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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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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거짓된 일상의 전복
마8:2-4
2009.6.28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실천과 가르침을 성경 말씀 속에서 한 구절을 찾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양하겠죠? 그러나 비교적 객관적인 성경 구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일 것입니다. 여기서 "가까웠다"라는 때에 관한 지시어가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천과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그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 임박성 때문에 예수님의 선포는 메시아처럼 사람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날, 그 때의 의미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세상이 빨리 끝나기를 갈망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팽개치고 그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미'도래했다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아직'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와야 한다는 것은 동의 하지만 예수님의 그와 같은 선포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예수님을 미혹하는 사람처럼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때를 자기 자신에게 받아들임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아주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마지막 때를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로 쟁취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군대를 쫓아내고 다윗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능동적인 사람들이었죠. 그러나 수동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저 가만히 하나님이 그 때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직면한 역사적인 현실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데 있어서 비슷한 듯하면서도 각기 다릅니다. 성서 속에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갈등 주제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는 시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보리슬라프 페키치 의 [기적의 시간]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성서 원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마8:2-4의 '나병환자'이야기입니다. 성서 본문에도 등장하지만 소설에도 일반 사람들이 거주하는 동네와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구별되어서 나옵니다. 이것은 불결과 정결의 대비된 상황연출이죠. 예수님은 환자들만 가득한 부정한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한 문둥병환자를 만납니다. 시신을 씻는 일을 하는 여자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인은 오늘 우리가 아는 대로 깨끗해집니다. 정결한 동네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성서를 읽는 우리의 눈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페키지라는 소설가의 눈은 여기서부터 우리와 다릅니다. 에글라 라고 하는 여인은 자신의 문둥병이 '다 나았다'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결한 동네의 사람들은 '아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곧 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때를 '끝없이 지연'시키는 생각이죠. 에글라는 다시 쫓겨납니다. 여전히 그녀는 부정한 여자였습니다. 한 번 부정한 것은 영원한 부정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부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마을에 당도하자 이번에는 부정한 동네의 사람들이 그녀를 배척합니다. 부정한 자신들이 이미 정결해진 그녀를 맞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입니다.
페키지는 여기서 '기적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을 대립시킵니다. 일상의 시간이란, 우리 속에 관성처럼 존재하는 축복과 저주라는 인식론의 두 마을입니다. 그러나 페키지는 진정한 기적이란, 바로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시간 대립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른바 페키지는 '기적의 시간'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경험하고 절대화하는 일상의 시간, 누구나가 시간시간 하는 이 시간은 인간 개개인의 경험과 의식과 인식을 절대화하고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의 시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고집불통 또는 완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벽을 문이라고 우긴다'고 할 때 그는 이런 일상의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속의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변화하는데, 그것들 중 어느 것은 절대 변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편견들이 지배하는 사람, 또는 그런 시간을 사는 사람이 바로 패키지가 말하는 '일상의 시간'인 것이고,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런 시간, 개나 돼지나, 자연이나 우주만물이 맞닥뜨리는 그런 시간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들은, 제대로 깬 사람은 그 '일상의 시간'을 넘어서서 '기적의 시간'속에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완고한 일상의 시간이 무너지는 것이 우선 기적의 시간입니다. 아니 어쩌면 완고한 일상의 시간 속에 그리스도가 침투하여 그것을 유연하게 바꾸는 역할이 바로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차이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에 따라 '분리'되기도 하고 '격리'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변화 될 때 격리는 분리로, 분리는 차이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고, 페키지라는 소설가가 말하고 싶은 '기적'이고 그 시간들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별화된 일상을 이렇게 전복시키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시간 속에 살려면 일상의 시간이 개개인에게서 해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일상의 시간에 정복당해 살고 있습니다. 세속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이 일상을 해체하고 붕괴시켜 기적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음에도 우리는 그 기적의 시간을 일상의 시간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욕망이 일상의 시간과 공모함으로 하나님의 시간이 정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일상의 시간을 뒤집어 엎고 기적의 시간 속에 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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