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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8:2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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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십자가 죽음에 숨겨져 있는 제 2의 비밀
사도행전강해 (3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수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없음)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26-40)
이상한 사람만 만난 빌립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하는 중에 사마리아에선 성령의 권능까지 돈으로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을 만났다. 그런데 이제 에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나 전도하게 된다. 그것도 천사가 나타나서 광야까지 가라고 해서 만난 사람이 그렇다. 이왕이면 왕, 귀족, 제사장, 학자, 재력가, 장군 등 고상하고 박식하며 권세를 가진 지도층을 전도해야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끼칠 텐데도, 하나님의 인도는 이상하기만 하다.
몰라서 하는 말이다. 돈, 권세, 지성, 명예 등을 갖춘 사람들은 아쉬울 것이 별로 없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지 않는다. 항상 자기가 잘나서 그런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고 착각한다. 자존심과 체면과 자기 의가 가장 강한 자들이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는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깨트려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복음인데, 내면에 철옹성을 쌓고 있는 자에게는 전도가 너무나 힘들뿐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독교 복음은 현실적 어려움에서 구해주거나 형통을 보장하는 수단이 결코 아니다. 역으로 따져 세도가를 통해 복음이 더 잘 전해지리라 추측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가 가진 세도가 부러워서 믿게 된다는 뜻이다. 그럼 전해진 복음이 다른 복음이거나 그렇게 오해하게 된다.
반면에 만약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자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 이유는 당연히 현실적 필요가 아니라 영적인 가난함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개인의 영적 가난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과는 무관하다. 복음이 우선적으로 전해져야 할 순서는 영혼이 얼마나 가난한지 여부뿐이다. 하나님을 가장 목말라하는 자가 가장 먼저 그분의 은혜를 입게 된다.
그리고 사실은 고대 사회에서 내시는 왕의 최측근인지라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본문의 내시도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많아 큰 권세가 있다고 했다.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에까지 왔다갈 정도의 신분이면 지금으로 치면 거의 대통령비서실장급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빌립더러 그런 세도가를 만나게 해서 복음을 쉽고도 빨리 퍼지게 하려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근본 목적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일은 산술적 효율성과는 무관하게 오직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이뤄질 뿐이다.
본문은 오히려 세상에서 통하는 권력, 가문, 학식, 재력, 외모 등이 복음 전파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명백한 실례로 기록된 것이다. 복음 자체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 아니라, 빌립이 내시를 만나게 된 계기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시작한 전도로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시켰다면 인간적인 계산, 추측, 예상, 기대는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마리아에 있던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멀리 유다의 광야까지 급히 불러내었다. 가사는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약 70 키로의 지점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사마리아가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니 빌립이 출발한 곳에서 치면 상당한 거리를 더 가야 했다. 그로선 과연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는 채 오직 주의 사자의 명령에 순종했다. 성령에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런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들어 쓰지도 않는다. 즉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 당신의 때와 방법에 따라 구원을 주시기 위해 당신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 것이다.
우연의 일치는 하나님의 각본
빌립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만드신 뜻은 과연 무엇인가?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 깊은 뜻을 정확히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참으로 정밀하고 오묘하여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많은 은혜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그 은혜가 소름을 끼칠 정도로 넘치고도 넘친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은 도무지 인간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위대하다.
본문은 주의 사자(26절), 성령(29절), 주의 영(39절)이 전도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언뜻 전도자 빌립에게만 성령이 간섭하신 것으로만 이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시가 병거 위에서 구약성경의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고 빌립이 그 구절로부터 시작해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내시가 마침 그런 구절을 읽고 있었던 것도 성령의 간섭이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 내시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 나아가 그 전에 유대교로 개종된 일 등등을 따져 나가면 그 내시의 일생을 성령이 내내 간섭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다 드디어 때가 되매 빌립과 특정한 방식으로 조우케 하였고 그 심령에 성령의 스파크가 일어나 복음의 불로 활활 타오르게 만든 것이다.
모든 과정이 우리 눈에는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만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필연이 개입되어 있었다. 우연의 일치가 많을수록 더 많은 필연이 작용한 것이다. 하나님의 완벽한 각본과 계획에 따라 일이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우연은 인간에게, 그렇게 바라는 데도, 행운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불행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더 많다. 우연이란 자기 쪽에 능동적인 원인과 결정과 시행이 없었는데도 의외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또 의외의 결과란 항상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다 이해가 안 되는 일 중에도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이해하기 힘들다. 좋은 일은 이왕에 행운이 도래했는데 따질 일이 뭐 그리 있어 하고는 금방 그 찾아온 행운을 즐긴다. 반면에 불행은 계속 따지고 염려하고 해결하려 애를 쓴다. 자연히 불행한 불청객이 더 괴롭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 법이다.
어쨌든 행이나 불행이나 상관없이 더 많은 우연 속에 하나님의 더 많은 필연이 포함되어 있다. 쉽게 말해 더 큰 환난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더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분에 대해 의심, 불평, 불신만 만들어 낸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불행한 우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말이다.
바꿔 말해 행, 불행을 막론하고 우연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빌립이 특정한 방식으로 전도 했다는 입장에서만 이 사건을 해석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내시의 일생에 간섭했던 하나님의 놀랍고도 오묘한 손길부터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빌립의 전도 방식 하나만 떼어서 바라보는 것은 인간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서 전도를 해드리려는 선한 의도가 있긴 하지만 자기도 빌립 같은 성령의 큰 권능을 누리고 싶다는 욕심도 개재되었을 수 있다. 성령의 역사는 전적으로 당신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이뤄진다. 내시의 입장을 포함해 사건의 전말을 전체적으로 보아야만 그런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또 그래야만 그분의 권능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을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일 뿐이다. 신자는 그분의 하시는 일에 동참을 하는 것이지, 자기 쪽에서 어떤 특정한 방식을 습득한 후에 그 방식을 사용해서 그분의 역사를 더 일으키게 할 수는 없다.
이 사건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간의 우연이자 하나님의 필연은 물론 내시가 읽고 있던 바로 그 성경 구절이었다. 하필이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내용을 빌립을 만난 바로 그 때에 읽고 있었고 또 그분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그대로 그 심령에 꽂힐 수 있도록 성령이 사전 정지 작업을 다 해놓은 셈이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사53:7,8) 지금은 어떤 사람이 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사건을 모르고 있던 내시로선 누구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큐라 백작의 비밀
신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으로 당하셨을 고통에 대해선 잘 이해한다. 인간이 고안해낸 처형 방법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고통이 심하다는 사실은 설교로나, 책으로나, 영화로나 익히 듣고 보아서 알고 있다.
그래서 주님이 내 대신 당하신 그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얻은 이 구원이 정말 얼마나 값지고 귀한지 모른다. 또 현실에서 어려운 고난이 닥쳐도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한다. 물론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에는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어쩌면 고통보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내시가 회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복음의 또 다른 큰 비밀이다.
사람을 산 채로 나무에 못 박아 죽이는 처형 방법은 고대 앗시리아, 페니키아, 애굽 등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었는데 칼타고 인들이 헬라와 로마에 전수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구전에 따르면 이사야 선지자는 톱에 켜서 순교 당했다고 한다. 둘 다 아주 고통스럽긴 해도 곧바로 혼절해버리는데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지나치면 나중에는 고통을 거의 못 느끼는 법이다. 반면에 십자가 처형의 고통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우선 예수님은 쇠나 뼈 조각이 붙은 가죽 채찍으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부터 맞았다. 몸에 짝짝 들어붙도록 물에 적셔서 때리는데다 쇠 조각이 몸에 박혔다가 빠져 나오면서 살점이 터져 나오고 피가 흐른다. 당신이 달릴 십자가 형틀을 형장까지 지고 가야 했다. 대개 세로 나무는 형장에 고정되어 있고 가로 나무만 들고 가지만 예수님은 어떤 경우인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양 손바닥과 엇비스듬히 교차해 묶은 발목에 큰 대못이 박힌다.
