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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6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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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이사야(149) 성령 충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 61:1-11)
< 성령 충만할 때 이뤄질 역사 >
본문은 바벨론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진 위로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때 이뤄질 역사 및 성령이 임하실 때 이뤄질 역사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가난한 심령이 부요해지고, 상한 마음이 고침 받고,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습니다(1절). 또한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고 하나님의 보복을 통해 기쁨이 넘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2-3절).
‘여호와의 은혜의 해’는 50년마다 찾아오는 희년을 뜻합니다. 희년은 온 이스라엘에 자유와 회복이 선포되는 해입니다. 가난 때문에 빚지고 자기 땅을 남에게 넘긴 채 소작인으로 혹은 종으로 살던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희년의 나팔소리였습니다. 희년의 해 7월 10일,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yobel) 소리가 길게 울리면, 종은 자유인이 되고 땅은 원주인에게 돌아갑니다. 매인 사람에게 그 나팔 소리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성령은 생을 짓누르는 온갖 억압에서 해방을 주는 영입니다. 그런 해방의 역사를 통해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근심이 찬송으로 변하면서 해방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처럼 찬송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모습이 성령 충만의 중요한 표시입니다. 그런 성령 충만한 삶이 예배 때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넘치게 함으로 희년을 현재의 삶에서 구현해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교회 찬양예배에서 한 여성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양할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분이구나!” 그런데 예배 후에 그 여성이 교회 주차장에서 차 빼는 문제로 남에게 큰소리를 치고 심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찬송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은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 성령 충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
계속해서 본문 4-11절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온전한 회복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 회복의 역사가 특별히 한국 교회에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물량주의, 교권주의, 세속주의, 기복주의, 그리고 인본주의 등으로 많이 병들었습니다. 그 병의 치유를 위해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성령을 시험하며 성령 충만을 과시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의 은사로서 첫째로 언급한 것이 바로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강조하면서 성령이 주시는 지혜가 없이 자기 최면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병든 존재나 몰상식한 존재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은 함부로 뱀을 집어 올리거나 독을 마시지 않습니다. 큰 해가 미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성경 말씀(막 16:18)을 앞세워 실제로 그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동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어느 날, 한 시골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날 마침 큰 홍수가 났습니다. 그 시골 교회까지 가려면 물이 불은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때 강을 건너면 안 된다고 했지만 부흥사는 자신이 가지 않으면 집회가 무산되기에 꼭 건너야 한다고 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야 하는데 이렇게 강물이 불어서 건너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기다리는 저들을 위해 믿음으로 건너겠으니 보호해주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급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헤엄쳐가다가 그만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갔습니다. 다행히 그 부흥사는 강 하류에서 구출 받았지만 병상에서 닷새나 입원해야 했습니다. 급류가 흐르는 곳에서 수영해서 건너겠다고 뛰어드는 것은 영성이 넘치는 행동이 아니라 어리석고 무모한 행동입니다. 믿음은 지식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지 지식과 상식을 멸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영성 과시의 도구로 삼지 말고 바르게 성령 충만을 추구하는 것은 성도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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