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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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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선근 형제 |
참고 : | 2012.1.29 새길교회 주일설교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生命세상
(요한1서 1장 1-4절)
2012년 1월 29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이선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간사)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우리가 이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1-4절)
요한1서는 생명의 말씀에 관한 편지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은유적인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신이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며 실제로 있었던 것에 대한 증언입니다.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란 하나님의 말씀(Logos)을 말하는 건데, 그건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표현 하듯 매우 구체적인 것으로 실제로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표현입니다. 물론 예수라는 사람이 빼어난 인물임을 사람들이 못미더워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믿지 않았던 것은 성육신에 있었습니다. 초월적 신의 존재만을 참으로 여기는 이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와 예수의 십자가를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저 세상 곧 하늘에만 있던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완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 표현은 곧 하나님의 성육신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게다가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은 온 세상으로 성육신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서로 듣고, 서로 보고, 서로 만지며 계셨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고 그를 통해 직접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사귐을 허락하셨던 놀라운 사건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나눈 다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부정이며, 이는 하나님과의 사귐의 단절이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치 않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귐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된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관계에서도 죄를 지어선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거니와 예수가 그랬듯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은총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 자매형제에게 의를 행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 하면서 자매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입니다. 보이는 자매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는 거짓말쟁이 임이 분명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완성을 우리는 계명으로 받았습니다. 다른 말로 십자가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진실한 사귐이며 이 사귐은 온 세상 안에 있습니다. 이 사귐은 온전한 사랑을 완성할 것입니다. 거리낌도 두려움도 이 온전한 사랑의 완성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쁨으로 가득하며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요한1서의 저자는 영지주의 즉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영의 세계와 분리된 육의 세계 사이에서부터 오는 신학적 오류를 정정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역설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이 오히려 세상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세상과 유리된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영에 대한 갈망과 동경은 철저하게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세상에 대한 관점만을 말하고 그래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진리(Logos)를 성령과 물과 피로 증언하며 이 증언들은 서로 합치(agreement)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정서에서는 天, 地, 人의 삼재론(三才論)에 근거한 삼태극적 세계관이 이에 잘 부합하리라 생각합니다.
삼태극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가며, 빈 곳과 빈 곳 사이에 살아가며, 때와 때 사이에 살아가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아갑니다.여기서 인간이란 생물학적인 언어로써 인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生命을 말합니다. 즉 삶, 살다, 살리다, 살아가다, 산다, 살아 있다, 나다, 출산하다, 등으로 풀이 되는 生과 목숨, 운, 명령을 내리다/받다 등으로 풀이 되는 命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의 청지기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기술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살리라는 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生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살리라는 명을 받아 모든 이들의 목숨을 살려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제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은 게지요. 요한1서는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을 성육신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종교적 고백이 실천되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인간은 아무 곳에서나 또 아무 때나 이유 없이 생명이 되는 성육신 사건의 카이로스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친자의 관계를 은총으로 내려 주셨으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1서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독생자를 이 땅에 내어 주신 하나님 사랑의 절정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완성은 십자가를 통한 희생 제사를 통해서 가능하며, 이로써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때문에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고, 내 것을 나눔에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행하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가, 또 우리 안에 사는 그리스도가 완성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실천이며 다른 말로는 십자가로 상징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니 참 어려운 일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것이 짐이 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같이 우리들 또한 하나님께서 낳은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은총으로 받았으며 하나님이 주신 영으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을 영으로 받아 자매형제를 살리는 십자가 실천 즉 예수 살기로 사랑을 완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씨앗의 비유와 같으며 소금의 비유와 같습니다.
요한1서의 저자가 왜 ‘생명의 말씀(Logos)’으로 이 글을 시작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말씀 곧 진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아들에게서 완성된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풀어 봅니다. 왜 사랑하는 대상은 꼭 자매형제들이어야만 합니까?
살리라는 명을 받아 온 세상으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는 역할이 곧 청지기의 역할이라고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사이, 곧 하늘과 땅의 사이가 됩니다. 사이는 하늘과 땅을 소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하늘이게 하고 땅을 땅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매형제라는 말 또한 은유적으로 풀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눈으로 본적이 없다던 하나님께서 부모가 되고 예수가 자식이 되는 이 놀라운 가족관계는, 가장 근원적인 사랑이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사귐을 관계로 풀어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일대일로 친자의 관계라면 우리들과 우리들은 자매형제 된 관계(사귐)로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근원적인 관계를 가족으로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도 사실은 모두 근원적인 사랑이 실천되는 사귐의 관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태초부터 온 세상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극의 곰도, 바다 속 물고기들도 심지어 무생물인 빙하까지도 모두가 한 가족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매형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요한1서는 온 세상 만물을 사랑하라는 온 세상 만물 자매형제들의 자속적 고백이라고 이 시간 저는 고백합니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으며 나를 비워 충분히 너를 품어 안을 수 있다면, 내 안에 네가 살게 할 수 있고 또 네 안에 내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1서 저자가 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가 참 기쁨으로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바로 이 사귐이 우리 서로의 기쁨을 차고 넘치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놀라운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나 놀랍고 무섭던지, 한동안 혼이 난 듯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제가 봤던 그 사진을 함께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북극의 곰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관통하여 사람들은 거대한 유조선을 끌고 지나갑니다. 부서지는 빙하 위에는 곰 한 마리가 어떻게든 막아보겠노라고, 절벽보다도 거대한 이 뱃머리를 붙들고 간절하고 간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몇 일 전 웹의 한 유명 포털 사이트에 검색 순위 상위에 랭크되었던 사진입니다. 한 유조선이 운송비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좀 더 빠른 해로를 찾아 빙하를 깨고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가 감각도 없고 느낌도 없는 빙하만을 깨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서로 얽혀 연결되어 살아가는 북극의 생명세계를 빙하와 함께 무참히 깨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가 사진 몇 장을 가지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들을 상상한 것일까요?