결국 서서히 피가 빠져 나가고 산소가 결핍되기 시작하면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프다. 한 마디로 절대 금방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3일은 그런 상태로 달려 있거나 심하면 일주일도 간다. 사막 기후의 뜨거운 낮과 너무 추운 밤이 교차되는 동안 주림과 갈증과 근육통이 더할 나위 없이 크다. 그 사이에 온갖 벌레가 온몸에 달라붙고, 들개는 뛰어 올라 발을 갉아 먹고, 새들도 눈알을 파먹기도 한다. 한 번 상상이라도 해보라. 그런 고통을 당하며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죄송하지만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싱싱했던 오징어가 덕장에서 말라 비비 틀리듯이 그렇게 죽어 가는 것이다.
로마 노예 반란을 그린 스팔타카스라는 오래 전 영화에 십자가 고통을 실감나게 설명해주는 한 장면이 나온다. 반란을 평정한 로마군 사령관이 포로로 잡힌 스팔타카스와 그 부관에게 칼을 주면서 싸워 이기는 자는 십자가 처형을 시키겠다고 명했다. 말하자면 이전에 학교나 군대에서 잘못한 자를 서로 뺨 때리기를 시키는 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 아무래도 상대에게 미안한 감이 들어서 서로 세게 때리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칼을 받아 쥐자마자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가 차라리 자기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 낫지 상대에게 십자가 처형의 고통만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큐라 흡혈귀 이야기는 지어낸 소설이다. 그러나 중세에 동구라파 지역에서 포악한 정치를 했던 동명의 실존인물을 모델로 삼은 것은 사실이다. 그 백작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하면, 적국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감옥의 죄수들을 전부 십자가에 매달아 적국이 쳐들어올 양쪽 길목에 길게 세워두었다. 적군은 너무나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광경에 그만 겁을 집어먹고는 싸울 엄두도 못 내고 퇴각해버렸다고 한다.
십자가는 그만큼 참혹한 처형이다. 마침 예수님은 처형 전에 온갖 심한 고통을 이미 겪었기에 보통보다 아주 빨리 죽었다. 또 양 무릎은 망치로 쳐서 부수어버리는데 예수님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메시아 하나님이 너무나 비참한 모습으로 나무에 오래 달려 있어서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대로 저주 받은 죽음이라고 오해할 것까지 미리 방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하나뿐인 독생자다. 아무 죄가 없으셨다. 당신이 제정한 율법으로 따져도 무죄였다. 아니 완벽하게 다 이루신 분이다. 외적으로는 안식일 제도를 위반했지만 오직 병자들을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또한 형식적으로는 어겼지만 내용적으로는 더 완전하게 준수한 셈이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광풍과 파도를 잠재우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아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다.
잡히시던 날 밤에도 제사장의 하속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베어버리자 오히려 손으로 만져 그 자리에서 낫게 하셨다. 열두 영도, 영은 오늘날로 치면 사단(師團)으로 육천 명의 군대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보내어 예루살렘 주둔 군 정도는 쉽게 무찌를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이사야의 예언대로 양과 같이 잠잠하셨다. 왜 그랬는가? 오직 우리 죄를 사해주려고 그런 고통을 감수하셨다.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우리의 죄와 고통이 해결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예수님 초상화
그런데 과연 우리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그 고통을 실감하는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비수로 도려내듯 한 적이 있는가? 혼과 영과 골수를 완전히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느꼈던 적이 있는가? 내가 정말로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절감했기에 정말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죽을 시늉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그런 적이 없으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히 논할 자격이 있는가? 아니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오히려 조금 낯간지러운 짓은 아닐까?
전도를 해보면 처음에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다가 항상 벽에 부딪히는 순간이 있다. 그 벽은 거의 모든 불신자에게 동일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과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며 그에 반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은 그런대로 인정한다. 예컨대 간음한 여인에게 함부로 돌을 먼저 덜질 만한 의인은 아무도 없다고 시인한다.
그러다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던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진리에 이르면 말문을 딱 봉해버린다. 마치 완전 정신 나간 자나 광신도 대하듯이 쳐다본다. 로마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뜻이다. 그렇다고 위와 같은 십자가의 고통을 말해줄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이지 자신의 죄와 직접 연관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부터는 왜 전도가 진전되지 않는가? 우선 죄로 인해 고통을, 아니 죄책감조차 제대로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 윤리적 죄는 알게 모르게 지었지만 가슴을 치며 하늘도 바라보지 못할 정도까지 죄의 추함과 더러움에 대해 실감해 본 적이 없다. 도리어 죄 안에서 즐기다 못해 탐닉해 허우적거리느라 흑암의 권세에 완전히 종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빛에 대해선 아예 눈을 가리고 쳐다볼 생각도 않는다. 인간이 죄에 묶인 존재라는 전도자의 설명에는 무슨 골치 아픈 소리 하느냐고 거꾸로 비아냥거린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로 죽을 수밖에 없는 신분이라고 말하면 더더욱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아니 죄로 인한 영원한 심판은 둘째 치고 육신의 사망마저 그리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기 혼자만은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한다. 자기 인생을 영원한 의미와 가치로 채워볼 엄두는 아예 내지도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안일과 쾌락과 풍요와 사치만 추구한다. 그 외의 일에 조금이라도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면 완전한 낭비라고 간주한다.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영적 존재에 대해선 아예 부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을 묶고 있던 사단의 멍에를 다 끊었다는 설명은 오히려 미신적 맹신적 수사로 치부해 버린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귀신이 씨 나락 까먹는 소리로도 여기지 않는다. 자기들의 모든 행동, 말, 사고가 사단에게 조종 농락되고 있다는 사실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저 법만 어기지 않고 남에게 고의로 큰 피해만 주지 않으면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에게 정작 죽어야 할 자인 당신 대신에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면 대화가 곧바로 막힐 수밖에 없다.
본문의 내시도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자라면 틀림없이 학식, 교양, 지성, 인품이 당대의 최고 수준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죄에 대해 심각히 고민했거나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리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는 빌립이 전한 복음 앞에 바로 무릎 꿇고 세례까지 받았다. 십자가에 또 다른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최고의 고통 뿐 아니라 역사상 최고의 수치도 당했다는 점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복종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빌2:6-8) 교리적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한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하는 너무나 부끄러운 꼴을 당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누어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9:23,24)
한 마디로 예수님은 완전히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달렸다. 당시 유대인들의 옷차림은 겉옷, 속옷, 허리띠, 샌들에다 마지막 속옷이 전부였다. 또 로마 군대의 분대는 4명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군사 네 명이 각기 종류별로 하나씩 차지한 후에 맨몸을 감싸는 마지막 속옷까지 제비 뽑았다. 당연히 몸에 걸친 조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림이나 영화의 장면은 차마 사실대로 묘사할 수는 없어서 점잖고 고상하게 바꾼 것이다.
온 몸에 피가 흐르는 가운데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발가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아니 내가 그 자리에 바로 그런 모습으로 달렸다고 가정해보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일반인도 겪지 못할 너무나 큰 수치를 당했다. 십자가 처형은 너무나 처참한 고통에다 수치스런 모습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선 노예와 이방인들에게만 시행했다. 로마 시민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고통도 고통이지만 수치 때문에라도 십자가 처형만은 면제 받았던 것이다.
인간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과 환난과 죄를 다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는 복음이 크게 실감나지 않는 가장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내가 아직 큰 고통이나 이해할 수 없는 환난을 겪었거나 심각하리만큼 큰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거해야만 할 치명적 잘못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여기는데 어찌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하랴. 나아가 오히려 죄를 즐기며 내 인생을 내가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꾸려나가기에 하나님조차 필요 없다고 믿는데 예수님은 말해 무엇 하리요.
