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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410 추천 수 0 2012.02.09 23: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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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4-2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69582 

jys.jpg제자의 길

마가복음 1:14-20,

주현절후 셋째 주일, 2012년 1월22일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기독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만 불교는 부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한 불성을 깨달은 선각자입니다.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깨닫고 성불하면 됩니다. 부처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중요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 그걸 가리킵니다. 자기의 불성을 깨닫는 일에 부처님이 방해가 되면 부처님을 버려야 합니다. 부처를 죽이라든지, 나무로 된 부처상을 땔감으로 사용했다는 말들이 거기서 나온 겁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에서는 역사적 예수님이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은 extra nos, 즉 우리 밖에서 in Christo,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와 하나가 되는 길은 곧 그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제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확실하다는 겁니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확신이 줄어든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그래서 다시 뜨거운 믿음을, 그런 확신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매달립니다. 믿음이 떨어지는 상황과 올라가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갈등을 느낍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갈등조차 없이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교회생활의 경력은 많아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에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합니다. 단순히 교회 조직의 한 지체라는 사실에만 매달려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버림과 회개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두셨습니다. 인류의 다른 스승들도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제자가 되는 과정이 특이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서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구하고 스승이 허락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예수님이 직접 부르셨습니다. 물론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직접 찾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들은 예수님에게 실망해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부른 이들만 제자가 되었습니다. 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이들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신 사건이 나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그물질을 하는 것 예수님이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어서 같은 어부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버지, 품꾼, 배를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막 1:16-20)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자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예수님의 영적 카리스마가 탁월하다고 해도 부름을 받자마자 곧 따라나섰다는 건 좀 과장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언제 자신들의 결심을 실행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결국 예수님의 제자로 나섰다는 사실, 즉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출가를 단행했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시몬 형제와 야고보 형제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시몬 형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고, 야고보 형제는 아버지 세베대, 품꾼, 배를 ‘버려두고’ 나섰습니다. 야고보 형제 집안은 시몬 형제 집안에 비해서 살림살이가 넉넉했던 것 같습니다. 버려둔 게 더 많습니다. 어쨌든지 최초로 예수님의 제자로 나선 이들은 그 이전에 자신들의 호구지책이었던 모든 것, 그리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이런 결단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들은 평생 고기만 잡아먹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은 날은 기분이 좋았고, 못 잡은 날은 나빴습니다. 고기잡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들의 삶만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들 때문에 가족들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가족들의 생계조차 크게 어려움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들은 그것을 버려두었습니다. 기존의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의 첫 걸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버림’입니다.

 

도대체 버린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복음서에는 이 대목 이외에도 버리라는 말이 흔하게 나옵니다. 한 군데만 인용하겠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 20)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세상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출가한 이들은 많습니다. 지금도 그런 수도사들이 많습니다. 로마가톨릭 사제들은 이런 걸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사제서품에서 그들은 세 가지를 서약합니다. 무소유, 동정, 순명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버림의 영성에 속합니다. 모든 걸 버리고 제자로 산다는 것이 실제로 이런 출가만을 가리키는 걸까요? 예수님이 그걸 원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출가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농사도 짓지 않고, 소도 키우지 않고, 공장도 다 문을 닫고, 결혼도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인류 역사는 곧 끝장납니다. 자신의 형편에 따라서 출가할 사람은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세상살이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버림의 영성은 수도사들에게만 해당되지 일반 신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버림의 영성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제자를 부르는 사건 앞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총괄적인 묘사입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전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 문장이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외워두십시오. 이 문장에서 키워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회개와 믿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버림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 사역의 핵심을 15절에서 언급한 뒤에 그걸 구체적으로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확인한 것입니다. 회개가 곧 버림이며, 버림이 곧 회개입니다. 회개가 무엇인지를 알면 버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헬라어 메타노이아입니다. 이 단어는 돌아선다는, 또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회개를 자기가 잘못한 행동을 뉘우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회개가 희화화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남의 과수원에 가서 복숭아나 사과를 몰래 따먹은 것을 회개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을 집회에서 자기의 잘못을 공책에 적어 불에 태우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합니다. 청소년들과 심지어는 어른들의 부흥집회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회개를 유도합니다. 수년 전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몇몇 분들은 자기의 잘못을 회개한다는 퍼포먼스를 펼쳤습니다. 회초리로 자기 종아리를 치는 겁니다. 자신의 부도덕성, 파렴치한 행위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단순히 반성입니다. 이런 반성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겁니다. 회개는 교양 차원의 반성이 아니라 영혼 차원의 돌아섬입니다. 삶의 무늬가 아니라 삶의 실체가 돌아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로 삶의 중심을 옮기는 것입니다.


의존과 자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쪽으로 삶의 중심을 옮길 수 있겠지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힘으로 통치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로 삶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말이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데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확대하는 것에만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만 예민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여유 있게 살아가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면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돈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신앙생활도 돈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돈이 여러분의 영혼을 만족시켜주는지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10분 동안 숨을 쉬지 않으면 10억 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시다. 그걸 선택할 사람이 있을까요? 가난한 교회였을 때 오히려 영적으로 만족했는데, 부자 교회가 되어서 마음들이 갈가리 찢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즉 하나님의 생명 통치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생명으로 불러내시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자리가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선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의 빛으로 영혼의 관심을 돌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의 내면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라고 하지 않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 그를 따른다는 것,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생명통치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현재의 실존만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미래까지 완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해서만 부활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만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면 여러분은 이제 세상의 그 어떤 대상에게도 자신의 영혼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맡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한 분에게만 순종함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역설적이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예수님을 향한 의존성이 깊어질수록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자유는 더 확대됩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선택한 ‘제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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