사실 이 사진 한 장으로 엄청난 규모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사진 한 장이지만 인류의 역사와 문화, 경제, 정치가 함께 뒤엉켜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 단어로 이 사진을 풀어 지목해 보려합니다.
‘풍요’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풍요로운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는 지구를 착취해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가장 심한 착취는 주로 화석연료를 채취하기 위함입니다. 화석연료 중에서도 석유는 단연코 인류에게 엄청난 풍요를 주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산업혁명은 사실 이 화석연료인 석유가 없었다면 실패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유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줍니다. 주거, 교통, 식품은 물론 의료산업에까지 크고 작은 인류의 모든 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석유는 풍요로 대표되는 금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필요한 자원입니다.
이 오래된 에너지원은 땅에 구멍을 뚫기만 하면 스스로 솟구쳐 올라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깊은 곳에 구멍을 뚫어야 합니다. 그나마 스스로 솟구쳐 올라오지 못할 만큼 깊다면 기계로 뽑아내야만 합니다. 그것도 이제는 수지가 맞지 않아서 모래에 스며있는 석유를 분리해 내고 있다고 합니다. 기름 값이 계속 오르는 이유 중에는 더 깊은 곳에 있는 석유를 뽑아내기 위해서 시추하는데 드는 비용이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뽑아낼 대로 뽑아낸 석유를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래전 지구의 에너지들이 화석이 된 것인데 다시 살아난 이 에너지는 지구를 오래전 그들의 역할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2007년 IPCC의 보고에 따르면 2030년까지 지구의 평균 온도 증가율을 6도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경고 했었습니다. 세계경제를 감안한 IPCC로서는 최소한의 합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경고하는 위험수준은 훨씬 더 심합니다. 그들은 3도 또는 4.5도를 경고하고 있으며 이것이 절대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년 지구의 평균 기온은 상승하고 있고 이대로라면 인류는 분명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적 종말을 예상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 지구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류는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큐영상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이 영상은 2009년에 프랑스에서 제작 된 HOME 이라는 다큐영상 중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영상은 매체의 특성상 이곳에 올리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다큐영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세계인구의 20%가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개발도상국 원조금의 12배 이상을 무기증강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일 5,000명이 오염된 식수로 인해 죽고 10억 명에겐 안전한 식수원이 없습니다.
약 10억 명 정도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거래되는 곡물의 50%이상이 동물사료나 생물연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경작지의 40%는 장기적 손상을 입었습니다.
매년 1,300만 헥타르의 숲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포유류의 25%, 조류의 12.5%, 양서류의 33%가 멸종위기에 처해 있고 이들은 자연사율 보다 1,000배나 더 빨리 죽어가고 있습니다.
75%의 수산생물이 소진되어 고갈 또는 고갈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지난 15년 동안의 평균기온은 관측 이래 최고치에 이르렀습니다.
빙하는 40년 전 보다 40%나 얇아졌습니다.
2050년까지 최소 2억만 명의 기후난민이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를 소유하기 위해 착취당하는 지구를 모르는 듯 대했습니다. 지구가 착취당했던 것은 하나님을 하늘에 가두고 성육신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지구가 고통당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 지구의 고통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구를 우리의 자매이며 형제라고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과 어울려 사귐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편리함과 안락함을 온 생명에게 돌려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쉽게 포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태고적 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온 생명과의 사귐입니다. 인류는 온 생명 안에서, 온 생명은 인류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완성해야 할 것입니다.
생태 여성 신학자 로즈마리 래드퍼드 류터는 <가이아와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낙관주의나 비관주의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이다.”라고 호소했습니다.
헌신적인 사랑은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결코 짐이 되지 않습니다. 거리낌도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담대함을 가지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면 됩니다. 인류와 지구를 하나로 이어주어 온 생명이 되는 生命세상이 곧 온전한 하나님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꿈꾸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이 무거운 주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온 생명과의 사귐은 곧 우리에게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우리가 함께 꿈꾸기를 희망합니다.
(기도)
생명으로 살리라고 명하시는 하나님,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 이 지구를 위해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하게 이룰 수 있도록 하옵소서.
오늘 새길 공동체는 이 예배를 통해
온 생명이 生命세상 되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기도합니다.
사랑을 완성한 그리스도,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
우리도 그 한 길 가게 하옵소서.
길을 가다 길이 되신 예수님,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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