솔직히 말해 사람들은 돈이 부족하거나 병에 걸리는 것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은 의외로 잘 견뎌낸다. 삶을 살아가는 목표가 바로 현실에서의 안락과 형통인데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겨내는 것이 몸에 배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그럭저럭 잘 꾸려 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또 어려움도 자꾸 겪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나중에는 어지간한 어려움도 별로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정작 모든 인간이 가장 못 참고 괴로워하는 아픔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마디로 수치다. 체면과 자존심을 구겼다는 부끄러움은 죽기보다 싫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가슴은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입안은 점점 타들어가고 급기야 골수까지 말라 들어가는 것 같다. 부끄러움을 당케 만든 상대에 대한 분노가 악독과 저주로 변해 가슴 한 복판에 깊은 앙금으로 남게 된다. 그 어느 것으로도 그 수치를 매울 길이 없다. 상대에게 금전적 보상과 백배 사죄를 받아도 이미 부끄러웠던 그 사건은 엎질러진 물로서 지울 길이 없다.
아무리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완악한 불신자라도 죄로 인해 영적 고통은 겪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심령의 수치심은 느낀다. 행동으로 법을 위반한 죄는 세상 법정에서 형벌을 받으면 죄책감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고 인간관계에서 멸시와 소외를 겪기 마련이다. 말로서 범한 거짓말 같은 죄는 반드시 부정적 결과를 맺으며 자기 자랑이나 교만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말도 그 열매로 반드시 벌을 받는다. 나아가 배상할 것이 별로 없어도 사람들 사이에 따돌림을 당하는 수치는 피할 길이 없다.
생각으로 짓는 죄나 영혼 속에 좌정하고 있는 죄는 수치와 더 직결된다.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판단이나 정죄 받지 않아도 또 따로 사죄하여 용서를 구할 상대 피해자가 없어도 그렇다. 오히려 수치심은 가장 심각하다. 예컨대 마음으로는 수시로 친구의 아내와 간음하거나 형제나 부모마저 살해한다.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도 도무지 용서가 안 된다. 자꾸만 자기 자신이 싫어지고 미워지다 못해 차라리 부인하거나 죽여 버리고 싶을 때도 생긴다. 차마 그럴 수는 없으니까 자신의 내면을 솔직히 파고들어가 그 실체를 점검하는 일은 아예 하지 않으려 한다. 너무나 비참한 자신의 영적 실체를 일부러 부인, 외면, 망각하려 드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도 모든 인간은 영적 시체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어떤 죄도 그 수치심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인간의 내면의 진짜 실체는 너무나 추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모습뿐이라는 뜻이다.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인간의 영적 실체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마저 그렇다. 다른 사람의 침실로 붙들려 들어가게 될 것을 빤히 알고도 목숨만 부지하려고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비겁하게 속였고, 형제끼리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살인을 일삼고, 두 딸이 아비를 술에 취하게 해놓고 번갈아 성관계를 가졌고, 비록 자신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으려는 목적이었지만 며느리 다말이 창녀 행세를 해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득남하였고, 왕이 전쟁에 나간 충직한 부하의 아내와 통간하고는 그 부하마저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게 만드는 등 도무지 낯 뜨거운 이야기로 가득 찼다. 성경에 온갖 더럽고 추잡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도,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국 신문에 너무나 추한 이야기가 실렸다. 삼촌과 친오빠에게 번갈아가며 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이 도저히 견디다 못해 자기 일기장을 들고 두 사람을 경찰에 고발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싶은가? 아직 순진한 생각이다. 인간이 거주한 장소와 시대에선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성폭행한 삼촌과 오빠는 감옥에 가서 응분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학생이 당한 수치와 자괴감은 영혼을 완전히 물들여 도무지 지울 길이 없을 것 아닌가?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하소연하며 보상 받을 수 있는가? 아니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제발 자신의 내면을 원상태로만 돌려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예 불가능하다. 정신과 치료, 인격도야, 성격개조, 마인드컨트롤, 취미활동이나 스포츠, 그 어떤 것으로 그 수치를 평생토록 씻을 길이 없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곤 없다. 순전히 피해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끄럽고 죄책감마저 들며 자기 스스로 자기가 싫어지고 더럽게 여겨지는 것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런 수치까지 예수님은 다 짊어지셨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께서 홀딱 벗은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특별히 그 잘나고 똑똑한 유대 제사장들과 율법사들과 로마의 군병들 앞에 드러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 앞에, 3년간 동고동락한 제자들 앞에, 나아가 당신을 끝까지 따른 몇몇 여인네들 앞에까지 그런 모습으로 달려야만 했다.
최고 높은 군왕에서 최고 낮은 종과 노예까지 예수님의 부끄러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부모, 형제, 친구 들 앞에까지 당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인 까닭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해결해 줄 수 없는, 심지어 그들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부끄러움이 다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자신이 싫고 미워지는 부끄러움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다. 예수님이 최고의 수치를 당함으로써 죄악이 들끓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인간끼리 주고받는 수치심, 자괴감, 모멸감 등을 온전히 대신 당하고 죽으셨던 것이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수치는?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권력, 재물, 명예, 건강 등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질 것 없었다. 단 한 가지 부끄러운 허물 말고는 말이다. 바로 고자라는 사실이다. 평생을 두고도 정상적 결혼을 통해 친 자식을 가질 수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오히려 아주 위엄 있어 보여도 자기 내면의 너무나 큰 부끄러움을 지울 길이 없었다. 부모도 여왕이라도 자기에게 참된 위로와 평강을 줄 수 없었다.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소망은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온전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한 것만 봐도 그의 소망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그는 에디오피아의 유대인들에게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간섭하시어 온갖 이적으로 그들을 보호 인도하셨고 또 거룩한 율법을 주셨음을 익히 배워서 알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하나님이야말로 정말 믿고 따를만한 참 신임을 확신하고 유대교로 개종 내지 입문했을 것이다. 나아가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소지하고서 숙독하는 가운데 메시아가 와서 모든 이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일생의 소망으로 간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큰맘 먹고, 틀림없이 여왕에게 특별허가를 받아서, 예루살렘 성전에 경배하러 간 것이 오히려 더 화근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정식으로 개종 절차를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가 성전에서 받았을 대우가 어떠했겠는가? 그는 이방인이었다. 거기다 고자였다.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1) 고자인 그는 성전 입구에서 이방인의 뜰에조차 발을 디디지 못하고 바로 쫓겨났을 것이다. 아무리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아도 돈으로 예배를 살 수는 없다. 설령 그럴 수 있었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예배다. 더러운 돈은 절대 받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내침을 당할 뿐이다.
자신의 인생의 참 소망으로 붙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오히려 쫓김을 당한 것이다. 성전에서 배척 당한 그의 심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절한 절망감과 한 나라의 고관으로서 생전 처음 겪는 창피로 인한 수치심으로 뒤엉켰을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어디를 여행 중인가? 생명의 씨가 없는 고자가 물과 풀과 생명이 없는 사막 길을 횡단하고 있다. 그의 심령이 자연히 더 착잡해지고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그가 소망을 걸 대상은 장차 오실 메시아뿐이었다. 그분이 오시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꺼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그 날에 땅 끝에서부터 모든 사람을 불러서 그 눈물을 닦아 주시고 소경의 눈을 밝히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준다는 그분 말고는 소망이 없었다. 그의 심령에 메시아 예언이 더 절실히 다가왔을 것이다. 우연히 읽게 된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간섭이긴 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가장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는 구절이었다.
