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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4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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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은혜가 넘치는 삶의 축복
(시편 145편 1-9절)
<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의 차이 >
세상에서 가장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앞날입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교회를 나갔습니다. 개천절에 의형제를 맺은 친구 7명과 담임선생님 댁에 갔다가 서울 광화문에서 4명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에 한 친구가 우리를 <종교 교회>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층의 어둡고 좁은 밀실로 인도한 후에 말했습니다. “얘들아! 이제까지 지낸 삶을 한 번 30분 동안 반성해 보자!”
그 친구의 제의에 모두가 진지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불을 껐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30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우렁찬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사랑이 넘치고 감동적이었던지 그 기도를 듣고 나머지 3명이 다 울면서 회개하고 모두 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꾸준히 교회를 다녔는데 6개월쯤 후 뜨거움이 식어졌고 1년쯤 후에는 교회를 다시 완전히 멀리했습니다.
그 후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교회를 오히려 배척했고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놀렸습니다. 그때 믿음을 가진 친구들을 공격하면서 놀려먹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었는데 최고의 공격 무기는 이런 말이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 그 한 마디 말이면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항상 괴롭힐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말투가 얼마나 잔인하고 비겁한 말투인지를 나중에 당해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사실 교인이 완벽해서 교회에 다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해서 다닙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가장 큰 차이는 거룩성과 도덕성과 윤리성과 참을성의 차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의 차이에 있습니다. 성도도 죄를 짓지만 그 의식의 바탕에 ‘하나님 의식’이 있기에 그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바로 그런 ‘의식의 유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 ‘행동의 유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남편은 혼자 교회에 나가는 아내에게 시비를 걸 때마다 이런 소리를 합니다. “당신 교회에 나가면서 왜 그래!” 사실 그런 말은 부부간에 해서는 안 되는 비겁하고 치졸한 말입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한 그 행위를 지적하며 문제를 풀어가야지 잘못했다고 집안 따지고, 출신지 따지고, 학력 따지고, 종교를 따진다면 얼마나 비겁한 모습입니까? 그나마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듣기에 이혼도장 콱 찍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속을 긁으면 인간성 자체에 얼마나 실망이 됩니까?
어떤 아내는 매번 그런 말투로 비꼬는 남편을 보고 참다못해서 교회출석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간다!”는 계급장을 떼버린 후에 남편에게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듭니다. 아니면 극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파괴하고 가정을 외면합니다. 그런 극한 상황의 되서야 아내의 교회출석이 차라리 고마운 일이었음을 깨닫고, 아내의 교회출석을 은근히 막고 “교회 다닌다면서 왜 그래!”라고 비겁하게 비꼬면서 ‘진리와 평안을 찾아보려는 아내의 마음’에 칼을 들이댄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비겁하고 야비한 태도는 ‘진리를 추구해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비꼬면서 우습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조차 “교인이 왜 저래!”라는 비겁하고 야비한 말투를 자주 씁니다. 마치 자신은 완벽한 교인이라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교인이 왜 저래!”란 말을 잘하는 교인이 오히려 교회 욕 먹이는 행동을 더 많이 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성도의 그런 어투는 자기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정의감은 있지만 인생 경험이 적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적은 청년들이 “교인이 왜 저래!”란 말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저는 그런 말투가 가진 비겁함과 야비함과 치졸함을 깨달은 후부터는 최대한 “교인이 왜 저래!”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는 생각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가끔 교인이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면 본능적으로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려고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참는 이유는 그런 말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행위가 바른 사람’이 아니라 ‘행위가 바르려고 의식하는 사람’이고 또한 ‘완성된 성도’가 아니고 ‘여전히 은혜가 필요한 부족한 성도’입니다. 그런 이해도 없이 교회 다니는 친구들에게 “교인이 왜 그래!”란 말의 칼을 너무 자주 휘둘렀던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몰지각한 제게도 하나님은 다시 은혜를 내려 주시고 목사까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 은혜가 없었다면 유혹 많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 은혜 받을 때 따르는 축복 >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청평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사진에 나온 저의 모습을 보고 한 유명한 관상쟁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학생은 얼마 못살고 10년 이내에 죽을상이다.” 친구가 그 얘기를 조심스럽게 해주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있으니까 결국 엉터리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말을 들은 후 10년 동안 그 엉터리 점이 항상 머리에 맴돌면서 두려움을 주었고 사고가 생길 때마다 그 점을 연상했습니다. 엉터리 점도 사람의 영혼을 그렇게 두렵고 피곤하게 만든 것입니다.
