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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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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9: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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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당신은 진정 새로운 피조물인가?
사도행전강해(3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19-31)
바울 회심의 특징
초기 기독교의 최고 대적이었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최고의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바뀌었다. 사흘간 시력을 잃고 암흑 가운데 있다가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눈을 뜨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 기적적인 능력 앞에 항복 했다기보다는 죽음과 방불한 사흘간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영적 실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진정 당신께서 선포하신 그대로 구세주였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제 바울이 회심한 후에 바뀐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회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예수님이 완전히 주도하여 이뤄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이 한 일이라고는 기도 말고는 없었다. 기도도 봉사가 된 이후 어쩔 수 없어서 했으므로 구원을 이룬 요소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가 계획, 의도, 소망, 예상, 기대는커녕 꿈도 꾸지 않았던 구원이 일어났던, 정확히 말해 받았던 것이다.
둘째는 그의 회심 전과 후를 비교하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성적으로 더 출중하고, 인격적으로 더 풍성하고, 도덕적으로 더 의로워지고, 종교적으로 더 경건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부턴 유대 회당에서 원수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대신에 오히려 사랑해주라고 권면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자기 같은 원수마저도 태중에서부터 택하여 사랑해주신 예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한 것이다.
얼마 전 회당에서 스데반과 변론할 때에 꼼짝 못하고 당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스데반과 동일하게 성령에 충만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게 되었다. 자신의 학술적 지식으로 분석한 것도, 철학적 개념으로 묵상한 것도, 종교적 신념으로 믿으려 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여 너무나 놀라운 권능과 은총을 맛보자 저절로 자신의 구주로 모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까지 바뀌었는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에서 예수를 전하는 바람에 도리어 핍박 받는 자가 되었다. 세상 최고 권력자에게서 체포 영장을 발부 받아 다메섹으로 향하던 보무당당함은 사라지고 이제 광주리를 타고 야밤에 그 성에서 도망쳐야 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나사렛 이단을 말살하려 남의 생명을 빼앗는 자에서 바로 그 이단에 속해서 이제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처지에 빠졌다. 이전의 동료가 대적이 되었고 이전의 대적은 형제가 되었다.
예수 믿기 전의 이름, 사울의 뜻은 “큰 자” 혹은 “구한다.”는 뜻이다. 인생의 진리를 찾아서 구도하되 모든 면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큰 자였다. 자기들은 죽을 죄인이라고 최고로 낮아져선 이미 진리인 예수를 만나 소유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기독교인들은 그에겐 마땅히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난, 아니 정반대편에 서있는 이단들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바로 한 순간에 예수님에 의해 “작은 자” 바울로 뒤집어졌다.
말하자면 그 나름대로의 영적 순례의 최종순간에 즉, 진리를 추구하려는 종착지점 직전에 예수님을 일대일로 딱 마주쳤다. 그리고 거기까지 자기가 걸어온 모든 과정이 공중에 떠있는 구름이자, 전혀 열매 맺지 못하는 고자와 같은 삶이었음을 절감했다. 그로선 예수님의 택하심의 긍휼을 입지 못했더라면 역사상 최대의 실패자요, 하나님 앞에 사형수로 끝날 뻔 했던 인생이었다. 그분을 최고로 핍박한 자라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벌을 받지는 않을 것 아닌가?
반면에 예수 믿은 후, 그의 고백을 보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8,9)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면 사람들 중에 가장 작다는 뜻이다. 이처럼 최고 높은 자마저 최고 낮아지는 자가 되는 것이 회심의 가장 큰 특징이다. 구원은 또 자신의 어떤 자격, 조건, 선행, 공적, 능력도 개입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거저 받은 것이다. 가장 작은 자가 구원 받았다면 문자 그대로 바울 쪽에서 구원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런 작은 자를 이방인 사도로 택해주었다면, 회심 이후에 그가 행한 모든 사역 또한 예수님이 전적으로 하신 일이라는 뜻이다.
바울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비록 바울의 회심이 아주 극적이긴 했지만 신자들이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특별히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위해 그런 유별난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를 믿게 된 모든 신자의 회심에는 각기 그 과정은 다 달라도 바울의 회심과 동일한 두 가지 특징이 반드시 드러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해 정반대의 사람으로 바뀌는 극적 변화가 없다면 진정한 회심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진정한 회심을 실제 경험했다면 바울의 이야기가 결코 제 삼자의 간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스로는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7-19)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피조를 당한 자가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저 창조주가 하는 대로 맡겨야 한다. 그래서 구원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고 한다. 또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으므로 예수 믿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나아가 새것이 된 신자에게는 아직 이전 것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당신과 화목 시키는 직책을 주셨다고 한다.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듯이 모든 신자는 세상 죄인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가 이 진술을 구원 얻는 원리로는 잘 받아들이고 또 그대로 믿는다. 그러나 과연 예수 믿은 후에 변화된 모습에서 실제로 바울과 같아졌는지를 따져 보면 “영, 아니올시다.”가 그 솔직한 답일 것이다. 그럼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는 제 2의 창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바울처럼 열렬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서 초대교회를 세우고 신약성경을 저술한 것 같은 종교적 업적을 쌓았는지 여부를 따지자는 뜻이 아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후에 제일 먼저 행한 일이 무엇인가? 극적인 변화가 실제로 겉으로 드러난 증표가 무엇인가 말이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절)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했다. 그렇다고 우리더러 예수 믿자마자 아무나 붙들고 전도하라는 뜻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전후 사정부터 먼저 잘 따져 보아서 우리도 그와 동일했는지 여부를 비교해보자는 것이다.