분명 메시아가 오시면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기에 우리가 평화와 나음과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지 않은가 말이다. 과연 이분이 이미 오셨는가? 이사야 본인인가 아니면 앞으로 오실 어떤 이인가? 그럼 대체 언제 어떻게 오시는가? 일생일대의 궁금증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경배를 최고의 소망으로 삼았지만 무참히 실패했다. 그로선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를 만나지 못하면, 최소한 제대로 알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앞으로 살아갈 의미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런 약속 모두가 엉터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온갖 영적 갈증과 의아심이 증폭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눈앞에 빌립이 홀연히 나타났다. 성경의 기록을 보라.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절) 너무나 신기하고 오묘한 기록이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미하고 완벽한 성령의 전도였다. 적시에 복음을 전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라고 했다.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최소한 두 가지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글은 물론 이사야서 53장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이사야서를 계속 읽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어떤 구절을 만나는지 보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56:3-5)
절망에 빠진 내시의 현재 신세와 심경을 정확하게 그대로 묘사하고 있지 않는가? 이방인과 고자라도 당신의 백성에서 갈리지 않을 것이며 마른 나무(사막의 덤불 같은)라고 신세 한탄하지 말라는 것이다. 메시아가 와서 영영한 이름을 주어 절대 끊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가? 이보다 더 큰 소망을 심어줄 구절이 어디 있겠는가? 틀림없이 내시는 빌립에게 그간의 사정을 말했을 것이다. 빌립은 바로 이 구절까지 성경을 풀어 설명하고 난 후에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더 강하게 붙들라고 권했을 것이다. 너무나 놀랍지 않는가?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런 직후에 얼마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해 주면서 예수님을 소개했을 것이다. 정작 당신이 찾아가야 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이었다고 깨우쳐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 되시는 그분이 바로 온 천하에 남성의 생식기를 훤히 다 드러내시는 수치까지 겪으시고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또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생식기가 제거된 이 내시에게만은 예수님이 벌거벗겨져 당신의 생식기를 드러내며 최고로 수치스런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바로 자신이 그곳에 달린 실제적 체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그런 설명을 듣는 순간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완전히 겸비하게 엎드렸을 것이다.
“주여! 이제는 내가 고자인 것이 더 이상 나의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마른 나무가 아닙니다. 주님께 영원한 새 생명을 받게 되었음을 확신합니다. 내 평생의 수치를 당신께서 다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물을 발견하자마자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36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예수를 통해 평생의 수치가 비로소 완전히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내시의 수치는 율법에 따른 동물 희생 제사로는 절대 제거되지 않고 또 될 수도 없었던 수치였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가장 참혹한 죽음 가운데 가장 부끄러운 죽음이 함께 했기에 이 내시의 심령에 성령의 역사가 불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전경배에서 배척당한 것이 오히려 그에겐 유익이자 구원 얻을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틀림없이 그는 돌아가 에디오피아에 아프리카 최초로 교회를 설립했을 것이며 그래서 더더욱 그의 이름이 지금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영영히 끊치지 않게 된 것이다.
개인적 수치까지 제거 받았는가?
참고로 오늘의 본문은 기독교 역사적으로도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성경비평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고도로 성행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지은 저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기에 틀림없이 그 부분은 (40-66장까지 메시아 예언 부분을 통 털어서) 이미 모든 경과를 알게 된 후대 사람들이 첨가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비평이 절정에 이를 즈음인 1940년대에 사해사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예수님 이전에 현재와 똑 같은 이사야서가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혹시라도 사해사본 자체의 연대가 의심스럽다 해도, 본문 또한 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지 않는가? 문제의 이사야서 53장을 읽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즉,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닌 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경배하러 왔다가 퇴자를 맞고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였지 않는가? 골고다 십자가 사건을 전혀 모르는 예수님 당대의 이방인 유대교인이 현재와 동일한 이사야서를 읽고 믿고 있었다. 이 이상 성경이 인간 저작이라는 비평을 잠재울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 않는가?
이사야는 주전 약 700년경 사람이었고, 또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라고 예언한(시22:18) 다윗은 주전 약 천년 경 인물이었다. 너무나 세밀한 예언이자 완벽한 성취이지 않는가? 아니 본문의 에디오피아 내시 사건을 찬찬히 다시 따져 보라. 얼마나 놀랍고도 오묘한 섭리인가? 오히려 성경이 인간의 저작이고 예수는 인간 랍비에 불과했다는 것이 더 안 믿어지는 주장 아닌가?
성경에 나오는 고자, 소경, 귀머거리, 문둥병자, 앉은뱅이, 혈루병자, 과부, 창녀, 고아, 이방인, 죄인, 세리를 비롯해 오늘날도 친오빠와 삼촌에게 성폭행 당한 여학생 등 자신만의 수치에 떨며 괴로워하는 인간 군상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지금 이 자리에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부터 그 솔직한 내면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할 부끄러움이 가득하지 않은가? 또 그 부끄러움의 대부분은 사실상 죄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모든 죄에 대해 피의 대속을 이루셨다. 동시에 너무나 수치스런 죽음으로 우리의 온갖 수치까지 제거해 주셨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회심이 바로 우리의 회심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이 진리가 이해가 되는가? 아니 그런 구원의 생생한 체험이 있는가? 그처럼 내가 세례 받음에 즉, 예수님을 나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심에 거리낌이 더 이상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혹시라도 아직도 예수님이 나하고 별로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스스로 죄책감을 크게 못 느끼며 평생을 법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만은 죽음과는 크게 상관없을 것처럼 여기거나 최소한 언젠가 냉동인간으로 인간을 소생시켜 줄만큼 발달할 과학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단은 이 땅의 물질계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의 풍요만 추구하는 인간을 훼방하지 않기, 아니 때로는 적극적으로 형통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찾지 않으면 사단은 오히려 현실의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가만히 놓아두어도 저절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올 것을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죄의식이 없어서 예수와는 거리가 먼 그 어떤 자라도 자기만 갖고 있는 부끄러운 내면만은 절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에게 들키기는 정말 싫은 부끄러운 짓을 자행했거나, 지금도 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없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나아가 죄 많고 한 많은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살다보니 온갖 상처와 수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최소한 자존심과 체면이 상해 밤새 잠 못 이루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다. 모든 치부를 드러내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만이 그 답답한 가슴을 뚫어 줄 수 있다.
부끄러움은 절대 스스로 발생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반드시 어떤 형태가 되었든 죄와 연결되어 있다. 또 죄는 부끄러움 뿐 아니라 까닭 모를 두려움도 반드시 수반한다. 죄의 벌을 받아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씻어내어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의 형벌과 배상과 사죄만으로는 절대로 부족하다. 죄책감, 수치심, 모멸감, 상처, 두려움 모두 인간의 영혼에서 발생하고 자리 잡고 자라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 역사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와 의로움이 아니고는 인간의 내면을 깨끗케 해서 평강과 자유를 줄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 오셔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셨다. 그분의 대속 사역을 온전히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십자가의 또 다른 비밀을 너무나 소중하게 간직하며 평생을 두고 감사해야 한다. 그분이 먼저 당신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까지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시며 우리의 수치를 제거 해주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 온자는 고자라도 자신을 마른 나무라고 말할 수 없고 말해선 안 된다. 이미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고 앞으로도 더 풍성히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선 어느 누구도 감히 의인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지만, 그분을 이미 영접한 자는 감히 아직도 내가 죄인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그분께 예배드리러 나온 여러분의 경우는 모든 죄와 함께 그 결과로 따라오는 수치와 공포도 실질적으로 제거 되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로서의 동의와 믿음에 그쳐선 안 된다.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이 과연 예수가 누구인지, 그분이 나와 실질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확실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해답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분과 교제함에 어떤 거리낌도 없어야 한다. 여러분은 죄만 용서 받았는가? 수치와 두려움까지 십자가 앞에 완전히 내려놓았는가?
