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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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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잊혀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교회
막5:9
2009.7.5
그는 공동묘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손발을 묶어 놓아도 기어이 그것을 끊고 부수어 버립니다. 밤이고 낮이고 괴성을 지르며 돌로 제 몸을 마구 짓찧습니다. 오늘 본문 5장에 나오는 게라사 지방의 한 미친 사람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것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해입니다. 한쪽 편 사람들의 눈에 그가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지, 실제 그가 그런 인물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쪽 편 사람들이 그를 그래서 '위험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를 위험한 사람으로 보는 걸까요?
공동묘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자기 몸을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지만 그것을 끊는 힘이 있어서 그런가요? 아니면 자기 몸을 마구 찧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짐작 때문에 위험하다고 여기는 걸까요? 나는 이 원고를 쓰면서 얼마 전까지 우리교회 교우였던 진기씨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녀는 위험합니까? 본문에 나오는 그 사람이 일반인들에게 위험할리는 없습니다. 당시의 공동묘지는 시신을 묻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버리는 곳이었습니다. 동굴이었습니다. 그는 거기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네하고는 완전히 차단된 그런 곳에 있었는데 그가 위험할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막연하게 그를 '위험한 존재'로 설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인물에 대해서 뭘 알고는 있을까요? 얼굴은 자세히 보았을까요? 나이, 출생 관계, 살아온 내력은 알고 있을까요? 우리의 경험상 우리가 누군가를 나쁘게 말하거나 부정적으로 말하게 될 때 대체적으로 잘 알고 말하기 보다는 잘 알지 못하고 지레짐작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를 '위험한 인간'으로 판단하고 선언해 버립니다. 성서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피상적인 선입관인 것입니다. 요컨대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거기 사는 그 사람'은 없고 '그 사람에 대한 어떤 자기 편견'만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오늘은 우리가 무덤에 살던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좀 해봅시다. 왜 그는 자해를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서움을 주려고 하기 보다는 그 스스로 무서워서, 환경이 무섭고 자기를 격리시킨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는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짐작컨대, 사람들이 간혹 그를 어디선가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아무런 해코지를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붙들려 몰매를 맞고 쇠고랑에 채워졌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둬 놓고 싶어 했으니까요. 혹시 모를 자신들의 불안한 사태가 현실로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공동묘지에 산다는 것보다 사람들의 그런 행위가 더 무섭지 않았겠어요?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두려워했을 것이고, 그래서 공동묘지로 그의 거처를 옮겼을지 모릅니다. 그곳으로 가야 무서운 사람들이 없으니까요. 그에게는 공동묘지라는 장소의 무서움보다 그를 경계하고 단정 짓고 행동하려는 사람들이 더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지 않았겠어요? 그리고 이리저리 뛰지 않았겠어요? 이른바 '공동묘지의 미친 놈' 입장에선 그를 그렇게 미치게 만든 귀신이 다름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그에겐 귀신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연을 생각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그의 광폭한 행동만 주목합니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에만 신뢰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위험인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태도도 늘 이렇습니다.
이런 그에게 이름이 있을리 없습니다. 직분, 사회적인 역할을 부여받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대신 '위헌한 놈'으로 그에게 딱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세상에 있지 않은 이상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저 '게라사의 미친 놈'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그런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무덤]이란 살아 있었으나 죽은 자의 공간에만 갇혀 있는 존재들의 세상이 아닙니까? 거기 그가, 아직 죽지도 않은, 산 사람들의 공간에 있을 그가 죽은 자의 공간으로 쫓겨나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런 위험한 인물이 예수와 만났습니다. 만났다기보다는 마주친거죠. 그러나 사람들은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마주치자 피하지 않고 그에게 말을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요? 아닙니다. 이 상황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말을 겁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 너무나 평범한 질문이라고요? 그럴까요? 그렇게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이 사람에겐, 그간 아무도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신기하고 놀랍고 기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예수님과 같은 인간애적인 관심을 갖고 얼굴을 마주쳐주거나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에게 얼굴을 맞추고 말을 걸어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미처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에게 그런 일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괴성을 지르거나 자기 몸을 해치지 않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이 "내가 예수를 따르겠다"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귀신에게서 풀려나는 순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정신을 다른 곳에 둔 이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그 미친놈이 말했다는 '군대 귀신'은 뭐고 '돼지 떼'는 뭡니까? 이 표현은 유대나라의 군대나 게라사의 군대를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군단'이라는 말은 오로지 로마군대 에서만 씁니다. 약 6천 명 정도 인데, 군사행동의 기본 단위가 바로 '군단'이었습니다. '군단이 움직였다'그러면 군대 전체가 동원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전 로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돼지 떼는 또 뭡니까? 대규모 돼지 사육장이죠. 그가 사는 근방에 돼지 농장이 있었던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지만 로마군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게라사 시민들은 돼지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개인적인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의 죄거나 잘못에서 생긴 게 아니라 로마라고 하는, 국가라는 권력으로부터 비롯된 고통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구조거나 사회 또는 일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기주의를 위해 그를 삶의 공간에서 내 몰아서 생긴 불행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지난 5월에 있었던 설교를 되짚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교회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혈연과 이해관계의 가족주의를 떠나 그리스도를 한 아버지와 어머니로 모시는 이들의 새로운 가족개념'을 세우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고,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뜻하시고 예수가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게라사 지방의 미친 사람을 대하는 예수를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과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두들 그를 잊은 채, 자기들이 규정하고 싶은 대로 그를 이야기하는데, 예수는 사람들에게서 망각되고 '위험한 인물'로 취급되는 그이와 마주대하고 말을 겁니다. 이름을 묻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쫓겨나서 있으나마나한 사람, 심지어 그 자신에게 조차 잊혀졌던 이름을 불러줍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없는 것과 진배없는 존재를 다시 있음으로 일으켜 세우는 분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망각 상황에 놓인 이들, 그래서 점점 자기 자신이 붕괴되어 가는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하는 일, 곧 전도인 것입니다.
엊그제 어느 젊은 목사님과 점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저는 아주 귀중한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교회가 50년 이상 되면 그 교우들 중에서 칭찬받고 추천할 만한 시장 후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을 키워 내지 못하면 그건 교회가 있어야 할 가치를 상실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왜 여기 있어야 하는 겁니까? 우리 교회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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