왜 점을 멀리해야 합니까? 영혼을 두렵고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어 영혼을 약화시키고 마음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점쟁이들의 수법입니다. 저는 점쟁이 중에서 위로를 주고, 사랑을 권면하고, 삶의 용기를 심어주는 점쟁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대개 어떤 어투이든지 무서운 공포심을 유발하는 말을 반드시 합니다. 무속인들도 보면 하나같이 말과 행동과 얼굴 표정 등으로 공포심을 조장합니다.
그처럼 공포심을 이용해 마음을 무력화시키고 두려움을 심는 모습은 사단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그러므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누군가 “당신! 내 말을 안 들으면 10년 내에 죽어! 3대가 줄초상 나!”라고 해도 그런 말을 절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10년 속박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런 얘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말고, 들으려고 가지도 말고, 혹시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십시오.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가리라!”
죽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고수할 때 오히려 가장 선한 길을 열어주시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똑똑해서 잘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앞으로도 계속되어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생활의 은혜’도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때 어떤 축복이 따르게 될까요?
1. 참된 행복을 찾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고 날마다 영원히 하나님을 송축하겠다고 고백합니다(1-2절). 그에게 전혀 시련이 없어서 그런 고백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삶에도 시련이 많았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로부터 무섭게 쫓겨 다녔고 왕이 된 후에도 자식들이 서로 죽이고 심지어는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역모까지 일으켰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찬송을 잃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행복의 조건이 많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넘치면 행복의 조건이 적어도 행복을 느낍니다. 왜 사람이 불평합니까? 결국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있으면 불평은 사라지고 불행 중에도 행복을 보는 눈이 생깁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 이전에 은혜입니다.
저는 미국 유학 중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등록금이 없어서 등록포기 직전에 몰릴 때도 있었고, 결혼 전이어서 이국땅에서 고독감이 파도처럼 밀려 올 때도 있었고, 교회 전도사로 하루 15-20시간 교회 일을 하면서 심신이 지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있었기에 불평도 거의 없었습니다. 가끔 불평하는 마음이 들 때는 대개 은혜가 없을 때였습니다.
그때 가깝게 지내던 중국 연변 출신의 한 맹인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를 보면 더욱 불평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 친구는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중국 복음화의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시련도 이겨내게 합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는 것이 결국 행복입니다.
2.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힘이 있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는 큰 소리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지만 힘이 없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작은 소리로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가 있을 것을 믿고 찬양했습니다(3-6절). 그처럼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을 믿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살면서 가끔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낙심은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제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바로 ‘낙심’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넘치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시련을 통해 창조적인 더 좋은 내일이 펼쳐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마귀가 자신의 도구들을 전시해놓고 경매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비매품’으로 표시된 도구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 구매자가 그 도구가 왜 비매품이냐고 묻자 마귀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마귀 세계의 가장 유용한 연장이라 팔 수 없습니다. 이 연장의 이름은 ‘낙심’인데 이 도구로는 어떤 마음도 뚫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절대 안 팝니다.”
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마귀가 틈탈 때 첫째로 하는 일이 바로 ‘사람을 낙심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낙심하면 용기를 잃고, 가능성을 잃고, 꿈을 잃고, 결국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쉽지 않는 일이기에 그래서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큰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대개 이슬처럼 소리 없이 차근차근 주어집니다. 사실 매일 내리는 이슬 같은 은혜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장맛비 은혜보다 더 식물의 성장과 영혼의 성장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너무 단기간의 횡재를 노리지 마십시오. 그런 욕심이 지나치면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교회도 금방 성장했으면 좋겠지만 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 축복의 때까지 꾸준히 하나님의 은혜를 차곡차곡 받아 챙기십시오. 건물을 쌓을 때 차곡차곡 쌓아야 높이 쌓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도 차근차근 자라니까 크고 높게 자랍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꾸준히 내리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이슬 같은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 작은 것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결국 최후에 승리합니다.