8/4/2009
유타대학촌교회 12/8/1996 주일 설교를 정리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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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 (3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수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없음)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26-40)
이상한 사람만 만난 빌립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하는 중에 사마리아에선 성령의 권능까지 돈으로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을 만났다. 그런데 이제 에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나 전도하게 된다. 그것도 천사가 나타나서 광야까지 가라고 해서 만난 사람이 그렇다. 이왕이면 왕, 귀족, 제사장, 학자, 재력가, 장군 등 고상하고 박식하며 권세를 가진 지도층을 전도해야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끼칠 텐데도, 하나님의 인도는 이상하기만 하다.
몰라서 하는 말이다. 돈, 권세, 지성, 명예 등을 갖춘 사람들은 아쉬울 것이 별로 없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지 않는다. 항상 자기가 잘나서 그런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고 착각한다. 자존심과 체면과 자기 의가 가장 강한 자들이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는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깨트려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복음인데, 내면에 철옹성을 쌓고 있는 자에게는 전도가 너무나 힘들뿐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독교 복음은 현실적 어려움에서 구해주거나 형통을 보장하는 수단이 결코 아니다. 역으로 따져 세도가를 통해 복음이 더 잘 전해지리라 추측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가 가진 세도가 부러워서 믿게 된다는 뜻이다. 그럼 전해진 복음이 다른 복음이거나 그렇게 오해하게 된다.
반면에 만약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자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 이유는 당연히 현실적 필요가 아니라 영적인 가난함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개인의 영적 가난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과는 무관하다. 복음이 우선적으로 전해져야 할 순서는 영혼이 얼마나 가난한지 여부뿐이다. 하나님을 가장 목말라하는 자가 가장 먼저 그분의 은혜를 입게 된다.
그리고 사실은 고대 사회에서 내시는 왕의 최측근인지라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본문의 내시도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많아 큰 권세가 있다고 했다.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에까지 왔다갈 정도의 신분이면 지금으로 치면 거의 대통령비서실장급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빌립더러 그런 세도가를 만나게 해서 복음을 쉽고도 빨리 퍼지게 하려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근본 목적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일은 산술적 효율성과는 무관하게 오직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이뤄질 뿐이다.
본문은 오히려 세상에서 통하는 권력, 가문, 학식, 재력, 외모 등이 복음 전파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명백한 실례로 기록된 것이다. 복음 자체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 아니라, 빌립이 내시를 만나게 된 계기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시작한 전도로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시켰다면 인간적인 계산, 추측, 예상, 기대는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마리아에 있던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멀리 유다의 광야까지 급히 불러내었다. 가사는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약 70 키로의 지점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사마리아가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니 빌립이 출발한 곳에서 치면 상당한 거리를 더 가야 했다. 그로선 과연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는 채 오직 주의 사자의 명령에 순종했다. 성령에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런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들어 쓰지도 않는다. 즉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 당신의 때와 방법에 따라 구원을 주시기 위해 당신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 것이다.
우연의 일치는 하나님의 각본
빌립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만드신 뜻은 과연 무엇인가?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 깊은 뜻을 정확히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참으로 정밀하고 오묘하여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많은 은혜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그 은혜가 소름을 끼칠 정도로 넘치고도 넘친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은 도무지 인간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위대하다.
본문은 주의 사자(26절), 성령(29절), 주의 영(39절)이 전도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언뜻 전도자 빌립에게만 성령이 간섭하신 것으로만 이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시가 병거 위에서 구약성경의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고 빌립이 그 구절로부터 시작해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내시가 마침 그런 구절을 읽고 있었던 것도 성령의 간섭이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 내시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 나아가 그 전에 유대교로 개종된 일 등등을 따져 나가면 그 내시의 일생을 성령이 내내 간섭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다 드디어 때가 되매 빌립과 특정한 방식으로 조우케 하였고 그 심령에 성령의 스파크가 일어나 복음의 불로 활활 타오르게 만든 것이다.
모든 과정이 우리 눈에는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만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필연이 개입되어 있었다. 우연의 일치가 많을수록 더 많은 필연이 작용한 것이다. 하나님의 완벽한 각본과 계획에 따라 일이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우연은 인간에게, 그렇게 바라는 데도, 행운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불행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더 많다. 우연이란 자기 쪽에 능동적인 원인과 결정과 시행이 없었는데도 의외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또 의외의 결과란 항상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다 이해가 안 되는 일 중에도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이해하기 힘들다. 좋은 일은 이왕에 행운이 도래했는데 따질 일이 뭐 그리 있어 하고는 금방 그 찾아온 행운을 즐긴다. 반면에 불행은 계속 따지고 염려하고 해결하려 애를 쓴다. 자연히 불행한 불청객이 더 괴롭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 법이다.
어쨌든 행이나 불행이나 상관없이 더 많은 우연 속에 하나님의 더 많은 필연이 포함되어 있다. 쉽게 말해 더 큰 환난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더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분에 대해 의심, 불평, 불신만 만들어 낸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불행한 우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말이다.
바꿔 말해 행, 불행을 막론하고 우연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빌립이 특정한 방식으로 전도 했다는 입장에서만 이 사건을 해석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내시의 일생에 간섭했던 하나님의 놀랍고도 오묘한 손길부터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빌립의 전도 방식 하나만 떼어서 바라보는 것은 인간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서 전도를 해드리려는 선한 의도가 있긴 하지만 자기도 빌립 같은 성령의 큰 권능을 누리고 싶다는 욕심도 개재되었을 수 있다. 성령의 역사는 전적으로 당신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이뤄진다. 내시의 입장을 포함해 사건의 전말을 전체적으로 보아야만 그런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또 그래야만 그분의 권능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을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일 뿐이다. 신자는 그분의 하시는 일에 동참을 하는 것이지, 자기 쪽에서 어떤 특정한 방식을 습득한 후에 그 방식을 사용해서 그분의 역사를 더 일으키게 할 수는 없다.
이 사건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간의 우연이자 하나님의 필연은 물론 내시가 읽고 있던 바로 그 성경 구절이었다. 하필이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내용을 빌립을 만난 바로 그 때에 읽고 있었고 또 그분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그대로 그 심령에 꽂힐 수 있도록 성령이 사전 정지 작업을 다 해놓은 셈이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사53:7,8) 지금은 어떤 사람이 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사건을 모르고 있던 내시로선 누구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큐라 백작의 비밀
신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으로 당하셨을 고통에 대해선 잘 이해한다. 인간이 고안해낸 처형 방법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고통이 심하다는 사실은 설교로나, 책으로나, 영화로나 익히 듣고 보아서 알고 있다.
그래서 주님이 내 대신 당하신 그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얻은 이 구원이 정말 얼마나 값지고 귀한지 모른다. 또 현실에서 어려운 고난이 닥쳐도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한다. 물론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에는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어쩌면 고통보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내시가 회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복음의 또 다른 큰 비밀이다.
사람을 산 채로 나무에 못 박아 죽이는 처형 방법은 고대 앗시리아, 페니키아, 애굽 등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었는데 칼타고 인들이 헬라와 로마에 전수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구전에 따르면 이사야 선지자는 톱에 켜서 순교 당했다고 한다. 둘 다 아주 고통스럽긴 해도 곧바로 혼절해버리는데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지나치면 나중에는 고통을 거의 못 느끼는 법이다. 반면에 십자가 처형의 고통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우선 예수님은 쇠나 뼈 조각이 붙은 가죽 채찍으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부터 맞았다. 몸에 짝짝 들어붙도록 물에 적셔서 때리는데다 쇠 조각이 몸에 박혔다가 빠져 나오면서 살점이 터져 나오고 피가 흐른다. 당신이 달릴 십자가 형틀을 형장까지 지고 가야 했다. 대개 세로 나무는 형장에 고정되어 있고 가로 나무만 들고 가지만 예수님은 어떤 경우인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양 손바닥과 엇비스듬히 교차해 묶은 발목에 큰 대못이 박힌다.