가장 먼저 우리가 당시 그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상식적으로 따져 이전에 잔멸하려 들었던 신자들을 찾아가서 먼저 사과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꽃바구니나 위로금을 싸들고 신자들 집을 일일이 방문해 용서를 빌고 위로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이지 않는가? 만약 지난 잘못이 너무 심해 용서를 빌 낯짝이 도무지 없다면 조용히 숨어서 개과천선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는가? 또 자기를 신임하여 체포 영장을 끊어준 산헤드린에도 출두하여 자신의 개종 사실을 통보하며 너그러운 양해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런 절차를 생략하면 그로선 예수 믿는 쪽이나 반대하는 측에서 공(共)히 비난 받을 것이다. 양측 모두가 자신의 대적이 될 것은 너무나 빤하다. 실제로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을 위해 해를 받으리라 말씀하신 그대로 사태는 진행되었다. 신자들은 그의 설교를 의심하며 들었고(21절),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공모했다(23절). 그처럼 지성이 뛰어나 논리가 정연한 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그 일로 인해 앞으로 진전될 사태를 예측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는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22절) 하였지 않는가? 단지 미래에 대한 염려를 이겨낸 정도를 넘어 “힘을 더 얻어” 아주 열렬히 전도하고 다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동안 자기가 핍박했던 자들의 수만큼 전도하여 과거 잘못을 보상하려는 것인가? 아니다. 그로선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열정에 이끌린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닌 자로서 그처럼 온전하고도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면한 체험을 했던 자가 있는가? 그것도 예수를 가장 극렬하게 핍박했었음에도, 그리고 사흘간 봉사로 만든 것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즉사시킬 수도 있었음에도 오히려 살려 주시고 당신의 사도로 삼아주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또 그 확약대로 모든 사태가 진행되었는데 그가 느끼고 깨달았을 내용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예수만이 인생사를 주관하며 특별히 죄에서 구원해주는 구세주임을 확신하고 또 확신하고도 남았을 것 아닌가? 나아가 아나니아의 안수 이후로는 바로 그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동행 하고 있음도 확신하지 않았겠는가? 아니 실제로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권능에 사로잡혀 있음을 충분히 감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간적 지성과 도덕성과 종교성에만 의존했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강, 위로, 안식, 확신, 자유, 담대함 등이 저절로 속에서부터 넘쳐흘렀을 것 아닌가?
그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은 가뜩이나 스데반이 순교할 때의 불가사의한 모습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 당혹하며 갈등하고 있었던 차였다. 말하자면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심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자기가 전혀 모르는 신비하고도 대담한 믿음의 차원이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인식은 가졌을 것이다. 그러다 시력을 회복하고 또 성령의 붙잡힘 속에 있게 된 후로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달라진 자기가 이전의 자기 상태와 정말 극명하게 대조되었을 것이다.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예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도무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그의 입장이 되어서 당시 상황을 곰곰이 묵상해보라. 누가 뭐라 해도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예수는 주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하고 다니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이전의 동지가 욕을 하고 이전의 적들이 자기를 의심해도 그로선 정말로 당연히 할 바를 넘어서 자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흙탕에서 건져진 바울
신자의 회심은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급한 일이 있어서 아령이나 뜀틀 같은 기구를 주면서 이런 저런 연습을 하라고 지시를 하곤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나 선생님이 사라지자마자 모든 학생이 진흙탕에 들어가 제 멋대로 장난치고 정신없이 진탕 놀았다. 한 마디로 자율학습이 아니라 난장판이 벌어졌다.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한참을 지난 후에 한 아이가 자꾸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느낌이 들어 문득 교실 쪽으로 돌아보았더니 커튼 사이로 선생님이 엄숙한 얼굴로 조용히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이제 단체 기합이라도 받겠다 싶어 겁이 덜컥 났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가 잘못 봤나 싶어 다시 천천히 주목해서 보았다. 분명히 선생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계셨다. 멀리서나마 자기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여전히 근엄하지만 사랑과 인자가 가득 찬 눈으로 그윽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야단치거나 벌주러 교실에서 뛰어나올 기색은 없었다.
