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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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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
(누가복음 18장 9-14절)
< 한 중학생의 자살 사건 >
얼마 전, 한 중학생이 친구들의 가혹행위로 자기 아파트 7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그 나쁜 친구들은 먹을 것과 돈을 빼앗고, 담배도 피우게 하고, 심부름을 시키고, 숙제를 대신 시켰습니다. 그리고 점점 가혹행위가 심해져서 나중에는 물고문까지 가했습니다. 심한 심적인 고통으로 몇 번이나 죽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가족들 때문에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살 당일 아침에 아이의 고통을 전혀 모르던 엄마가 심하게 야단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살 당일 오후에도 그 나쁜 친구들이 라디오 선을 뽑아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며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했고, 무릎을 꿇리고 손에 라디오를 들게 해서 벌을 세웠고,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묶고 무차별적으로 때렸고, 오른쪽 팔에 불까지 붙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칠순잔치 사진을 보고는 가족들까지 욕했습니다. 결국 그날 학생은 유서를 쓰고 투신했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엄마 아빠! 불효만 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진짜 죄송해요. 물론 제가 죽는 것이 가장 큰 불효지만 이대로 계속 살면 더 불효할 것 같아요. 화내도 마음씨 착한 아빠,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는 엄마, 잘 대해주는 형을 둔 저는 정말 운이 좋아요. 철없이 굴었지만 속으로는 제일 우리 가족을 사랑했어요. 그 동안 죽고 싶었지만 엄마한테 죄송해서 자살도 못했어요.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걔들의 보복이 너무 두려웠어요. 저는 매일 가족들 몰래 제 몸의 수많은 멍들을 보면서 한탄했어요.”
유서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저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가족을 기다릴게요. 항상 저를 아껴주시고 가끔 용돈도 주시는 아빠! 고맙습니다. 매일 불효했지만 웃으며 넘어가 주신 너무 자상하신 엄마! 사랑합니다. 항상 그 녀석들이 먹을 걸 다 먹어도 용서해주고 잘 대해준 형! 고마워. 항상 잘 대해주던 친구들과 선생님들! 감사해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아빠! 매일 공부 안 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되셨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와 먹을 거 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님을 밝혔으니 이제 여한이 없어요. 더 이상 가족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저는 오히려 그간의 오해가 다 풀려서 후련해요.
앞으로 제가 없어도 잘 살아가길 빌게요. 가족들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할 거예요. 제가 한 짓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 듣고 매일 맞으며 남몰래 울던 시절을 끝내서 홀가분하지만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제가 없어도 슬퍼하시거나 저처럼 죽지 마세요. 가족들이 슬프다면 저도 슬플 거예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세요. 우리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막내 올림.“ (추신) 부모님께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전했지만 지금 전할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 학생입니까? 그런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아주 못되고 비겁한 사람입니다. 물론 악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교만한 사람은 피해 따돌리며 멀 발치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복된 삶을 살려면 말과 행실이 좋은 친구를 사귀고 말과 행실이 나쁜 친구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힘이 있다고 약해보이는 자를 괴롭히고 따돌리는 것은 예수님을 괴롭히는 것과 같고 그것은 천벌을 받을 일입니다.
<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 >
살면서 항상 좋은 인간관계만 펼쳐졌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공동체에서 자신이 소외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때의 소외감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1. 착하게만 살지 마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들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9절). 이 비유에는 차별과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와 질책이 잘 담겨 있습니다. 가끔 보면 착한 사람들은 불의한 상황을 운명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니까 불의하게 멸시를 당하고도 끝까지 참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의를 위해 십자가를 질 때는 지더라도 계속 불의하게 괴롭히면 용기를 가지고 ‘거룩한 분노’를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질 때는 졌지만 장사꾼들의 소굴이 된 성전을 청소할 때처럼 거룩한 분노를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착하게는 살되 착하게만 살지는 마십시오.