3.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다윗은 모든 현실에서 감사거리를 찾으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았기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노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7-8절). 그처럼 은혜가 넘치면 감사의 고백도 넘치게 됩니다. 또한 은혜와 감사가 넘칠 때 작품인생도 가능해집니다.
어느 날, 에디슨이 소년 때 신문을 팔며 기차의 한 구석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차의 진동으로 실험약품이 떨어져 불이 났습니다. 그러자 격분한 차장이 에디슨을 세차게 떠밀어 그때부터 그에게 청각장애가 생겼습니다. 나중에 누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청각장애로 연구가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때 에디슨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청각장애로 딴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얼마나 은혜가 넘치는 인생입니까?
복된 인생을 진정 원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훈련하십시오. 병들고 힘들 때도 감사하십시오. 그때가 없으면 어떻게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집니까? 가끔 고독해질 때도 감사하십시오. 정신없이 분주한 삶에서 고독마저 없다면 어떻게 생각이 깊어지겠습니까? 일이 계획대로 안 될 때도 감사하십시오. 일이 잘되기만 하면 언제 교만이 꺾이고 순종적인 삶을 배웁니까? 나중에 보면 한때 힘들었던 순간들도 다 유익한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처럼 은혜가 넘치면 감사도 넘치게 되고, 감사가 넘치면 다시 은혜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4. 내일의 축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9절). 그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믿음은 ‘단순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을 가지는 것’입니다. 때로 소원성취가 늦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시고 자녀와 후대의 축복도 예비하십니다.
특히 우리의 가장 큰 사명은 자녀와 후대가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은혜를 아는 자녀로 키우고, 자신부터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영상을 남겨주십시오. 또한 작은 일에도 감격하고 작은 은혜에도 깊이 감사하며 손을 꽉 준 계산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손을 크게 편 선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모습들이 자녀들에게 무언의 깊은 감동과 영상을 남깁니다.
금년 4월 17일부터 5일간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 한인 총회 33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제주도에서 총회가 개최됩니다. 미국에서 100명, 해외선교사 20명, 한국에서 30명이 참석하는 비교적 큰 행사입니다. 해외에서 오는데 적어도 1인당 1500불 정도의 비용이 들기에 부담을 줄여드리려고 한국 체재비 1인당 500불은 한국에서 감당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절약하고 절약해도 약 7500만원의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준비된 재정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러 집사님들이 안 된다고 총회 유치를 포기하자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도 부담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4년 전에 결정된 사항을 총회 6개월 앞두고 포기하는 너무 미안하고 아쉬웠습니다. 모두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저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네 월세 보증금 8000만 원 있잖니? 조금 줄여서 이사하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가 되지 않겠니? 부족하면 그것으로 보충하겠다는 각오로 계속 추진해라!”
용기를 얻고 며칠 후 회의석상에서 말했습니다. “총회를 예정대로 개최합시다! 부족한 예산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신기한 역사가 많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교인과 온새기 회원으로부터 자발적으로 2500만원의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어떤 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분들이 은밀하게 헌금을 보내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기적의 역사가 써지고 있습니다. 나머지도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쓰려는 섬김의 마음을 가졌는데 하나님이 그 마음을 외면하시겠습니까?
왜 우리가 선교와 구제를 강조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500만원이면 우리 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입구공사, 부엌공사, 본당 냉난방 공사까지 할 수 있는 금액입니다. 7500만원이면 <네트영어 교육방송 비전>을 위한 방송 기초 장비 구입이 가능한 금액입니다. 그래도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먼저 선교와 관련된 지출을 하려고 합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도 지켜보시지만 우리 교회 자녀들도 지켜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도 틀림없이 선교하는 자녀가 될 것이고 결국 그들에게도 은혜와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리지 않겠습니까?