또 긍휼함과 엄숙함이 함께 섞여 있는 그 표정 앞에선 그동안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제멋대로 분탕 쳤던 잘못에 대한 변명의 여지라곤 생기지 않았다. 어떤 반발, 구실,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 단지 너무나 자신이 부끄럽고 추하고 더럽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선생님을 바로 쳐도 볼 수도 없었다. 곧바로 그 진흙탕에서 빠져 나왔다. 도무지 그 자리에 더 남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아이들을 향해 선생님이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시니까 빨리 장난질을 그만 두고 몸을 씻으러 나오라고 소리쳤다. 어느 누가 그렇게 소리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노느라 정신이 빠져 아무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똑똑한 아이는 “선생님이 돌아오셨다면 우리를 이대로 둘 리가 없지? 당장 벌주려고 오시겠지? 제발 거짓말 하지 마!”라고 오히려 야단을 쳤다. 혹시 싶어 뒤를 돌아본 애도 있었지만 눈에 흙탕이 튀었거나, 교실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되어 카텐 사이에 분명히 서있는 선생님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선생님이 없는데. 쟤가 배가 고파 헛것을 본 게 분명해. 아무 걱정 말고 신나게 놀자.”라고 한마디하곤 치웠다.
그럼 지금 벌 안 주고 교실 창밖으로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선생님이 잘못인가? 진흙탕에서 계속 놀고 있는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인가? 당연히 아이들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선생님이라면 우릴 벌주어야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벌주지 않으면 선생님이 아니야. 언제라도 선생님이 나타나면 당장 장난질을 그만 둘 텐데”라고 대꾸한다. 벌주지 않는 선생님이 잘못이라는 항변인 셈이다. 속내로는 아무도 벌 받을 생각을, 심지어 진정 잘못했다고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으면서 그런다.
선생님이 왜 벌을 주지 않는가? 물론 선생님도 벌을 주면 당장에 그 장난질을 중지할 것이라는 사실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자기를 그저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으로만 안다. 벌 받는 것이 무서워서 잘못을 범하지 않지 무엇이 왜 잘못인지 알지도 못한다. 또 벌을 안 주면 언제든지 다시 잘못을 범한다. 선생님의 직분은 아이들을 가르쳐 변화시켜 자라게 해야 함에도 전혀 그렇지 못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잘못만, 그것도 일시적으로 유보시킬 뿐이다.
말하자면 인격과 인격이 가슴을 털어놓고 교통하면서 사랑의 보살핌과 공의로운 훈육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진정한 사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규칙으로 실현되는 법적인 의만 있는 기계적 관계에 그친다. 단순히 잘못된 행동만 뜯어고치려 들면 벌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면 풍성한 사랑으로 그 사람을 보살펴야 한다. 물론 무엇이 잘못인지 분명히 가르쳐 진심으로 뉘우치게 하면서 말이다.
벌을 주려면 아이들 전부가 잘못했으니 몽땅 벌세워야 한다. 그런다고 아이들이 뉘우치고 고쳐서 새롭게 변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진흙탕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얼마나 잘못하는지 지켜보았다 벌주겠다는 심보가 아니었다. 하라는 연습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다 진흙에 더렵혀진 아이들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겼다. 누구라도 그 눈과 마주치면 선생님이 얼마나 자기들을 아끼며 사랑하는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 진흙탕에서 빠져 나온 아이들로 진짜 체육훈련을 시키려는 것이다. 철봉, 뜀틀, 달리기, 역기, 던지기, 등등 얼마든지 몸에 좋은 운동들이 준비되어 있다. 각자의 체격과 특성에 맞추어 개별적으로 트레이닝을 시킬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강건한 체격의 아이들로 선생님이 바꿔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진흙탕 놀이가 너무 재미있어서 거기서 빠져 나올 생각을 않았다. 선생님이 돌아오셨다고 고함지르는 소리를 듣고도 눈에 당장 보이지 않으니까 거짓인 줄 알았다. 아니 그 놀이가 너무 신나서 다른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라곤 아예 없었던 것이다.
어둠은 당연히 빛을 싫어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율학습을 시켰다. 그러자 모두가 철봉과 뜀틀은 힘들다는 이유로 거들떠도 보지 않고 오직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놀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계시면 우릴 벌주어야지 벌주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대꾸했다. 말하자면 선행과 공적에 따라 상벌을 주는 심판의 하나님이 옳다는 것이다.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이 바로 그랬다.
그러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진짜로 오셨다. 가만히 창문을 통해 진흙탕 속을 바라보고만 계셨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자율학습을 시켜 놓은 학생들을 만나려 하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셨는데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흙탕에서 노느라 그분을 보지 못했다. 전혀 야단을 치지 않으니까 아예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제자들만 무한한 긍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치자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그 진흙탕에서 빠져 나왔다.