결국 서서히 피가 빠져 나가고 산소가 결핍되기 시작하면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프다. 한 마디로 절대 금방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3일은 그런 상태로 달려 있거나 심하면 일주일도 간다. 사막 기후의 뜨거운 낮과 너무 추운 밤이 교차되는 동안 주림과 갈증과 근육통이 더할 나위 없이 크다. 그 사이에 온갖 벌레가 온몸에 달라붙고, 들개는 뛰어 올라 발을 갉아 먹고, 새들도 눈알을 파먹기도 한다. 한 번 상상이라도 해보라. 그런 고통을 당하며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죄송하지만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싱싱했던 오징어가 덕장에서 말라 비비 틀리듯이 그렇게 죽어 가는 것이다.
로마 노예 반란을 그린 스팔타카스라는 오래 전 영화에 십자가 고통을 실감나게 설명해주는 한 장면이 나온다. 반란을 평정한 로마군 사령관이 포로로 잡힌 스팔타카스와 그 부관에게 칼을 주면서 싸워 이기는 자는 십자가 처형을 시키겠다고 명했다. 말하자면 이전에 학교나 군대에서 잘못한 자를 서로 뺨 때리기를 시키는 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 아무래도 상대에게 미안한 감이 들어서 서로 세게 때리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칼을 받아 쥐자마자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가 차라리 자기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 낫지 상대에게 십자가 처형의 고통만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큐라 흡혈귀 이야기는 지어낸 소설이다. 그러나 중세에 동구라파 지역에서 포악한 정치를 했던 동명의 실존인물을 모델로 삼은 것은 사실이다. 그 백작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하면, 적국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감옥의 죄수들을 전부 십자가에 매달아 적국이 쳐들어올 양쪽 길목에 길게 세워두었다. 적군은 너무나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광경에 그만 겁을 집어먹고는 싸울 엄두도 못 내고 퇴각해버렸다고 한다.
십자가는 그만큼 참혹한 처형이다. 마침 예수님은 처형 전에 온갖 심한 고통을 이미 겪었기에 보통보다 아주 빨리 죽었다. 또 양 무릎은 망치로 쳐서 부수어버리는데 예수님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메시아 하나님이 너무나 비참한 모습으로 나무에 오래 달려 있어서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대로 저주 받은 죽음이라고 오해할 것까지 미리 방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하나뿐인 독생자다. 아무 죄가 없으셨다. 당신이 제정한 율법으로 따져도 무죄였다. 아니 완벽하게 다 이루신 분이다. 외적으로는 안식일 제도를 위반했지만 오직 병자들을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또한 형식적으로는 어겼지만 내용적으로는 더 완전하게 준수한 셈이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광풍과 파도를 잠재우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아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다.
잡히시던 날 밤에도 제사장의 하속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베어버리자 오히려 손으로 만져 그 자리에서 낫게 하셨다. 열두 영도, 영은 오늘날로 치면 사단(師團)으로 육천 명의 군대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보내어 예루살렘 주둔 군 정도는 쉽게 무찌를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이사야의 예언대로 양과 같이 잠잠하셨다. 왜 그랬는가? 오직 우리 죄를 사해주려고 그런 고통을 감수하셨다.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우리의 죄와 고통이 해결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예수님 초상화
그런데 과연 우리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그 고통을 실감하는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비수로 도려내듯 한 적이 있는가? 혼과 영과 골수를 완전히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느꼈던 적이 있는가? 내가 정말로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절감했기에 정말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죽을 시늉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그런 적이 없으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히 논할 자격이 있는가? 아니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오히려 조금 낯간지러운 짓은 아닐까?
전도를 해보면 처음에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다가 항상 벽에 부딪히는 순간이 있다. 그 벽은 거의 모든 불신자에게 동일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과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며 그에 반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은 그런대로 인정한다. 예컨대 간음한 여인에게 함부로 돌을 먼저 덜질 만한 의인은 아무도 없다고 시인한다.
그러다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던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진리에 이르면 말문을 딱 봉해버린다. 마치 완전 정신 나간 자나 광신도 대하듯이 쳐다본다. 로마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뜻이다. 그렇다고 위와 같은 십자가의 고통을 말해줄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이지 자신의 죄와 직접 연관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부터는 왜 전도가 진전되지 않는가? 우선 죄로 인해 고통을, 아니 죄책감조차 제대로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 윤리적 죄는 알게 모르게 지었지만 가슴을 치며 하늘도 바라보지 못할 정도까지 죄의 추함과 더러움에 대해 실감해 본 적이 없다. 도리어 죄 안에서 즐기다 못해 탐닉해 허우적거리느라 흑암의 권세에 완전히 종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빛에 대해선 아예 눈을 가리고 쳐다볼 생각도 않는다. 인간이 죄에 묶인 존재라는 전도자의 설명에는 무슨 골치 아픈 소리 하느냐고 거꾸로 비아냥거린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로 죽을 수밖에 없는 신분이라고 말하면 더더욱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아니 죄로 인한 영원한 심판은 둘째 치고 육신의 사망마저 그리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기 혼자만은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한다. 자기 인생을 영원한 의미와 가치로 채워볼 엄두는 아예 내지도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안일과 쾌락과 풍요와 사치만 추구한다. 그 외의 일에 조금이라도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면 완전한 낭비라고 간주한다.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영적 존재에 대해선 아예 부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을 묶고 있던 사단의 멍에를 다 끊었다는 설명은 오히려 미신적 맹신적 수사로 치부해 버린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귀신이 씨 나락 까먹는 소리로도 여기지 않는다. 자기들의 모든 행동, 말, 사고가 사단에게 조종 농락되고 있다는 사실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저 법만 어기지 않고 남에게 고의로 큰 피해만 주지 않으면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에게 정작 죽어야 할 자인 당신 대신에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면 대화가 곧바로 막힐 수밖에 없다.
본문의 내시도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자라면 틀림없이 학식, 교양, 지성, 인품이 당대의 최고 수준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죄에 대해 심각히 고민했거나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리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는 빌립이 전한 복음 앞에 바로 무릎 꿇고 세례까지 받았다. 십자가에 또 다른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최고의 고통 뿐 아니라 역사상 최고의 수치도 당했다는 점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복종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빌2:6-8) 교리적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한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하는 너무나 부끄러운 꼴을 당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누어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9:23,24)
한 마디로 예수님은 완전히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달렸다. 당시 유대인들의 옷차림은 겉옷, 속옷, 허리띠, 샌들에다 마지막 속옷이 전부였다. 또 로마 군대의 분대는 4명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군사 네 명이 각기 종류별로 하나씩 차지한 후에 맨몸을 감싸는 마지막 속옷까지 제비 뽑았다. 당연히 몸에 걸친 조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림이나 영화의 장면은 차마 사실대로 묘사할 수는 없어서 점잖고 고상하게 바꾼 것이다.
온 몸에 피가 흐르는 가운데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발가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아니 내가 그 자리에 바로 그런 모습으로 달렸다고 가정해보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일반인도 겪지 못할 너무나 큰 수치를 당했다. 십자가 처형은 너무나 처참한 고통에다 수치스런 모습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선 노예와 이방인들에게만 시행했다. 로마 시민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고통도 고통이지만 수치 때문에라도 십자가 처형만은 면제 받았던 것이다.
인간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과 환난과 죄를 다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는 복음이 크게 실감나지 않는 가장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내가 아직 큰 고통이나 이해할 수 없는 환난을 겪었거나 심각하리만큼 큰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거해야만 할 치명적 잘못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여기는데 어찌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하랴. 나아가 오히려 죄를 즐기며 내 인생을 내가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꾸려나가기에 하나님조차 필요 없다고 믿는데 예수님은 말해 무엇 하리요.