은혜가 중학교 3학년 때, 어느 날 갑자기 은혜 학교 선생님이 우리를 학교로 와달라고 했습니다. 은혜가 같은 반 남학생의 얼굴로 연필 깎는 칼을 던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처럼 겁 많은 아이가 그랬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니까 그 남학생이 어수룩하고 순진한 은혜를 계속 무시하고 욕하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때 제가 은혜에게 뭐라고 말했을까요? “은혜야! 그래도 참고 사랑하고 용서했어야지! 너는 목사 딸이잖니?”라고 했을까요? 그러나 그런 말은 사랑을 오해한 것이고 그런 사랑의 오해가 비극의 불씨를 남깁니다. 사실 목사 자녀의 가장 큰 무언의 고통은 “목사 애들이 왜 저래!”란 편견적인 시선입니다. 목사는 목사고, 아이는 아이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편견적인 시건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상처가 없도록 저는 가정에서는 철저히 ‘목사’가 아닌 ‘아빠’로 행동하면서 유머도 하고 장난도 칩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 딸이니 참으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은혜 속이 시원해지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야! 잘했다. 그런데 왜 칼을 얼굴로 던지기만 했어? 칼로 배를 푹 찌르지 그랬어?”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진짜로 찌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라고 해도 은혜는 못합니다. 지금부터 좋은 아내와 며느리가 되는 수업을 조금씩 시키려는데 “칼을 잡는 게 무섭고 떨려서 요리도 못하겠다!”는 아이가 어떻게 사람을 찌릅니까?
제가 그렇게 말한 것은 고도의 심리적 교육효과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앞으로도 불의하게 당하는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상황을 깨뜨릴 용기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은혜를 괴롭힌 학생을 위해서도 그런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학생은 계속 그렇게 살면 점점 스스로 망가지지만 한번 크게 제지를 당하면 자신도 행동을 조심하면서 그런 나쁜 행동을 그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은혜의 거친 항거가 한번쯤은 필요합니다.
만약 그 자살한 학생이 죽을 용기를 가지고 야구방망이로 그 괴롭히는 학생 중의 한 명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렸다면 다시는 그를 괴롭히는 반 친구들이 없었을 것이고 그 괴롭히던 친구들은 그때부터 주의하면서 지금처럼 감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은혜가 그렇게 한 후부터 그 남학생은 더 이상 은혜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은혜의 마음이 풀린 후에 물었습니다. “은혜야! 그래도 그렇지 얼굴을 향해 칼을 던지면 되겠니?” 그러자 은혜가 그때야 입을 열었습니다. “그냥 놀라게 하려고 얼굴이 아닌 그 옆의 벽을 향해 던졌어요.” 결과적으로 은혜도 좋게 되고 그 학생도 좋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정의할 때 “사랑은 불의를 참고”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거룩한 분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은혜 졸업 책자를 보면 ‘그해 학생들이 뽑은 5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3위를 차지한 것이 ‘이은혜 폭발 사건’이었습니다. 평소에 천사처럼 순한 아이가 칼을 던졌으니 반 아이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살다 보면 때로는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용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가해자를 사랑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가해자가 대가의 무서움을 알고 주의하면 그도 더 나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계속 괴롭히면 용기 있게 맞설 필요도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이런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착하게 살지 말자.” 그때 교인들이 그 설교를 듣고 너무 좋아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할 소리도 못하고, 억울한 일 만나도 꾹 참고 살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착하게 살지 말자!”고 하니 얼마나 가슴 벅찬 말입니까? 또한 어떤 목사님은 <역도산>이란 영화에서 “착한 척 하며 살지 말라!”는 대사를 듣고 사랑에 대한 개념을 수정했다고 합니다.
가치관의 우선순위는 진선미의 순서입니다. ‘아름다운 것(미)’보다 ‘선하고 착한 것(선)’이 중요하고, 선하고 착한 것보다 ‘바른 것(진)’이 중요합니다. 불의하게 계속 당하면서도 착한 척하며 착하게만 살지 말고 때로는 ‘바름’을 위해 ‘착함’을 희생하고 불의한 현실을 용기 있게 알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침묵하라는 말은 비판과 가십과 헤픈 말에 대한 경고이지 불의에 끝까지 침묵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을 만큼 참되 불의로 인한 고통이 계속되면 용기 있게 그 사실을 알리십시오.
조폭이 괴롭히면 경찰에 알리십시오. 경찰에 알렸다고 보복하면 용기를 내어 그 보복사실까지 알리십시오. 한번 당하면 계속 당하니까 그 당하는 고리를 용기 있게 끊어내야 합니다. ‘피해자 위협’보다 ‘피해자 보복’은 훨씬 큰 죄입니다. 피해자 보복은 공권력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에 결국 그 조폭은 공권력에 의해 와해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사단은 불의한 현실을 말하면 더 고통 받을 것이란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대개 허상입니다. 그 허상으로 너무 공포에 젖지 말고 용기 있게 불의한 현실을 고발하십시오. 물론 고발이 남발되면 안 됩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 참아야 할 때는 참아야 합니다. 다만 꼭 고발해야 하는데 더 당할 것 같아 무서워서 못하겠다고는 하지 마십시오. 그런 헛된 공포심을 이겨내고 용기 있게 말하십시오.