그 중에 한 사람인 스데반은 동족더러 회개하고 나사렛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바울은 하나님이 오셨다면 상벌부터 주어야지 왜 가만히 있느냐, 그런 엉터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거짓말하지 말라고 스데반을 야단치며 돌로 때려 죽였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요1:9-11)
예수님은 삼년 간 모든 인간들을 향해 한 번 싱긋 웃어주시고 다시 교실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지금도 이 세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비록 주님은 승천하였지만 진흙탕 속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그분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께서 직접 양육하셨던 제자들을 통해 순전한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었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절대적 진리가 성경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진흙탕에서 노는 재미에 갈수록 더 푹 빠져버렸다. 예수님이 전혀 벌을 줄 시늉도 않는지라 그곳에서 빠져 나올 궁리도 않는다. 여전히 벌주지 않는 선생님은 선생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냥 계속 진흙탕 속에서 신나게 놀겠다는 뜻이다. 스스로 회개하여 진흙탕에서 빠져 나오길 기다리는 선생은 선생 축에도 끼지 않는다고까지 말하면서 말이다. 자기들에게 잘못된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벌주지 않는 선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억지는 없다. 아무 벌주지 않고 용서만 해주는 선생님이 틀렸다는 반발이야말로 치사한 변명 내지 핑계에 불과하다. 그런 선생님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그들도 분명히 안다. 불신자들 눈에는 예수 믿는 신자들이 여전히 진흙탕에 같이 남아 있거나 빠져 나갔어도 그 옷을 깨끗이 빨아 입은 것 같지 않아 싫어한다. 그러나 진흙탕 밖에서 조용히 빠져 나오길 기다리는 예수님은 좋아하고 존경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방법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또 예수는 존경하면서도 그분이 제시한 구원의 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회심보다는 진흙탕 속의 놀음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한 것이라.”(요3:19) 그들은 선과 의를 좋아한 것이 아니다. 죄와 악을 좋아하여 능동적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선과 의는 아주 미워한 것이다. 선과 의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자기들의 죄와 악이 들통 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분명 좋은 분인 줄 알지만 그분을 믿고 따르려면 자기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이다.
성경이 예수님을 빛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을 어둠으로 유비한 것은 참으로 정확하다. 빛은 절대로 어둠과 공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둠도 빛과는 상극이다. 그래서 어둠은 항상 어둠에 머물러 있기만을 좋아한다. 어둠은 어둠끼리 모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이 조금이라도 어둠을 싫어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여기면 당장에 어둠의 본색이 상실된다. 어둠은 절대 그 본색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므로 당연히 빛을 싫어하게 된다. 죽어라고 싫어한다. 빛을 인정하는 순간 어둠은 빛에게 완전히 자기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빛은 가만히 있어도 그냥 빛일 뿐이다. 빛은 항상 밝게 빛나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숨을 필요가 전혀 없다. 아니 숨는 것과는 전혀 본질을 달리 한다. 숨으면 빛이 아니다. 어둠을 없애는 기능과 사명이 빛의 본질이다. 빛은 그래서 어둠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어떤 장애가 있던 전혀 가리지 않고 밝음을 전파한다.
어둠이 스스로는 빛을 가로막을 수는 결코 없다. 어둠은 빛을 만나는 순간 바로 빛 가운데 흡수되어 함께 빛이 된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막는 장애물 뒤에 그림자의 형태로 숨어 있으려고만 한다. 항상 빛이 전혀 안 비취는 곳에 몰려 있거나 빛의 반대편으로만 찾아다니는 습성을 지닌다. 말하자면 어둠은 스스로 어둠이라고 밝히지를 않는다. 그 말은 어둠을 벗어나 빛 가운데로 들어오고 싶다는 뜻이 되므로 그 순간 어둠으로서 본색이 완전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20)
어둠을 진정으로 싫어하는가?
“빛과 어두움” 또 “진흙탕 속의 아이”라는 이 두 유비에 비추어 과연 우리의 회심이 바울의 것과 동일한지 다시 점검해보자. 자신의 구원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셨는가? 또 극렬한 예수의 반대자에서 적극적 전도자로 바뀌었는가? 세상이라는 진흙탕을 향해서 십자가 앞으로 무릎 꿇고 나오라고 소리 치고 있는가?
항상 전도에 전념하고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의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어둠과 빛을 분명하게 대조시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그래서 어둠을 사랑하여 어둠 속에 있는 자들로부터 비방, 멸시, 핍박을 받아야 한다. 이 또한 전도하여 종교적 핍박을 받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정부패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당하는 불이익과 피해를 기꺼이 또 담대하게 짊어지는 것이다.
참 신자가 현실적 불이익과 핍박이 있음에도 빛을 전하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다. 우선 진흙탕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어둠인지 절실히 체험했기에 두 번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그곳을 혐오하고 저주해야 한다. 자연히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져야 한다. 자기에게 어떤 험한 일이 생겨도 그 진흙탕에서만은 빠져 나오라고 권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예수님의 은총과 권능 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절감했기 때문이다. 밝고도 따뜻한 빛 가운데 들어온 자만이 어둠이 얼마나 어둡고 추운지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보호와 인도에 따르는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충만함으로 넘쳐난다. 그래서 정말 자기 목숨을 잃더라도 새롭게 얻은 그 충만함을 절대 놓치지 않을 만큼 새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당연히 아직 새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어둠으로 오직 어둠만 사랑한다면 아무리 전해도 진흙탕 속에 빠져 나오지 않으려 할 것 아닌가? 우리가 전도할 때마다 느끼듯이 말이다.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고 눈앞에서 큰소리로 야단치지 않는 한에는 그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 자에게 전도는 불가능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바로 그러니까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이뤄지는 법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예정하시어 선택한 자의 인생에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로 태중에서부터 분명히 간섭 인도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가시적 영역에서 당신의 일을 대행할 사람과 사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불신자에게 현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일순간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뒤바꾸어주는 일은 없다.
