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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영, 아들의 영

갈라디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074 추천 수 0 2012.02.09 23:3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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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4:4-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65743 

 

종의 영, 아들의 영

갈라디아서 4:4-7, 성탄절후 첫째 주일, 2012년 1월1일


갈라디아서가 기록되던 때의 기독교가 처한 상황은 지금과 전혀 다릅니다. 당시의 기독교는 갓난아이와 같았습니다. 그 아이가 온갖 전염병을 이겨내고 어른으로 클지, 아니면 죽어버릴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사상의 체계도 잡히지 않았고, 성경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구약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사용했습니다. 복음의 내용도 아주 원초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교회를 세웠으니 처음부터 분명한 체계가 세워지지 않았겠느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걸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부활체로 나타나셨다가 승천하셨을 뿐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동생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유대교만이 옳은 종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유대교를 그대로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유대교 신자로 남는 것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방인 신자들이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불거졌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기독교가 이방 기독교에게 요구하기를 예수를 믿되 유대교가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양쪽 사이에 다툼이 커졌습니다. 이 다툼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첨예화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쓴 문서가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다른 복음과 율법

 

유대 기독교가 이방 기독교에게 요구한 율법은 유대교를 유대교 되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율법 없이는 유대교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단적으로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알려진 십계명을 생각해보십시오. 영원한 가치가 있는 계명들입니다. 그것은 유대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역시 신앙적으로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모든 율법의 엑기스라 할 십계명이 옳다면 율법도 옳은 겁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라는 유대 기독교의 요구는 이상한 게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교가 없었다면 기독교가 시작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초기 기독교도 유대교 전통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을 그대로 기독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의 신앙적 토대가 유대교에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런 요구를 배격합니다. 갈 1:6절 이하에서 바울은 유대 기독교의 요구에 마음이 흔들린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을 질책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9절 말씀은 파격적입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서 다른 복음은 유대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보면 초기 기독교계에서 이단아입니다. 바울이 지금 다른 복음이라고 비판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기독교의 대세였습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별 볼 일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바울을 가리켜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정말 타협을 모르는 독불장군인가요? 아니면 기독교 진리를 너무 명백하게 본 사람인가요?

 

바울이 문제로 삼은 것은 유대 기독교의 요구로 인해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수가 상대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기독론은 유대 기독교인들의 기독론과 달랐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 사건을, 즉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을 율법으로 보충될 필요가 전혀 없는 유일무이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제2의 예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그럴듯해도 복음이 아니라 사이비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민중 메시아론은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입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는 있겠으나 민중이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실을 외면하고 민중이 구원할 것처럼 말하면 결국 다른 복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에도 비슷한 것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화론이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구원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받는 복음과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다른 복음은 매우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입니다. 그것을 단순히 유대교의 토라와 할례라는 종교적 형식에 한정해서 보면 곤란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후반부에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에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긴 했지만 교회 안에 부도덕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걸 보면 믿음만으로 살기는 힘들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법칙과 기준들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삶의 시행규칙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위해서 지켜야 할 규칙, 모범적인 세상살이를 위해서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들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살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도 하고, 스스로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아무리 고상해도 예수 사건과 비교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왕따를 당하면서까지 유대교는 물론이고 유대 기독교와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 내몰렸고, 아무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저술이 신약의 가장 중요한 문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오히려 자기의 신학적인 투쟁을 실패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계에서 마이너리티였던 바울의 주장이 역사적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 되었습니다.


종과 아들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오늘 설교 본문에서 종과 아들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종에서 아들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가 한 업적에 따라서 주인에게서 인정을 받습니다. 율법의 본질이 그것입니다. 어떤 일을 행하든지, 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업적 의(義)를 얻습니다. 유대인들은 업적의를, 또는 행위 의를 얻기 위해서 용맹 정진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매달렸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에(눅 18:9-14)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자책감(죄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우월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교묘하게 착종되어 있습니다.

 

오늘 업적 의를 얻기 위해서 유대교의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책망합니다. 자기에게서 잘못된 게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결벽증 환자처럼 삽니다. 봉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기도생활에 게으른 것에 대해서, 전도와 헌금생활이 인색한 것에 대해서 계속 자책합니다. 어떤 목사는 노골적으로 <게으름>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자책감(죄의식)은 신앙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자책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자책감은 심리적인 현상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인격적인 현상입니다. 자책감은 실제로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들은 종과 신분이 완전히 다릅니다. 아들은 주인을 더 이상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아빠 호 파테르)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아빠’라는 단어는 아람어로 아버지입니다.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파테르입니다. 아들이라는 단어도 좀 구별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라고 할 때의 아들은 ‘자녀’라는 뜻이고, ‘그 아들의 영’이라고 할 때 아들은 아들 맞습니다. 그 아들은 곧 예수를 가리킵니다. 다시 설명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의 영을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여전히 종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판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받으라고 악담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태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종이나, 자녀나 말만 다르지 실제로는 비슷한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바울도 어떨 때는 자기를 종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빌 1:1) 빌립보서 등에서 언급된 종의 개념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이지 율법적인 업적 의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종과 자녀의 행동이 겉으로는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분간을 못합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합니다. 자녀들도 부모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러나 종은 자기의 행위와 업적에 따라서 평가받지만 자녀들의 경우는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업적을 내지 못해도 여전히 자녀로 인정받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유업에 있습니다. 종은 유업을 받지 못하지만 자녀는 유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유업이 무엇일까요? 유업을 받을 자라는 말은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농사짓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농사일을 유업으로 물려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유업은 구원입니다. 생명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이 무슨 필요가 있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성취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다음은 무엇인가요? 지금 여기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자녀들을 잘 키운 것으로 우리의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지만 그것에만 머문다면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 구원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마리아라는 여자에게서 나신 분입니다. 그를 대신할 그 어떤 위인이나 영웅, 그 어떤 성인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이제 우리는 속량을 받았습니다.(5절) 그를 통해서 종의 빚이 없어져서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 자기의 업적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해방과 자유입니다. 이게 실제로 이해가 가나요? 믿어지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영을 받으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2년 첫 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끝없는 수고와 노력에 매달리는 종으로 일 년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생명의 상속자인 하나님의 자녀로 사시겠습니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여러분의 영혼을 밝혀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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