물론 입이 가벼운 ‘고발장이’나 ‘고자질장이’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참을 만큼 참고 죽고 싶은 정도라면 죽지 말고 그 현실을 용기 있게 알리십시오. 그러면 두려움이 심어 놓은 어두운 먹구름은 물러가고 자유로운 새 아침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때 이런 탄성이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문제가 풀리는 걸 괜히 혼자 절망하고 고민했네.” 그때의 기쁨과 자유가 얼마나 꿀맛 같겠습니까? 이제 착하게는 살되 착하게만 살지는 마십시오.
2. 따돌려짐을 즐기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멸시 받고 따돌림 당하는 세리를 더 귀하게 여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사람에게 따돌림을 당하면 하나님께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따돌림의 문제를 극복하고 오히려 즐기십시오. 누구나 따돌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실망하지 말고 오히려 창조적인 작품인생을 만드는 기간으로 선용하십시오.
저는 목회 초창기에 소외감이 컸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니까 교단 배경이 없어서 아는 목회자나 동료도 없이 거의 왕따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날 사람이 없었기에 오히려 하나님과 성경을 깊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말씀사역과 온라인 새벽기도가 생길 수 있었고 성경 66권 전체 파일 비전을 가진 미션퍼블릭과 재정적인 원천으로 주신 네트영어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따돌려짐을 즐기며 내일을 준비하면 오히려 인생 역전승의 통쾌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저도 선교와 관련된 여러 연합 사역을 하면서 몇 가지 직책도 맡았습니다. 그러나 금년 4월 총회가 끝나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스스로 왕따를 만들고 개인 사역에만 전념하려고 합니다. 너무 사람을 많이 만나면 영성과 생각이 얕아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세히 보면 휴가도 일종의 긍정적인 자기 따돌림입니다. 그런 따돌림도 필요합니다. 너무 바빠서 깊은 생각과 새로운 생각도 없이 살면 결국은 마이너스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일의 명령을 받은 존재는 사람뿐입니다. 그만큼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시며 쉼의 중요성도 강조했습니다. 쉼이 없는 노동은 '소외된 노동'입니다. 그런 노동에는 기쁨도 없고 보람도 없습니다. 휴가는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자기를 살피는 기간입니다. 실제로 계속 반복되는 일상의 자리를 떠나 보아야 자기와 자기 삶의 모습이 더 잘 보입니다.
요새 왜 직장암에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까? 어떤 분의 말에 의하면 “직장이 암담해서 너무 안달하니까 직장암에 걸린다.”고 합니다. 그처럼 안달하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휴가가 필요합니다. 휴가는 먼지처럼 소리 없이 마음의 창틀에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와 안달하는 마음을 털어내는 기간입니다. 휴가 할 때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도 신선함을 주지만 스스로 따돌리는 고독한 상황으로 만들어 조용히 자기 마음을 살펴도 신선함이 생깁니다.
휴가를 통해 일에서 벗어나 누리는 침묵과 고독이 얼마나 좋습니까? 현대인에게는 내적 침묵의 영토가 너무 줄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독의 순간도 필요합니다. 따돌림을 받아 겪는 고독도 선용하면 좋지만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으려고 스스로 만든 고독은 더욱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기도하고 묵상하심으로 사역의 에너지를 얻으셨습니다. 그처럼 따돌림의 순간을 창조적인 고독의 순간으로 만들어 즐기십시오.
3. 하나님과 교제하십시오
사람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면 그때 더욱 하나님과 깊이 기도로 교제하면 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 겸손한 심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응답 받는 기도의 능력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교만한 기도를 보십시오. 그는 서서 따로 기도하며 자신은 다른 죄인이나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면서 거만하게 기도했습니다(11-12절).