바울의 예에서 보면 아나니아보다는 스데반이 바로 그런 역할을 맡았다. 아나니아는 이미 예수님 앞에 완전히 깨어진 영혼을 최종적으로 거두는 역할을 한 것뿐이다. 그 전에 이미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에서, 또 회당에서 율법을 두고 토론하는 과정 중에 바울의 견고한 진에 작은 틈새가 생기게 했다. 그래서 바울더러 자기 영혼의 가난한 실상을 다시 점검하고 예수에 대해서 계속 갈등과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다. 구도자라는 이름대로 율법 외에서도 진리를 찾아 볼 생각을 만들어 준 것이다.
아무리 세상사람 전부가 진흙탕에 빠져서 신나게 놀고 있고 그들에게 십자가 진리를 전하는 자를 자기들 노는 데 방해가 된다고 두들겨 패려 들어도, 그들 안에는 사울같이 갈등하는 자는 있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참 진리 즉, 자기 일생을 걸만한 길을 찾고 있는 자가 있다. 비록 그마저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로 예비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신자가 바로 그런 자를 찾아내는 것이 전도다. 그래서 진흙탕에서 언뜻 고개를 교실 쪽으로 돌리게 만들어야 한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21) 하나님을 몰랐던 자신의 지난 모든 인생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춰보았을 때에 몽땅 죽어 마땅한 죄였고 자신 또한 철저하게 더럽고 추해 의롭고 선한 것이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결국 무슨 말이 되는가? 복음을 전하는 신자가 바로 그래야만 전함을 받는 자가 수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회심을 한 자는 철저한 죽음에서 철저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철두철미 확신하는 자다. 그러니 철저한 죽음 가운데 빠져 있는 자를 만날 때마다 철저한 생명으로 옮기고 싶어서 안타깝고 불쌍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바울처럼 세상 어느 쪽에서도 동조를 못 받는 한이 있어도 더욱 힘을 내어 예수를 주라고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전함을 받는 자도 철저한 죽음이 철저한 생명으로 바뀐 것을 목도할 수 있어야 전해지는 복음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여러분의 회심은 바울과 비교해 어떠한가? 극적인 체험을 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열심히 예수를 전하고 있는지를 따지자는 뜻도 아니다. 단지 예수를 몰랐던 이전의 생활 방식과 사고체계가 너무나 더럽고 추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돌아가지 않겠는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알고 믿고 따르는 새로운 생활방식과 사고체계가 너무 귀하고 좋아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바꾸지 않겠는지 묻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삶이 현실적으로는 많이 후패하고 내 존재가 거룩과도 한창 거리가 멀더라도 말이다.
10/20/2009
유타대학촌 교회 1/12/1997 주일설교를 보완 정리한 것임. -->
사도행전강해(3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19-31)
바울 회심의 특징
초기 기독교의 최고 대적이었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최고의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바뀌었다. 사흘간 시력을 잃고 암흑 가운데 있다가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눈을 뜨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 기적적인 능력 앞에 항복 했다기보다는 죽음과 방불한 사흘간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영적 실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진정 당신께서 선포하신 그대로 구세주였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제 바울이 회심한 후에 바뀐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회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예수님이 완전히 주도하여 이뤄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이 한 일이라고는 기도 말고는 없었다. 기도도 봉사가 된 이후 어쩔 수 없어서 했으므로 구원을 이룬 요소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가 계획, 의도, 소망, 예상, 기대는커녕 꿈도 꾸지 않았던 구원이 일어났던, 정확히 말해 받았던 것이다.
둘째는 그의 회심 전과 후를 비교하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성적으로 더 출중하고, 인격적으로 더 풍성하고, 도덕적으로 더 의로워지고, 종교적으로 더 경건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부턴 유대 회당에서 원수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대신에 오히려 사랑해주라고 권면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자기 같은 원수마저도 태중에서부터 택하여 사랑해주신 예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한 것이다.
얼마 전 회당에서 스데반과 변론할 때에 꼼짝 못하고 당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스데반과 동일하게 성령에 충만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게 되었다. 자신의 학술적 지식으로 분석한 것도, 철학적 개념으로 묵상한 것도, 종교적 신념으로 믿으려 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여 너무나 놀라운 권능과 은총을 맛보자 저절로 자신의 구주로 모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까지 바뀌었는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에서 예수를 전하는 바람에 도리어 핍박 받는 자가 되었다. 세상 최고 권력자에게서 체포 영장을 발부 받아 다메섹으로 향하던 보무당당함은 사라지고 이제 광주리를 타고 야밤에 그 성에서 도망쳐야 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나사렛 이단을 말살하려 남의 생명을 빼앗는 자에서 바로 그 이단에 속해서 이제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처지에 빠졌다. 이전의 동료가 대적이 되었고 이전의 대적은 형제가 되었다.
