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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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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그대 삶의 경계너머
막1:43-45
2009.6.14
엊그제 우리교회 목사님 중에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모른 척 하고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는데도 여전히 수군수군 무슨 이야긴가를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교회의 구성원이니 의당 알아도 되겠다 싶어서 가까이 가면서 내가 말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야?" 그랬더니 아주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실 필요 없어요. 빠져 주세요." 그러면서 나를 향해 손을 휘적 내어 젓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대화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대화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을 그으면서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금안에 들어와 있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어 쫓는 것이었습니다.
자,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갈릴리의 어느 지역에서 '나병환자'를 고쳐주면서 생긴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졌음을 증명받으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널리 알려지고, 이로 인해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심각한 질병을 고쳐주고 이제는 자기 스스로 살 수 있게 해 주었는데 되레 사람들은 그 사건과 사건의 주인공인 환자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끼지 말고 나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당시대의 모습이 수수께끼의 본질입니다.
우선 '나병'이 뭡니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학적인 이름의 '나병 또는 한센 병'이 아닙니다. 추정컨대 신체에 혐오스럽게 돋거나 혹은 전염성이 강한 피부질환과 관련된 신체적인 증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도 너무 현대 의학적인 표현일지 모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나병]은 현대의학과 같은 지식으로 판명된 명백한 질명이라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의 경험에서 검진되고 종교적인 원인으로 해석되는 것이었습니다. 병리적인 원인에 의한 판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나 자기 경험이나 지식으로 지껄이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는 그런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아무튼 고대 이스라엘의 나병은 최악의 질병으로 여겨졌던 게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 병은 죽음에 비견되는 저주의 징표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공동체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과 마주쳐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그 천형을 오염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커녕 인적이 많은 도로 근방을 얼씬거려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멀리 인기척이 들리면 나병환자는 자신이 부정 탄 사람인 것을 소리쳐 알려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람들의 생활공간의 외부로 쫓겨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삶의 공간인 세상에서 격리된, '살았으나 이미 와버린 죽음을 안고 사는'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자신을 고쳐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예수님이셨으니까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경을 쳐도 단단히 칠 일이었습니다. 과연 메시야를 자처할 만한 대단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벌한 사람-천형을 받은-을 거리낌 없이 마주할 수 있는 그 분, 그 사회의 건강 관리체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분, 그분은 도리어 그이를 측은히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경계하고 쫓아내기는커녕 측은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나병을 고침 받은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요즘 유행이라는 신종인플레인자에 걸렸다면 여러분은 나를 어떻게 대하실까요? 그리고 보건당국에 의해 보균상황이 끝났다는 통보를 받았다면 그 다음에는 거리낌 없이 평소처럼 나를 대할까요? 추정컨대, 그 나병환자는 분명히 사람들에게서 추방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나병환자들 사이에도 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만난 일로 인해, 병을 고친 이유 때문에 이쪽에도 낄 수 없고 저쪽에도 들 수 없는 중간지대의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성서는 나병이 걸리면 그를 격리시키고, 그가 나으면 사제의 검진을 받은 후 다시 사회에 복귀 하라(레14:2-32)로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렇게 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배제, 금 밖으로 내 쫓으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관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이 있고, 사람들이 이 장치의 판정과 습관적으로 동일한 가치판단을 갖게 되는 것을 '제도화'라고 합니다. 인간 개인도 이런 습성이 제도화 되면 항상 그 사람은 금 긋는 일을 합니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이 사람은 되고 저 사람은 안 되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돕는 자리에 세우면 안 됩니다.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이기 때문에 그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사회정치적인 형벌이 내려졌고, 사람들도 그런 사람을 불결의 상징으로 여겨 피하는 것, 심지어 질병에 걸린 그 자신조차도 이런 사고에 종속되어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제도화된 나병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병이 나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사제가 그를 정결하다고 검증했다고 합시다. 이것은 형벌의 해제를 의미하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습성은 그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들의 관성이 그를 쉽게 해제할 수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제도는 있으나 마나 한 게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따르면서 이런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믿으나 마나 아닙니까? 법이 있으나 마나 한 것이나, 믿음이 있으나 마나 한 것이나 같지요. 그것은 어떻든 위반인 것입니다. 차라리 나병에 걸린 것이 더 낫습니다. 이것은 나병이라는 육체적인 질병보다 더 나쁜 병입니다.
만약 치유 받은 나병 환자의 운명이, 삶이 나병에서 신음하던 그때와 다르지 않다면 그를 측은하게 여기던 예수님이 분명히 실수를 한 것입니다. 차라리 그대로 두었으면 나병환자들 속에는 끼어서 살 게 아닙니까? 어쩌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의로움을 너무 앞세워서 한 개인이 당할 더 참혹한 정황들을 무시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런 행위의 결과는 예수님 자신에게도 난처한 상황을 가져다주고 말았습니다. '보아서는 안 되는 불경한 이를 만나 치료까지 해 주었으니, 그 작자야 말로 악령의 힘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자일거야',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배제당한 사람을 복권시키는 일, 받아들이는 일, 격리의 해제를 선포 하는 일, 그것은 정말로 근본적인 자기 회개와 변혁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패기어린 치료행위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제주의적인 관성에 도전함으로, 예수의 문제 제기로 인해서 배제된 이들의 자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체제의 가학성, 인간 개인의 독한 성질이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해진 것은 나병 환자가 진짜 나았는지 어쨌는지가 아닙니다. 그를 대하는 나, 당신이 유죄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그렇게 독한 인간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독한 사회적인 관성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병보다는 그 병,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적극적으로 내 생각이나 삶이나 대화의 밖으로 밀어내려는 그게 더 나쁜 병이라는 것입니다. 나병보다 더 나쁜 병, 그걸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교회의 어떤 두 목사님이 대화중에 나를 밀어낸, 그와 같은 배제주의적인 관성에 도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걸 뿌리 뽑으려고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 관성을 위반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덮어두고 헤헤대고 살랑댄다면 그것은 점점 더 어두운 골목으로 자신의 영혼을 몰아넣는 것이 됩니다. 그는 결국 그렇게 '잘 믿어서 망하게'됩니다. 이걸 알라는 것입니다.
아, 나를 대화 밖으로 밀어낸 두 분 목사님이 누구냐고요?
진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설교를 열기 위해 만들어 낸 설정입니다.
만약 그런 목사가 있다면 그는 못된 관성에 항거하지 않는 무능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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