 삶의 길”이라고 불린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종족과 종족 사이의 담도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바울을 이방을 위한 선교사로 생각하지만 바울이 가기 전에 벌서 예수의 도가 그들 사이에 확산이 돼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어서 흑인들이란 오래 동안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20세기 전반에 있어서도 흑인들의 인권이란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60년대에 이르러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마음을 가진 무리들이 생명을 걸고 미국의 갈릴리로 가서 자신들을 던졌더니 예수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 미국에서도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또 그렇지 않습니까? 양반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고, 상놈을 면할 수 없었던 시대에, 부녀자는 사람도 아닌 것으로 여기던 시대가 아닙니까? 그런 세상에 인간 평등의 역사를 이뤄가기 시작한 게 예수의 복음이 아닙니까? 이게 모두 전 세계와 전 역사에 고루 등장하는 ‘예수 복음’의 사건 즉 예수 부활의 증거들 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시작이 된 복음을 재연시키려면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사람들 속으로, 고난 받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 주변에 있는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고독하고 외로운 갈릴리의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날로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가는 오늘날, 치열한 경쟁에 밀려나서 의지할 바를 모르는 무리들이 방황하고 있는 지금,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갈릴리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와 같은 [예수 복음]이 교리화 되고 전통에 탐착하여 안일을 구하게 되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어떤 ‘지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갈릴리의 삶’을 ‘예수의 복음’으로 보지 않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서 얻은 어떤 지식을 ‘예수의 복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예수의 복음]은 종교행위의 숙달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별하고 독특한 개인적인 체험이 [예수의 복음]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의 복음]은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 낮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役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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