솔직히 말해 사람들은 돈이 부족하거나 병에 걸리는 것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은 의외로 잘 견뎌낸다. 삶을 살아가는 목표가 바로 현실에서의 안락과 형통인데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겨내는 것이 몸에 배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그럭저럭 잘 꾸려 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또 어려움도 자꾸 겪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나중에는 어지간한 어려움도 별로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정작 모든 인간이 가장 못 참고 괴로워하는 아픔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마디로 수치다. 체면과 자존심을 구겼다는 부끄러움은 죽기보다 싫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가슴은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입안은 점점 타들어가고 급기야 골수까지 말라 들어가는 것 같다. 부끄러움을 당케 만든 상대에 대한 분노가 악독과 저주로 변해 가슴 한 복판에 깊은 앙금으로 남게 된다. 그 어느 것으로도 그 수치를 매울 길이 없다. 상대에게 금전적 보상과 백배 사죄를 받아도 이미 부끄러웠던 그 사건은 엎질러진 물로서 지울 길이 없다.
아무리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완악한 불신자라도 죄로 인해 영적 고통은 겪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심령의 수치심은 느낀다. 행동으로 법을 위반한 죄는 세상 법정에서 형벌을 받으면 죄책감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고 인간관계에서 멸시와 소외를 겪기 마련이다. 말로서 범한 거짓말 같은 죄는 반드시 부정적 결과를 맺으며 자기 자랑이나 교만하거나 시기 질투하는 말도 그 열매로 반드시 벌을 받는다. 나아가 배상할 것이 별로 없어도 사람들 사이에 따돌림을 당하는 수치는 피할 길이 없다.
생각으로 짓는 죄나 영혼 속에 좌정하고 있는 죄는 수치와 더 직결된다.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판단이나 정죄 받지 않아도 또 따로 사죄하여 용서를 구할 상대 피해자가 없어도 그렇다. 오히려 수치심은 가장 심각하다. 예컨대 마음으로는 수시로 친구의 아내와 간음하거나 형제나 부모마저 살해한다.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도 도무지 용서가 안 된다. 자꾸만 자기 자신이 싫어지고 미워지다 못해 차라리 부인하거나 죽여 버리고 싶을 때도 생긴다. 차마 그럴 수는 없으니까 자신의 내면을 솔직히 파고들어가 그 실체를 점검하는 일은 아예 하지 않으려 한다. 너무나 비참한 자신의 영적 실체를 일부러 부인, 외면, 망각하려 드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도 모든 인간은 영적 시체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어떤 죄도 그 수치심은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인간의 내면의 진짜 실체는 너무나 추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모습뿐이라는 뜻이다.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인간의 영적 실체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마저 그렇다. 다른 사람의 침실로 붙들려 들어가게 될 것을 빤히 알고도 목숨만 부지하려고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비겁하게 속였고, 형제끼리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살인을 일삼고, 두 딸이 아비를 술에 취하게 해놓고 번갈아 성관계를 가졌고, 비록 자신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으려는 목적이었지만 며느리 다말이 창녀 행세를 해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득남하였고, 왕이 전쟁에 나간 충직한 부하의 아내와 통간하고는 그 부하마저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게 만드는 등 도무지 낯 뜨거운 이야기로 가득 찼다. 성경에 온갖 더럽고 추잡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도,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국 신문에 너무나 추한 이야기가 실렸다. 삼촌과 친오빠에게 번갈아가며 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이 도저히 견디다 못해 자기 일기장을 들고 두 사람을 경찰에 고발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싶은가? 아직 순진한 생각이다. 인간이 거주한 장소와 시대에선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성폭행한 삼촌과 오빠는 감옥에 가서 응분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학생이 당한 수치와 자괴감은 영혼을 완전히 물들여 도무지 지울 길이 없을 것 아닌가?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하소연하며 보상 받을 수 있는가? 아니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제발 자신의 내면을 원상태로만 돌려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예 불가능하다. 정신과 치료, 인격도야, 성격개조, 마인드컨트롤, 취미활동이나 스포츠, 그 어떤 것으로 그 수치를 평생토록 씻을 길이 없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곤 없다. 순전히 피해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끄럽고 죄책감마저 들며 자기 스스로 자기가 싫어지고 더럽게 여겨지는 것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런 수치까지 예수님은 다 짊어지셨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께서 홀딱 벗은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특별히 그 잘나고 똑똑한 유대 제사장들과 율법사들과 로마의 군병들 앞에 드러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 앞에, 3년간 동고동락한 제자들 앞에, 나아가 당신을 끝까지 따른 몇몇 여인네들 앞에까지 그런 모습으로 달려야만 했다.
최고 높은 군왕에서 최고 낮은 종과 노예까지 예수님의 부끄러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부모, 형제, 친구 들 앞에까지 당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인 까닭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해결해 줄 수 없는, 심지어 그들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부끄러움이 다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자신이 싫고 미워지는 부끄러움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다. 예수님이 최고의 수치를 당함으로써 죄악이 들끓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인간끼리 주고받는 수치심, 자괴감, 모멸감 등을 온전히 대신 당하고 죽으셨던 것이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수치는?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권력, 재물, 명예, 건강 등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질 것 없었다. 단 한 가지 부끄러운 허물 말고는 말이다. 바로 고자라는 사실이다. 평생을 두고도 정상적 결혼을 통해 친 자식을 가질 수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오히려 아주 위엄 있어 보여도 자기 내면의 너무나 큰 부끄러움을 지울 길이 없었다. 부모도 여왕이라도 자기에게 참된 위로와 평강을 줄 수 없었다.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소망은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온전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한 것만 봐도 그의 소망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그는 에디오피아의 유대인들에게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간섭하시어 온갖 이적으로 그들을 보호 인도하셨고 또 거룩한 율법을 주셨음을 익히 배워서 알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하나님이야말로 정말 믿고 따를만한 참 신임을 확신하고 유대교로 개종 내지 입문했을 것이다. 나아가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소지하고서 숙독하는 가운데 메시아가 와서 모든 이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일생의 소망으로 간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큰맘 먹고, 틀림없이 여왕에게 특별허가를 받아서, 예루살렘 성전에 경배하러 간 것이 오히려 더 화근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정식으로 개종 절차를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가 성전에서 받았을 대우가 어떠했겠는가? 그는 이방인이었다. 거기다 고자였다.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1) 고자인 그는 성전 입구에서 이방인의 뜰에조차 발을 디디지 못하고 바로 쫓겨났을 것이다. 아무리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아도 돈으로 예배를 살 수는 없다. 설령 그럴 수 있었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예배다. 더러운 돈은 절대 받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내침을 당할 뿐이다.
자신의 인생의 참 소망으로 붙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오히려 쫓김을 당한 것이다. 성전에서 배척 당한 그의 심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절한 절망감과 한 나라의 고관으로서 생전 처음 겪는 창피로 인한 수치심으로 뒤엉켰을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어디를 여행 중인가? 생명의 씨가 없는 고자가 물과 풀과 생명이 없는 사막 길을 횡단하고 있다. 그의 심령이 자연히 더 착잡해지고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그가 소망을 걸 대상은 장차 오실 메시아뿐이었다. 그분이 오시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꺼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그 날에 땅 끝에서부터 모든 사람을 불러서 그 눈물을 닦아 주시고 소경의 눈을 밝히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준다는 그분 말고는 소망이 없었다. 그의 심령에 메시아 예언이 더 절실히 다가왔을 것이다. 우연히 읽게 된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간섭이긴 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가장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는 구절이었다.
