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함부로 서약하고 맹세하지 말라

마태복음 복음............... 조회 수 3434 추천 수 0 2012.02.09 11:58:03
.........
성경본문 : 마5:33-37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함부로 서약하고 맹세하지 말라

본문: 마5:33- 37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윌리암 포크너(Faulkner 1897-1962)는 평생을 미국 남부의 사회적 변혁의 모습을 소설로 형상화시켰던 독특한 소설가입니다. 194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작품 중 단편 ‘에밀리에게 장미를’ 이란 걸작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미국 남부 소도시에 에밀리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했던 에밀리는 어느 날 떠돌이 십장 베론과 사랑을 하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에밀리와 같은 귀족이 베론과 같은 떠돌이 상놈과 어울려 다니는 것은 마을의 불명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베론이 에밀리를 배신하고 도망쳐버리자 에밀리는 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생활을 합니다. 할머니가 된 에밀리가 죽자 마을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열리지 않던 그녀의 집에 가 문상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굳게 잠긴 방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방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침대에는 30년 전에 죽은 베론의 시신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던 자세로 백골이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에밀리는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려는 베론을 독살하고는 그의 시신을 침대에 눕혀놓고 평생동안 그의 베개 옆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 기괴한 단편소설은 사랑에 집착하는 에밀리라는 여인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과 사랑의 헛된 맹세를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사랑하자고 맹세했던 베론의 배신에 일생 매여 살았던 것입니다. 가엾은 에밀리처럼 우리는 평생을 헛된 맹세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맹세하고 우정을 약속하고 계약을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맹세와 약속은 한갓 들의 풀포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서약하고 맹세하는 것을 전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서약 혹은 맹세에 대해서 어떤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까?

 

1, 헛맹세와 거짓 맹세

신앙의 위기는 헛맹세와 지키지 못할 맹세를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함부로 맹세하고 그 맹세를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형제와 우리의 관계가 깨어지며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불성실한 자세에서 신앙의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되고 잘못된 자세로 맹세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본의(本意)가 무엇입니까? "헛 맹세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하지도 않을 것을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남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가득한 거짓 맹세를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관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신앙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편 116:14).

 

2. 서약하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

일제 치하 때 한 젊은이가 의대 입학시험을 보면서 하나님께 이런 서원을 했습니다. “이 학교에 입학시켜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 졸업 후에 젊은이는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서원대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무료 진료소인 복음병원을 개설해 영세민 의료구호사업에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이기도 했던 이 사람은 정작 집 한 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다가 성탄절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기려 장로입니다. 모든 세상의 크리스천들이 장기려 박사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결심하려고 한 일이 있다고 하자 그의 아버지가 그의 서원이나 그가 결심한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의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의 서원과 결심한 서약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민30: 1- 5)

 

서약하고 맹세한 것은 지키지 못하면 거짓 서약과 헛 맹세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가 거짓 맹세가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개 하는 일이 됩니다. 제 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입니다. “망령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은 100%의 신뢰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누구도 하나님이 두려워 자신이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어떠한 약속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말씀을 소극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말씀의 진의는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이 지킬 뚜렷한 규율입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전5:4,5)

 

3. 서약하고 맹세하는 것을 조심하라

어느 예쁜 처녀가 여행 중 목이 말라 두레박 줄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 물을 실컷 마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올라 갈 수가 없어서 크게 울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나이가 그 처녀를 구해주었고, 둘은 곧 사랑을 맹세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둘은 헤어지더라도 반드시 다시 만나 결혼할 것을 약속하고, 증인으로 우물과 때마침 길을 건너던 족제비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헤어진 후, 몇 해가 지나도록 처녀는 약속을 지키며 사나이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남자는 약속을 깨고 타관에서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의 아이가 놀다 지쳐서 풀 위에 잠들어 있었는데, 족제비가 아이의 목을 물어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아들 하나를 또 얻었는데, 그 아이는 우물 속에 비치는 모습들을 재미있게 들여다보다가 그만 빠져 죽었습니다. 그제서야 사나이는 옛날 처녀와 맹세한 약속을 회상하고 그때의 증인이 족제비와 우물이었던 것도 떠올리었습니다.

 

사사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된 입다는 암몬의 왕에게 사절을 보내어 국교를 조정하려고 했으나, 암몬 왕이 거절하므로 부득불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임하게 된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면 집에 돌아갈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맨 먼저 자신을 영접하는 자는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입다가 승전의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기뻐서 춤을 추며 집에서 처음 나와 영접한 것은 그의 외동딸이었습니다.