예수 믿기 전의 이름, 사울의 뜻은 “큰 자” 혹은 “구한다.”는 뜻이다. 인생의 진리를 찾아서 구도하되 모든 면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큰 자였다. 자기들은 죽을 죄인이라고 최고로 낮아져선 이미 진리인 예수를 만나 소유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기독교인들은 그에겐 마땅히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난, 아니 정반대편에 서있는 이단들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바로 한 순간에 예수님에 의해 “작은 자” 바울로 뒤집어졌다.
말하자면 그 나름대로의 영적 순례의 최종순간에 즉, 진리를 추구하려는 종착지점 직전에 예수님을 일대일로 딱 마주쳤다. 그리고 거기까지 자기가 걸어온 모든 과정이 공중에 떠있는 구름이자, 전혀 열매 맺지 못하는 고자와 같은 삶이었음을 절감했다. 그로선 예수님의 택하심의 긍휼을 입지 못했더라면 역사상 최대의 실패자요, 하나님 앞에 사형수로 끝날 뻔 했던 인생이었다. 그분을 최고로 핍박한 자라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벌을 받지는 않을 것 아닌가?
반면에 예수 믿은 후, 그의 고백을 보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8,9)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면 사람들 중에 가장 작다는 뜻이다. 이처럼 최고 높은 자마저 최고 낮아지는 자가 되는 것이 회심의 가장 큰 특징이다. 구원은 또 자신의 어떤 자격, 조건, 선행, 공적, 능력도 개입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거저 받은 것이다. 가장 작은 자가 구원 받았다면 문자 그대로 바울 쪽에서 구원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런 작은 자를 이방인 사도로 택해주었다면, 회심 이후에 그가 행한 모든 사역 또한 예수님이 전적으로 하신 일이라는 뜻이다.
바울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비록 바울의 회심이 아주 극적이긴 했지만 신자들이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특별히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위해 그런 유별난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를 믿게 된 모든 신자의 회심에는 각기 그 과정은 다 달라도 바울의 회심과 동일한 두 가지 특징이 반드시 드러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해 정반대의 사람으로 바뀌는 극적 변화가 없다면 진정한 회심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진정한 회심을 실제 경험했다면 바울의 이야기가 결코 제 삼자의 간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스로는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7-19)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피조를 당한 자가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저 창조주가 하는 대로 맡겨야 한다. 그래서 구원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고 한다. 또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으므로 예수 믿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나아가 새것이 된 신자에게는 아직 이전 것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당신과 화목 시키는 직책을 주셨다고 한다.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듯이 모든 신자는 세상 죄인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가 이 진술을 구원 얻는 원리로는 잘 받아들이고 또 그대로 믿는다. 그러나 과연 예수 믿은 후에 변화된 모습에서 실제로 바울과 같아졌는지를 따져 보면 “영, 아니올시다.”가 그 솔직한 답일 것이다. 그럼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는 제 2의 창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바울처럼 열렬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서 초대교회를 세우고 신약성경을 저술한 것 같은 종교적 업적을 쌓았는지 여부를 따지자는 뜻이 아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후에 제일 먼저 행한 일이 무엇인가? 극적인 변화가 실제로 겉으로 드러난 증표가 무엇인가 말이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절)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했다. 그렇다고 우리더러 예수 믿자마자 아무나 붙들고 전도하라는 뜻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전후 사정부터 먼저 잘 따져 보아서 우리도 그와 동일했는지 여부를 비교해보자는 것이다.