이제 늘 은혜를 사모하며 살고 때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 있어도 은혜의 길에서 이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겉포장이 나쁠 수도 있지만 그 포장 안에는 엄청난 보화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은혜의 모습은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작아도 나중에는 큰 겨자나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큰 열매가 없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큰 은혜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조용하게 꾸준히 임합니다. 그런 은혜를 차곡차곡 받아 누리십시오.
등산가가 산에 가는 재미를 끊지 못하고 운동가가 운동하는 재미를 끊지 못하듯이 은혜의 재미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언제 그런 은혜의 맛을 누리게 됩니까? 기본적으로 주일성수를 하고 말씀과 기도를 앞세우며 살 때 은혜의 맛을 누리게 되고, 또한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고 선교와 구제에 힘쓸 때도 은혜의 맛을 누리게 됩니다. 그처럼 은혜의 재미를 맛보고 누리면서 받은 은혜를 나눠주며 살면 그의 내일은 반드시 복된 내일이 될 것입니다.
< 은혜를 추구하고 받으십시오 >
미국에 레이몬드 릴리란 난폭한 흑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동네 교회 목사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열심히 전도하러 다니는 그 목사를 때려죽이겠다고 결심하고 벽돌을 보따리에 싸 들고 주일에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실도 모르고 열심히 설교하는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마음이 녹아졌고 결국 그는 가지고 간 벽돌로 목사의 머리가 아닌 자기 가슴을 쳤습니다.
후일에 세계 최대의 자선병원인 시카고의 ‘쿡 카운티 병원’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한 흑인목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과거의 릴리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선한 흑인 릴리 목사’란 별명으로 죽을 때까지 숱한 자선활동을 폈습니다. 그가 죽자 장례식장에는 손때 묻은 벽돌 한 장도 놓였는데 바로 목사를 때려죽이려던 그 벽돌이었습니다. 릴리는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매일 그 벽돌을 붙잡고 눈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저도 한 때 릴리처럼 믿는 친구들을 괴롭히면서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저에게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가끔 깜짝 놀랍니다.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기적이 있지만 제게는 제가 목사가 된 것이 기적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죄인이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고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도 새롭게 만들 수 있고 어떤 가정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삽니까? 결국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은혜를 체험하면 신기하게도 모든 걱정 근심이 사라집니다. 그 은혜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졌습니다.
외국의 건조지대에 가면 광활한 초원이 많습니다. 그 초원에 불이 번지면 아무리 빨리 달리는 말도 불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불길을 피하려면 먼저 주위에 불을 질러서 주위의 초원을 미리 태워 ‘안전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불길이 맹렬해도 이미 불길이 지나간 안전터 안에서는 안전하게 됩니다.
그처럼 2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 땅에 ‘안전터’가 생겼습니다. 그 안전터 안에 있으면 누구도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십시오. 참된 변화는 의지적인 결단보다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자아가 부서질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환경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면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오늘부터 더욱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누구나 멋진 삶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가끔 넘어질 때도 하나님은 “왜 넘어졌느냐”고 묻지 않고 그저 위로하고 감싸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한쪽이 잘되는 것 같아도 반드시 다른 쪽에 부작용이 생기고 ‘호사다마’란 말처럼 좋은 일이 있으면 새로운 문제도 또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 결국 모든 일이 잘되는 방향으로 흐를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도 말실수 한번으로 다 말아먹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왕조를 일으킨 개국공신들이 나중에는 대부분 처형됩니까? 왕과 허물없는 사이인 줄 알고 농담을 하고 말실수를 하면서 왕의 권위를 깎아먹다가 결국 제거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말 한 마디로 자신은 물론 후대의 축복까지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냉혹한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어떻게 좋은 인간관계가 지속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은혜의 길에서 멀어지지 마십시오. 은혜 아래 살다가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더욱 잘못됩니다. 냉장고에서 나온 음식이 더 빨리 부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반면에 잠시 은혜 밖에서 살았어도 새롭게 결단하고 은혜 안으로 들어오면 그의 앞날에는 찬란한 신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며 내일의 찬란한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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