“슬프다 내 딸이여!”하며 입다는 자신의 옷을 찢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딸은 서원대로 제물로 드려야 했다. 입다는 너무 경솔히 서원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맹세를 너무 많이 남용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맹세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맹세에는 항상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어 결국에는 맹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맹세하지 말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자신의 안일한 도피를 위해서 남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4. 예와 아니오로 대답하라

예수님은 "너희는 '예'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요'하라. 여기서 빗나가는 것이나 그 이상의 말은 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헛 맹세하지 말고 지킬 수 있으면 있다 하고, 없으면 없다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을 옳다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서로 간에 불신이 쌓이게 됩니다. 거짓은 '예' 할 때 '아니오' 하고, 진실에 대해 침묵할 때 시작됩니다.

야고보 사도도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약 5:12)고 권면합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 동료 간에, 상사와 부하 간에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건강한 사회, 신용사회를 만드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할 때만 가능해 집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의 피부를 찌릅니다. 우리의 치명적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십니다. 너무나 기초적인 가르침 같지만, 문제는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의 말씀과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 할 때 "아니오" 하고, "아니오" 할 때 침묵하거나 "예" 합니다. 이것이 바로 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빗나가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말씀에 우리의 신앙을 비춰볼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거짓 맹세하며 빈 약속을 드리는 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맹세와 약속을 함부로 생각하고 쉽게 저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과 형제 앞에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며, 부주의하게 약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에서 주시는 예수님의 교훈은 분명하여 맹세가 필요 없는 투명한 인격과 정직성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나 아니오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그것을 그대로 믿을만한 정직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상사의 호감 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첨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윤활유라고 부르죠.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칭찬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과장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극적효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존경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분에 넘치는 집에서 삽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생명을 다해 지킬 것이 아니라면 결코 함부로 서약하고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하고 맹세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는 예로, 아니오는 아니오로 말할 때 상대방이 신뢰할 만한 정직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영광을, 이 어둡고 부패한 세상에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존귀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노라면 맹세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정립되어질 것입니다.

 

