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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238 추천 수 0 2012.02.03 23: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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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7:24-3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가족의 재구성 [2]
-자녀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막 7:24-30

성서는 아이들이 귀신들에 사로잡힌 것으로 묘사하는 곳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도 악한 영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도 간질병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아이가 나오는데 역시 악한 영에게 잡혔다고 합니다. 그 귀신은“벙어리, 귀머거리 귀신”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막 9:25). 요즘으로 말하면 병을 앓고 있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가 되겠죠.

집에 이런 아이가 있으면 온 가족이 고통을 받습니다. 제 밑에 여동생도 지체장애를 가진 딸이 있는데 모든 식구들이 거기 매달려 삽니다.

요즘은 ‘옛날 귀신’에 들린 사람은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맞는 귀신에 들린 자녀들은 너무 많습니다. 대학입시가 끝나면 성적을 비관해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시험 발표를 보고 집단으로 죽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요즘 통계를 보면 40대 이상은 제1사망 원인은 질병입니다. 30대는 교통사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20대는 놀랍게도 제1사망 원인이 자살이 아닙니까? 원인이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크게 보면 가정불화, 빈부격차로 인한 절망감, 따돌림 등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일 것입니다.

60년대는 가난을 이기기 위해 몸부림해 왔습니다. 지금 어느 정도 잘 살게 되니까 이제는 빈부격차가 문제입니다. 자녀들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가끔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듣습니다.  들을 때마다 놀랍니다. 예전 내 경험으로는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겠거니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도 있고, 고등학생이 음악시험을 애국가 가사 적는 것으로 대신 하기도 한답니다. 절반 이상이 공부를 포기한 상태고 선생님이 뭘 가르치든 관심 없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대개 빈부격차에서 오는 것이 많습니다. 가난한 집 출신들은 자신들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찍 자포자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오늘날의 의미에서 우리 자녀들을 사로잡는 악한 영이 아니겠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리고, 자기 딸을 구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뜻밖에도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고 하십니다. 그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8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1) 예수님이 완전히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먼저”라고 하신 데서 희망을 걸고, “먼저”가 아니어도 좋으니 “나중”이라도, 상아래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2) 겉으로는 예수님이 저렇게 말씀하셔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문제는 예수님의 태도가 아니라, 자기 딸을 살려야 하니까,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고 적극적으로 매달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후자가 현실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예, 저는 강아지처럼 하잘 것 없는 여인입니다. 저는 개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것으로 내 아이가 낫는다면! 말입니다’라는 말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자기 자식을 고칠 수 있다면, 설사 자기가 개가 되는 수모를 당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어머니의 심정이 모든 걸 해결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귀신이 나간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 어머니의 행동을 놓치는 수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고 하셨습니다. 이 어머니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칭찬하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기적에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의 과부에게서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그 과부는 자기의 마지막 양식을 가져와서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어린아이가 가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어리가 재료가 되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그러한 마음이 기적의 재료가 되고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란 뭘까요? 포기하지 않는 질긴 마음일까요? 오늘날도 어머니들이 그런 질긴 마음을 붙들고 있으면 죽어나자빠지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에서는 이런 격려의 말씀이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마 15:28) 우리는 생각하기를, ‘여인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믿음”이라고 칭찬하신 것이라고 여깁니다. 개가 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딸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을 높이 삽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어머니들이 이처럼 하기만 하면 된단 말인 가요?

요즘 우리나라도 청년 실업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빈곤층이 천 만이 된다고 합니다. 시골에는 노인들만 사는 가정이 많은데 대개 손자들을 키웁니다. 젊은 부모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녀들을 노부모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나 집집마다 대개 한 사람 이상 실업자가 있습니다. 온갖 중독에 빠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과거에는 그저 술 담배, 투전 이런 것들이 중독의 재료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전혀 다른 중독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와 자녀들은 이런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가 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기만 하면, 그런 자세로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해결이 될까요?