그 기도를 보면 기도인지 자기 피알(PR)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기도의 주어는 항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피알을 버리고 자기의 어두움과 연약성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자기를 의롭다고 계속 피알하면 사람도 외면하고 결국 하나님도 외면합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자꾸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그때 가장 좋은 행동은 자신의 잘못부터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교만한 언어로는 하나님을 결코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몸통과 같고 영적인 암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하게 본문의 세리처럼 기도하십시오. 본문에서 세리는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13절).” 그때 예수님은 세리가 오히려 의로운 존재라고 하셨습니다(14절). 사실 진실한 회개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며칠 전에 이런 꿈을 꿨습니다. 어느 날, 우리 네 가족이 영화구경을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때 아까워서 잘 신지 않던 구두를 신으려고 꺼냈습니다. 그런데 구두 앞 가죽이 쑥 들어가 있었습니다. 은혜가 아빠 구두를 신고 축구하면서 구두로 볼을 차다가 앞 가죽이 쑥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약간 짜증 섞인 어투로 은혜를 야단쳤습니다. 그런 후에 금방 “조금 더 참을 걸. 괜히 야단쳤다.”고 후회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니까 영화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가족과의 약속이니까 그냥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은혜도 야단맞고 삐쳐서 영화를 안 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냥 갔습니다. 야단맞은 것은 야단맞은 것이고 가족과의 약속은 약속으로 알고 분리해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철이 들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영화를 보는 내내 ”이제 은혜가 삐쳐서 말을 안 하면 어떡하지?“ 하고 염려했습니다.
드디어 영화를 다 봤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은혜가 삐치지 않고 그 동안 쑥스러움 때문에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던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아빠! 저 때문에 속상하셨지요? 죄송해요.” 야단맞아도 삐치지 않고 죄송하다고 말하니까 꿈속에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은혜가 많이 철이 들었구나!” 그때 꿈속에서 하나님의 심정이 느껴지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분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회개를 기뻐하시는 구나!”
때로 하나님으로부터 채찍을 맞아도 삐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런 철없는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도 마음이 상합니다. 고난의 채찍을 맞아도 하나님이 마땅히 그렇게 하셨다고 여기고 그때 오히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영혼을 더욱 기뻐하시고 인생의 위기를 인생의 기회로 만들어주시며 더욱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살다 보면 문제는 늘 생깁니다. 그때 너무 좌절하지 말고 너무 쉽게 삐치지도 마십시오. 어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쉽게 좌절하는 것이나 잘 삐치는 것도 일종의 정신적 장애라고 합니다. 힘들고 외롭고 마음이 상하면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더욱 깊이 교제하면서 참된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외롭고 힘든 위치에서 벗어나 공동체와 역사 속의 중심인물로 우뚝 서게 하실 것입니다.
< 약자를 존중하십시오 >
살면서 소외된 위치에 있게 되면 믿음으로 그 상황을 잘 극복하십시오. 더 나아가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고 약자를 존중하는 인격을 힘써 개발하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일은 약자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인간문화재 중에 병신춤을 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보호할 필요가 있을까요? 장애인의 약점을 흉내 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미성숙한 모습입니까? 연약한 사람을 업신여기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일전에 뇌성마비 1급 장애 여성이 자살했습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잘 키우며 사는 것이 꿈이었지만 정부에서 지원하는 한 달 생계비로는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노점상을 하며 살아보려고 했지만 약간의 수입이 생기면 정부의 지원이 줄고 임대주택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노점상 일도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녀는 장애인에게도 살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다가 결국 죽음을 택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만 사람들마다 그들을 살펴줄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자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교사의 어려운 얘기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도와야 할 이웃이 보이면 자기 삶을 희생해야 하고, 또한 선교지의 상황을 알면 현재 자신의 삶은 사치가 되고, 괜히 죄책감만 생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이웃의 고통에 마음을 열면 대가를 치러야 하기에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 곁에 머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멀리서 안타깝다는 듯이 이렇게 생각만 하고 말만 합니다. “왜 세상은 이처럼 불공평할까? 왜 하나님은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을까?” 그러면서 자신은 재빨리 일상사 안으로 숨기에 결국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른 이해나 사랑의 고백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제 소외된 약자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소외된 약자’란 말을 들으면 데모가 연상되어 괜히 싫다고 합니다. 그러나 데모할 힘도 없는 진짜 약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줄 마음의 준비를 늘 하십시오. 도울 마음을 준비하면 도울 수 있는 능력도 주어질 것입니다. 이제 소외된 위치에 있으면 그 상황을 창조적인 작품 인생의 계기로 삼고 더 나아가 소외된 사람 곁에 힘써 서줌으로 가는 곳마다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전하고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를 준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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