첫째, 인간이라는 존재의 유한함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연약해서 아무리 맹세하고 약속해도 그것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지킬 수 있는 것은 맹세를 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는 것은 아무리 맹세를 해도 되지를 않습니다. 이미 무엇을 빌어서 맹세를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약속이 자신만의 마음만 가지고서는 지켜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예수님께서 가장 믿으셨던 수제자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참 중요한 맹세를 한 사건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제자들과의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막14:27) 그랬더니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용기 있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분명,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예수님 앞에 힘을 주어가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런 베드로가 정말 그 날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할 때에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립니다. 맹세한 것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맹세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못나서 그 맹세를 지키지 못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덜 해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도 연약한 한 사람이라는 그릇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맹세하면서 약속하는 것은 분명히 내 능력보다 큰 사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맹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고로 맹세하는 것은 지켜 나가기 힘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맹세가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세를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자신이 이런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둘째, 맹세는 사람을 교만하게 할 요소가 있기에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말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맹세의 가장 큰 단점은 어쩌다 자신의 힘으로 그 맹세를 지켰을 때, 사람은 한도 끝도 없이 교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각고의 노력 끝에 맹세를 잘 지켜내어 원하는 결과가 나왔을 때, 그는 주님께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님, 보십시오. 제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께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쓸만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오직 내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심한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엄격히 따지면 신앙의 기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너무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이란, 내가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나를 주장하던 교만한 나의 옛사람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혹 내가 지켜야 할 일이 있어도 내가 내 힘으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지킬 힘을 주시고, 그 힘을 힘입어 내가 그것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시도록 나를 맡겨드린 일 뿐입니다. 맹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철저하게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맹세할 때의 모습을 상기해 보십시오. 얼마나 교만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 지라도 자신은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말 자체가 벌써 교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후에 성령체험을 한 후에,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기적에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신처럼 떠받들려 하자 베드로는 참으로 겸손하게 이 기적의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전부 주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과 1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기 어디에 베드로가 살아있습니까? 분명히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킨 것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자신이 했다고 말을 합니까? 오직 주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 우리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힘을 힘입어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니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맹세할 일도 없습니다. 내가 맹세하지 않아도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지켜야 할 일이라면 나로 하여금 지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맹세는 그 자체가 교만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셋째,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오직 예수만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사노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 있고, 또 지키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선명하게 우리 안에 구분이 되는 일들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맹세를 해야만 지켜야 할 일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까? 맹세하지 않으면 지켜야 할 일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맹세는 맹세일 뿐입니다. 맹세하지 않았더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또 맹세와 상관없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맹세는 맹세일 뿐입니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닙니다. 그리고 맹세보다 소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중에는 쉬운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려운 일이라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려워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거의 내 능력 밖의 일이어서 내가 하기에 너무 벅찬 일일지라도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야 하고, 지켜야 할 일은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능력 밖의 일입니다. 내가 스스로 하기에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럴 때, 맹세한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찌해야 일이 되는 것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할 때 일이 됩니다. 주님은 이미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사건부터가 바로 그러한 일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면 굳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에 도달 할 수 없었기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로 구원에 이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어디 구원뿐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맹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믿음을 동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연이어 들려주신 이후에 이렇게 말씀을 마무리 지으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 이상 말하는 것이 죄가 됩니까? 그 이상이 되어서 맹세를 하든지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없이 하는 일은 잘 한 일도 죄악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했어도 주님 밖에서 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를 위해 한 일이요, 그릇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분들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달리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맹세는 무익합니다. 맹세는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오히려 우리를 죄악으로 기울게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힘은 주님을 의지할 때 오는 것이지 나 스스로를 믿고 맹세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가 나를 높이기 위해서나 나를 과장하려고 또는 나의 진심을 감추고 남을 속이기 위해서 맹세를 하거나,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내기 위해서 함부로 서약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언제나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게 하시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사랑과 소망이시며 생명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한태완 선교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6456 레위기 주님과 함께 걷는 길 레13:1-23  최장환 목사  2012-02-15 6635
6455 이사야 천 배의 축복을 꿈꾸십시오 사60:10-22  이한규 목사  2012-02-14 2763
6454 이사야 성령 충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61:1-11  이한규 목사  2012-02-14 2956
6453 이사야 바른 믿음을 가지십시오 사60:1-3  이한규 목사  2012-02-14 2255
6452 이사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길 사60:4-9  이한규 목사  2012-02-14 2465
6451 여호수아 편견만 버릴 수 있다면 수20:1-9  이한규 목사  2012-02-14 2348
6450 이사야 사랑은 책임입니다 사59:9-21  이한규 목사  2012-02-14 2590
6449 이사야 응답 받는 4대 기도 사59:1-8  이한규 목사  2012-02-14 2907
6448 누가복음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 눅18:9-14  이한규 목사  2012-02-14 3084
6447 이사야 성공자의 6가지 공통분모 사58:9-14  이한규 목사  2012-02-14 2085
6446 이사야 가장 아름다운 사람 사58:1-9a  이한규 목사  2012-02-14 2433
6445 이사야 거칠 것이 없는 축복 사57:14-21  이한규 목사  2012-02-14 2754
6444 이사야 감정에 도취되지 마십시오 사57:1-13  이한규 목사  2012-02-14 2292
6443 시편 은혜가 넘치는 삶의 축복 시145:1-9  이한규 목사  2012-02-14 3084
6442 이사야 현상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사56:9-12  이한규 목사  2012-02-14 2337
6441 이사야 용서를 체험하십시오 사56:1-8  이한규 목사  2012-02-14 2209
6440 이사야 축복은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사56:10-13  이한규 목사  2012-02-14 2787
6439 민수기 원망과 불평의 시작 민11:1-9  이정원 목사  2012-02-13 2847
6438 민수기 성도의 책임 민10:29-36  이정원 목사  2012-02-13 2223
6437 민수기 하나님의 군대 file 민10:11-28  이정원 목사  2012-02-13 4552
6436 민수기 은 나팔 민10:1-10  이정원 목사  2012-02-13 2138
6435 민수기 우리의 인도자 민9:15-23  이정원 목사  2012-02-13 1961
6434 고린도전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가 되자 고전15:51-52  강종수 목사  2012-02-12 1974
6433 요한복음 농부의 마음 요15:1-2  한태완 목사  2012-02-12 3330
6432 시편 믿음과 하나님 알기 시34:1-22  한태완 목사  2012-02-10 2607
6431 신명기 하나님 경험의 위기 신18:15-20  정용섭 목사  2012-02-09 2094
6430 마가복음 제자의 길 막1:14-20  정용섭 목사  2012-02-09 2410
6429 사무엘상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삼상3:1-9  정용섭 목사  2012-02-09 2933
6428 마가복음 물세례, 성령세례 막1:4-11  정용섭 목사  2012-02-09 2945
6427 갈라디아 종의 영, 아들의 영 갈4:4-7  정용섭 목사  2012-02-09 2074
6426 요한일서 생명세상 file 요일1:1-4  이선근 형제  2012-02-09 2056
6425 야고보서 어른 사회의 왕따 약2:8-9  정형선 형제  2012-02-09 2355
6424 창세기 새 하늘과 새 땅 : 창조와 부활의 새 아침 창1:1-5  서광선 목사  2012-02-09 2162
6423 누가복음 바보의 힘 : 예수의 멋진 힘 눅6:20-22  한완상 형제  2012-02-09 2681
» 마태복음 함부로 서약하고 맹세하지 말라 마5:33-37  한태완 목사  2012-02-09 3434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