아무리 믿음 좋고 포기할 줄 모르는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오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는 달리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그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지 병 잘 고치는 능력 있는 사람이 그녀 앞으로 왔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녀로 하여금 세상과는 다른 희망, 다른 관점, 다른 방식, 다른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까? 여인에게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의 본질입니다. 그저 예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온갖 수치를 무릎쓰고 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예수를 통해 다른 길을 보게 될 때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인 것인지 그의 절절한 어머니로서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개 어쩌고 ...]하는]문장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분입니다. 절망하고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말을 거십니다. 수가성 우물가 여인에게“물 좀 달라”고 말을 거셔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새 길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그녀의 기쁨이었고 그 샘은 마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는 곳마다 그들이 문제를 갖고 나오게 만들고, 예수를 만난 다음에는 그 문제를 과거와 달리 보고 해석하는 눈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앞에만 오면 주눅 들었던 사람들도 똑똑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자들의 기를 살리고, 일자무식에다가 구걸하던 눈먼 사람이 유창하게 된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자녀들을 위한 이런 저런 해결책들을 내놓습니다. 이제 와서 삼강오륜 가르치고 갓 쓰고 서당 체험을 하는 데도 있지요.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수명을 다한 낡은 가치가 잠시 옛 것의 흉내를 낸다고 회복이 되겠으며,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낡은 가치나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가치와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시대와는 다른 삶의 방식과 길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이 시대에 조롱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에게 달리 사는 법을 가르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개처럼 여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사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대개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가정도 그 틀 안에서 변화하면서 새 길을 모색하게 될 것입니다. 그 틀은 우리가 익숙한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하고 돈을 벌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여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을 누리면서 부모에게 (물질적으로) 효도하고 형제자매에게 우애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런 도식을 선전하기는 하지만,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이나 악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TV를 켜면 그렇게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성공적인 가정이 늘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물질이 충족이 되지 않으니까 자꾸 자녀들이 좌절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가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가치는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꿈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좌절감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대학교 가면 사회과학을 배우면서 배신감을 느끼고 또는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요즘은 논술이 발달되어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플라톤을 읽고 박노자를 읽으면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도 비판하고 국수주의도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랍고 기특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대학에 가서 배웠고 그것도 정규 수업이 아니라 이른바 스터디로 배웠습니다. 그것은 비판적 사고를 키워주었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내 속에서는 돈을 벌고 싶고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고상한 가치를 주장하고 숭고한 학문의 경지를 말하는 학자, 성직자들도 결국은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몰면서 사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면서, 그 고상한 가치라는 것이 자본주의적 가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전통적 유교 가정이 깨어진 다음에 그것을 대신한 것은 성공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적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늘 부작용이 많아서 늘 자녀들과 배우자들을 악한 영에게 내어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모두를 물질의 풍요 속에 안주하도록 유혹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이룩한다고 하는 이른바 자녀교육은  마치 높은 두 빌딩 사이를 가로지른 쇠 파이프에 그네를 매단 것과도 같습니다. 언제라도 물질적 풍족이 깨지면 좌절하고 무너지게 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이미 물질의 풍족과 개인의 자유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맛본 사람들에게, 이제 너는 자식이니까 순종해라, 며느리니까 시부모 말씀을 들어라, 동생이니까 형님 말 들어라, 이런 전통, 유교 가치가 통할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돈을 주지 않으면 자식이 불순종하고,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돈이 없으면 불화하게 됩니다. 가정을 유지시키는 것이 돈의 힘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껏 이 사회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효 교육이니 서당체험이니, 군대 보내야 사람 된다느니, 교회에 열심히 나오라니 하는 것들이니 시대착오적이 아닙니까?  

물질주의적 가치관과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적인 것들의 공격으로부터 자녀와 우리 자신을 지키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께로 나아가 새로운 방향성을 획득하듯이, 오늘도 이 시대를 거스르는 길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바로 그 [길], 세상의 귀신에 끌려 살지 않고 똑바로 사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산업화되면서 전통적인 가정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전의 대가족제도나 씨족사회가 갖고 있던 공동체 정신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우리는 이미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핵가족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또는 교회가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 형제자매들이 우리의 전통 공동체를 회복할 뿐 아니라 갈릴리의 밥상공동체를 회복해야 합니다. 개개인의 가정에서는 가질 수 없는 비전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 가질 수 있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 위해 기도하고 일으켜주고 안아주고 사랑하는 가운데, 이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을 여기에서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본주의 물질주의의 악령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참된 인생의 길]에 있음을 믿고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는 없는 존재’처럼 취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길인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오늘날 중고등학생들이 너무나 바쁘니까 믿는 부모들까지도 잠시 교회는 쉬고 일단 대학부터 가라고 조언합니다. 좋은 대학만 가면 배우자가 줄을 서지만, 교회 열심히 나가다가 대학 떨어지면 아무도 안 돌아본다는, 아주 현실적인 코멘트까지 덧붙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모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이들입니다. 그렇게 자식을 기르면 지식과 재산은 있어도 영감과 비전은 없는 조무래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학원에서 자란 사람과 공동체 속에서 자란 인물이 같을 수 없습니다. 자식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면 그것이 그를 무능하게 할 수도 있고, 재산 때문에 부모를 원망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신앙을 물려주면 자식들은 위대하게 되고 부모께도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돈을 물려줄 수도 있고, 집을 물려줄 수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 즉 인생의 길이 예수에게 있음을 똑바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천금 같은 것입니다.

다른 길을 보여 줘야 합니다.
달리 사는 법을 알려 줘야 합니다.
세상이 개처럼 여긴다고 해도 예수님의 그 길,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삶의 길을 가게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귀신들린 세상에서 자녀들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그게 수로보니게 여인의 처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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