가장 먼저 우리가 당시 그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상식적으로 따져 이전에 잔멸하려 들었던 신자들을 찾아가서 먼저 사과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꽃바구니나 위로금을 싸들고 신자들 집을 일일이 방문해 용서를 빌고 위로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이지 않는가? 만약 지난 잘못이 너무 심해 용서를 빌 낯짝이 도무지 없다면 조용히 숨어서 개과천선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는가? 또 자기를 신임하여 체포 영장을 끊어준 산헤드린에도 출두하여 자신의 개종 사실을 통보하며 너그러운 양해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런 절차를 생략하면 그로선 예수 믿는 쪽이나 반대하는 측에서 공(共)히 비난 받을 것이다. 양측 모두가 자신의 대적이 될 것은 너무나 빤하다. 실제로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을 위해 해를 받으리라 말씀하신 그대로 사태는 진행되었다. 신자들은 그의 설교를 의심하며 들었고(21절),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공모했다(23절). 그처럼 지성이 뛰어나 논리가 정연한 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그 일로 인해 앞으로 진전될 사태를 예측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는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22절) 하였지 않는가? 단지 미래에 대한 염려를 이겨낸 정도를 넘어 “힘을 더 얻어” 아주 열렬히 전도하고 다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동안 자기가 핍박했던 자들의 수만큼 전도하여 과거 잘못을 보상하려는 것인가? 아니다. 그로선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열정에 이끌린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닌 자로서 그처럼 온전하고도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면한 체험을 했던 자가 있는가? 그것도 예수를 가장 극렬하게 핍박했었음에도, 그리고 사흘간 봉사로 만든 것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즉사시킬 수도 있었음에도 오히려 살려 주시고 당신의 사도로 삼아주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또 그 확약대로 모든 사태가 진행되었는데 그가 느끼고 깨달았을 내용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예수만이 인생사를 주관하며 특별히 죄에서 구원해주는 구세주임을 확신하고 또 확신하고도 남았을 것 아닌가? 나아가 아나니아의 안수 이후로는 바로 그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동행 하고 있음도 확신하지 않았겠는가? 아니 실제로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권능에 사로잡혀 있음을 충분히 감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간적 지성과 도덕성과 종교성에만 의존했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강, 위로, 안식, 확신, 자유, 담대함 등이 저절로 속에서부터 넘쳐흘렀을 것 아닌가?
그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은 가뜩이나 스데반이 순교할 때의 불가사의한 모습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 당혹하며 갈등하고 있었던 차였다. 말하자면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심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자기가 전혀 모르는 신비하고도 대담한 믿음의 차원이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인식은 가졌을 것이다. 그러다 시력을 회복하고 또 성령의 붙잡힘 속에 있게 된 후로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달라진 자기가 이전의 자기 상태와 정말 극명하게 대조되었을 것이다.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예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도무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그의 입장이 되어서 당시 상황을 곰곰이 묵상해보라. 누가 뭐라 해도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예수는 주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하고 다니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이전의 동지가 욕을 하고 이전의 적들이 자기를 의심해도 그로선 정말로 당연히 할 바를 넘어서 자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흙탕에서 건져진 바울
신자의 회심은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급한 일이 있어서 아령이나 뜀틀 같은 기구를 주면서 이런 저런 연습을 하라고 지시를 하곤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나 선생님이 사라지자마자 모든 학생이 진흙탕에 들어가 제 멋대로 장난치고 정신없이 진탕 놀았다. 한 마디로 자율학습이 아니라 난장판이 벌어졌다.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한참을 지난 후에 한 아이가 자꾸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느낌이 들어 문득 교실 쪽으로 돌아보았더니 커튼 사이로 선생님이 엄숙한 얼굴로 조용히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이제 단체 기합이라도 받겠다 싶어 겁이 덜컥 났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가 잘못 봤나 싶어 다시 천천히 주목해서 보았다. 분명히 선생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계셨다. 멀리서나마 자기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여전히 근엄하지만 사랑과 인자가 가득 찬 눈으로 그윽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야단치거나 벌주러 교실에서 뛰어나올 기색은 없었다.
또 긍휼함과 엄숙함이 함께 섞여 있는 그 표정 앞에선 그동안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제멋대로 분탕 쳤던 잘못에 대한 변명의 여지라곤 생기지 않았다. 어떤 반발, 구실,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 단지 너무나 자신이 부끄럽고 추하고 더럽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선생님을 바로 쳐도 볼 수도 없었다. 곧바로 그 진흙탕에서 빠져 나왔다. 도무지 그 자리에 더 남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아이들을 향해 선생님이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시니까 빨리 장난질을 그만 두고 몸을 씻으러 나오라고 소리쳤다. 어느 누가 그렇게 소리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노느라 정신이 빠져 아무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똑똑한 아이는 “선생님이 돌아오셨다면 우리를 이대로 둘 리가 없지? 당장 벌주려고 오시겠지? 제발 거짓말 하지 마!”라고 오히려 야단을 쳤다. 혹시 싶어 뒤를 돌아본 애도 있었지만 눈에 흙탕이 튀었거나, 교실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되어 카텐 사이에 분명히 서있는 선생님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선생님이 없는데. 쟤가 배가 고파 헛것을 본 게 분명해. 아무 걱정 말고 신나게 놀자.”라고 한마디하곤 치웠다.
그럼 지금 벌 안 주고 교실 창밖으로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선생님이 잘못인가? 진흙탕에서 계속 놀고 있는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인가? 당연히 아이들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선생님이라면 우릴 벌주어야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벌주지 않으면 선생님이 아니야. 언제라도 선생님이 나타나면 당장 장난질을 그만 둘 텐데”라고 대꾸한다. 벌주지 않는 선생님이 잘못이라는 항변인 셈이다. 속내로는 아무도 벌 받을 생각을, 심지어 진정 잘못했다고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으면서 그런다.
