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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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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편견만 버릴 수 있다면
(여호수아 20장 1-9절)
여호우사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땅 분배를 끝낸 후에 6곳에 도피성을 세웁니다. 도피성은 요단 서편에 3곳, 요단 동편에 3곳이 지정되었는데, 모두 레위 지파에게 주어졌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의 생명을 피의 복수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고대 사회는 복수가 인정되던 사회였기에 살인자는 우발적으로 살인했어도 보복살인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도망가면 재판을 받을 때까지 보호받았습니다. 재판을 열고 고의성이 인정되면 피고는 살해당한 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만 재판 결과 그 사건이 정말 우발사고였음이 입증되면 그는 도피성 안에서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주하다가 그 이후에는 자유인이 됩니다.
결국 도피성 제도는 보복의 악순환으로부터 사람과 사회를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이 깃든 제도입니다. 이 도피성 제도를 보면 율법적인 구약 사회에도 간간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메시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율법의 흐름 속에 은혜의 흐름을 만들어 인간 사회를 보다 풍요롭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담겨 있고, 은혜의 중요성을 잘 알려주는 제도입니다.
구약 율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잘 지키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율법을 완벽히 지키는 사람이 없기에 율법만 강조하면 은혜가 없게 됩니다.
요새도 그런 율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일성수를 한다고 주일에는 가게도 안가고, 이사 안하고, 목욕탕도 안 갑니다. 그런 태도가 주일성수의 핵심내용이라면 버스도 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버스는 타도 되고, 가게는 가면 안 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율법은 소중히 여기되 자신이 지키는 몇 가지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는 율법주의자는 되지 마십시오.
율법주의자란 한 마디로 은혜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눈물의 의미를 모르고, 관용과 용서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용서를 실천하고 모든 한 맺힌 일의 처리는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은혜를 넘치는 사람이 되십시오.
< 편견만 버릴 수 있다면 >
도피성은 본문 요단 서편에 3곳이 지정되었습니다(7-8절). 그 3곳은 납달리 지파의 갈릴리 게데스, 에브라임 지파의 세겜, 그리고 유다 지파의 헤브론입니다. 또한 요단 동편에도 3곳이 지정되었습니다. 그 3곳은 르우벤 지파의 베셀, 갓 지파의 길르앗 라못,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바산 골란입니다.
이렇게 지정한 것은 철저히 지형적 고려가 있었습니다. 즉 도피성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도피 중에 피살되지 않도록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과 요단 동편 땅에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도피성을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도피성은 어디에서든지 쉽게 도달할 수 있었고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또한 도피성은 하나같이 산지에 세워졌습니다. 누구에게나 잘 보이고 잘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도피성은 이방인들도 받아들였습니다(9절). 그것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무시하거나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지방색도 없어야 하고, 교단의 높은 벽도 없애야 하고, 누구나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신앙생활에 가장 큰 장벽은 바로 편견입니다. 그 편견을 깰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하게 하나님을 잘 섬길 때만 우리를 받지 않고 죄 가운데 있고 비뚤어져 갈 때도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주변 사람을 그렇게 받으십시오. 부모님이 내게 편견을 심어 주었든 아니든, 우리 조상들이 어떤 편견을 심어주었든지, 모든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영혼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받아들이십시오. 편견만 버릴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복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지금 밉고 싫은 사람이 떠오르십니까? 내가 직접 당해서 미워하게 되었다면 큰 죄는 아니지만 그래도 용서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더 나아가 남을 말을 듣거나 분명하지 않은 편견적인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라면 그 죄는 큰 죄이기에 편견을 버릴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와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항상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며 사십시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넓혀 서로를 위한 여백을 만들고 사랑과 용서로 그 여백을 채워가십시오. 작은 이견(異見) 앞에서도 조급하게 화를 내는 자에게 지혜는 머물지 않고, 반대자를 귀찮다고 무조건 잘라내는 자에게 행복은 머물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현재 친구를 존중하면서 새 친구를 만들 줄 아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차이를 ‘배타와 편견의 구실’로 삼지 않고 ‘사랑과 이해의 도전’으로 볼 때 행복의 샘은 바로 우리 곁에서 넘쳐흐르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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