분명 메시아가 오시면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기에 우리가 평화와 나음과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지 않은가 말이다. 과연 이분이 이미 오셨는가? 이사야 본인인가 아니면 앞으로 오실 어떤 이인가? 그럼 대체 언제 어떻게 오시는가? 일생일대의 궁금증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경배를 최고의 소망으로 삼았지만 무참히 실패했다. 그로선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를 만나지 못하면, 최소한 제대로 알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앞으로 살아갈 의미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런 약속 모두가 엉터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온갖 영적 갈증과 의아심이 증폭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눈앞에 빌립이 홀연히 나타났다. 성경의 기록을 보라.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절) 너무나 신기하고 오묘한 기록이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미하고 완벽한 성령의 전도였다. 적시에 복음을 전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라고 했다.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최소한 두 가지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글은 물론 이사야서 53장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이사야서를 계속 읽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어떤 구절을 만나는지 보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56:3-5)
절망에 빠진 내시의 현재 신세와 심경을 정확하게 그대로 묘사하고 있지 않는가? 이방인과 고자라도 당신의 백성에서 갈리지 않을 것이며 마른 나무(사막의 덤불 같은)라고 신세 한탄하지 말라는 것이다. 메시아가 와서 영영한 이름을 주어 절대 끊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가? 이보다 더 큰 소망을 심어줄 구절이 어디 있겠는가? 틀림없이 내시는 빌립에게 그간의 사정을 말했을 것이다. 빌립은 바로 이 구절까지 성경을 풀어 설명하고 난 후에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더 강하게 붙들라고 권했을 것이다. 너무나 놀랍지 않는가?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런 직후에 얼마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해 주면서 예수님을 소개했을 것이다. 정작 당신이 찾아가야 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이었다고 깨우쳐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 되시는 그분이 바로 온 천하에 남성의 생식기를 훤히 다 드러내시는 수치까지 겪으시고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또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생식기가 제거된 이 내시에게만은 예수님이 벌거벗겨져 당신의 생식기를 드러내며 최고로 수치스런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바로 자신이 그곳에 달린 실제적 체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그런 설명을 듣는 순간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완전히 겸비하게 엎드렸을 것이다.
“주여! 이제는 내가 고자인 것이 더 이상 나의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마른 나무가 아닙니다. 주님께 영원한 새 생명을 받게 되었음을 확신합니다. 내 평생의 수치를 당신께서 다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물을 발견하자마자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36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예수를 통해 평생의 수치가 비로소 완전히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내시의 수치는 율법에 따른 동물 희생 제사로는 절대 제거되지 않고 또 될 수도 없었던 수치였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가장 참혹한 죽음 가운데 가장 부끄러운 죽음이 함께 했기에 이 내시의 심령에 성령의 역사가 불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전경배에서 배척당한 것이 오히려 그에겐 유익이자 구원 얻을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틀림없이 그는 돌아가 에디오피아에 아프리카 최초로 교회를 설립했을 것이며 그래서 더더욱 그의 이름이 지금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영영히 끊치지 않게 된 것이다.
개인적 수치까지 제거 받았는가?
참고로 오늘의 본문은 기독교 역사적으로도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성경비평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고도로 성행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지은 저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기에 틀림없이 그 부분은 (40-66장까지 메시아 예언 부분을 통 털어서) 이미 모든 경과를 알게 된 후대 사람들이 첨가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비평이 절정에 이를 즈음인 1940년대에 사해사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예수님 이전에 현재와 똑 같은 이사야서가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혹시라도 사해사본 자체의 연대가 의심스럽다 해도, 본문 또한 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지 않는가? 문제의 이사야서 53장을 읽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즉,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닌 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경배하러 왔다가 퇴자를 맞고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였지 않는가? 골고다 십자가 사건을 전혀 모르는 예수님 당대의 이방인 유대교인이 현재와 동일한 이사야서를 읽고 믿고 있었다. 이 이상 성경이 인간 저작이라는 비평을 잠재울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 않는가?
이사야는 주전 약 700년경 사람이었고, 또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라고 예언한(시22:18) 다윗은 주전 약 천년 경 인물이었다. 너무나 세밀한 예언이자 완벽한 성취이지 않는가? 아니 본문의 에디오피아 내시 사건을 찬찬히 다시 따져 보라. 얼마나 놀랍고도 오묘한 섭리인가? 오히려 성경이 인간의 저작이고 예수는 인간 랍비에 불과했다는 것이 더 안 믿어지는 주장 아닌가?
성경에 나오는 고자, 소경, 귀머거리, 문둥병자, 앉은뱅이, 혈루병자, 과부, 창녀, 고아, 이방인, 죄인, 세리를 비롯해 오늘날도 친오빠와 삼촌에게 성폭행 당한 여학생 등 자신만의 수치에 떨며 괴로워하는 인간 군상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지금 이 자리에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부터 그 솔직한 내면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할 부끄러움이 가득하지 않은가? 또 그 부끄러움의 대부분은 사실상 죄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모든 죄에 대해 피의 대속을 이루셨다. 동시에 너무나 수치스런 죽음으로 우리의 온갖 수치까지 제거해 주셨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회심이 바로 우리의 회심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이 진리가 이해가 되는가? 아니 그런 구원의 생생한 체험이 있는가? 그처럼 내가 세례 받음에 즉, 예수님을 나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심에 거리낌이 더 이상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혹시라도 아직도 예수님이 나하고 별로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스스로 죄책감을 크게 못 느끼며 평생을 법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만은 죽음과는 크게 상관없을 것처럼 여기거나 최소한 언젠가 냉동인간으로 인간을 소생시켜 줄만큼 발달할 과학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단은 이 땅의 물질계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의 풍요만 추구하는 인간을 훼방하지 않기, 아니 때로는 적극적으로 형통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찾지 않으면 사단은 오히려 현실의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가만히 놓아두어도 저절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올 것을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죄의식이 없어서 예수와는 거리가 먼 그 어떤 자라도 자기만 갖고 있는 부끄러운 내면만은 절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에게 들키기는 정말 싫은 부끄러운 짓을 자행했거나, 지금도 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없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나아가 죄 많고 한 많은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살다보니 온갖 상처와 수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최소한 자존심과 체면이 상해 밤새 잠 못 이루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다. 모든 치부를 드러내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만이 그 답답한 가슴을 뚫어 줄 수 있다.
부끄러움은 절대 스스로 발생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반드시 어떤 형태가 되었든 죄와 연결되어 있다. 또 죄는 부끄러움 뿐 아니라 까닭 모를 두려움도 반드시 수반한다. 죄의 벌을 받아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씻어내어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의 형벌과 배상과 사죄만으로는 절대로 부족하다. 죄책감, 수치심, 모멸감, 상처, 두려움 모두 인간의 영혼에서 발생하고 자리 잡고 자라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 역사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와 의로움이 아니고는 인간의 내면을 깨끗케 해서 평강과 자유를 줄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 오셔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셨다. 그분의 대속 사역을 온전히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십자가의 또 다른 비밀을 너무나 소중하게 간직하며 평생을 두고 감사해야 한다. 그분이 먼저 당신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까지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시며 우리의 수치를 제거 해주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 온자는 고자라도 자신을 마른 나무라고 말할 수 없고 말해선 안 된다. 이미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고 앞으로도 더 풍성히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선 어느 누구도 감히 의인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지만, 그분을 이미 영접한 자는 감히 아직도 내가 죄인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그분께 예배드리러 나온 여러분의 경우는 모든 죄와 함께 그 결과로 따라오는 수치와 공포도 실질적으로 제거 되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로서의 동의와 믿음에 그쳐선 안 된다.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이 과연 예수가 누구인지, 그분이 나와 실질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확실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해답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분과 교제함에 어떤 거리낌도 없어야 한다. 여러분은 죄만 용서 받았는가? 수치와 두려움까지 십자가 앞에 완전히 내려놓았는가?
8/4/2009
유타대학촌교회 12/8/1996 주일 설교를 정리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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