선생님이 왜 벌을 주지 않는가? 물론 선생님도 벌을 주면 당장에 그 장난질을 중지할 것이라는 사실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자기를 그저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으로만 안다. 벌 받는 것이 무서워서 잘못을 범하지 않지 무엇이 왜 잘못인지 알지도 못한다. 또 벌을 안 주면 언제든지 다시 잘못을 범한다. 선생님의 직분은 아이들을 가르쳐 변화시켜 자라게 해야 함에도 전혀 그렇지 못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잘못만, 그것도 일시적으로 유보시킬 뿐이다.
말하자면 인격과 인격이 가슴을 털어놓고 교통하면서 사랑의 보살핌과 공의로운 훈육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진정한 사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규칙으로 실현되는 법적인 의만 있는 기계적 관계에 그친다. 단순히 잘못된 행동만 뜯어고치려 들면 벌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면 풍성한 사랑으로 그 사람을 보살펴야 한다. 물론 무엇이 잘못인지 분명히 가르쳐 진심으로 뉘우치게 하면서 말이다.
벌을 주려면 아이들 전부가 잘못했으니 몽땅 벌세워야 한다. 그런다고 아이들이 뉘우치고 고쳐서 새롭게 변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진흙탕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얼마나 잘못하는지 지켜보았다 벌주겠다는 심보가 아니었다. 하라는 연습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다 진흙에 더렵혀진 아이들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겼다. 누구라도 그 눈과 마주치면 선생님이 얼마나 자기들을 아끼며 사랑하는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 진흙탕에서 빠져 나온 아이들로 진짜 체육훈련을 시키려는 것이다. 철봉, 뜀틀, 달리기, 역기, 던지기, 등등 얼마든지 몸에 좋은 운동들이 준비되어 있다. 각자의 체격과 특성에 맞추어 개별적으로 트레이닝을 시킬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강건한 체격의 아이들로 선생님이 바꿔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진흙탕 놀이가 너무 재미있어서 거기서 빠져 나올 생각을 않았다. 선생님이 돌아오셨다고 고함지르는 소리를 듣고도 눈에 당장 보이지 않으니까 거짓인 줄 알았다. 아니 그 놀이가 너무 신나서 다른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라곤 아예 없었던 것이다.
어둠은 당연히 빛을 싫어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율학습을 시켰다. 그러자 모두가 철봉과 뜀틀은 힘들다는 이유로 거들떠도 보지 않고 오직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놀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계시면 우릴 벌주어야지 벌주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대꾸했다. 말하자면 선행과 공적에 따라 상벌을 주는 심판의 하나님이 옳다는 것이다.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이 바로 그랬다.
그러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진짜로 오셨다. 가만히 창문을 통해 진흙탕 속을 바라보고만 계셨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자율학습을 시켜 놓은 학생들을 만나려 하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셨는데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흙탕에서 노느라 그분을 보지 못했다. 전혀 야단을 치지 않으니까 아예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제자들만 무한한 긍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치자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그 진흙탕에서 빠져 나왔다.
그 중에 한 사람인 스데반은 동족더러 회개하고 나사렛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바울은 하나님이 오셨다면 상벌부터 주어야지 왜 가만히 있느냐, 그런 엉터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거짓말하지 말라고 스데반을 야단치며 돌로 때려 죽였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요1:9-11)
예수님은 삼년 간 모든 인간들을 향해 한 번 싱긋 웃어주시고 다시 교실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지금도 이 세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비록 주님은 승천하였지만 진흙탕 속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그분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께서 직접 양육하셨던 제자들을 통해 순전한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었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절대적 진리가 성경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진흙탕에서 노는 재미에 갈수록 더 푹 빠져버렸다. 예수님이 전혀 벌을 줄 시늉도 않는지라 그곳에서 빠져 나올 궁리도 않는다. 여전히 벌주지 않는 선생님은 선생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냥 계속 진흙탕 속에서 신나게 놀겠다는 뜻이다. 스스로 회개하여 진흙탕에서 빠져 나오길 기다리는 선생은 선생 축에도 끼지 않는다고까지 말하면서 말이다. 자기들에게 잘못된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벌주지 않는 선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억지는 없다. 아무 벌주지 않고 용서만 해주는 선생님이 틀렸다는 반발이야말로 치사한 변명 내지 핑계에 불과하다. 그런 선생님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그들도 분명히 안다. 불신자들 눈에는 예수 믿는 신자들이 여전히 진흙탕에 같이 남아 있거나 빠져 나갔어도 그 옷을 깨끗이 빨아 입은 것 같지 않아 싫어한다. 그러나 진흙탕 밖에서 조용히 빠져 나오길 기다리는 예수님은 좋아하고 존경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방법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또 예수는 존경하면서도 그분이 제시한 구원의 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회심보다는 진흙탕 속의 놀음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한 것이라.”(요3:19) 그들은 선과 의를 좋아한 것이 아니다. 죄와 악을 좋아하여 능동적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선과 의는 아주 미워한 것이다. 선과 의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자기들의 죄와 악이 들통 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분명 좋은 분인 줄 알지만 그분을 믿고 따르려면 자기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이다.
성경이 예수님을 빛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을 어둠으로 유비한 것은 참으로 정확하다. 빛은 절대로 어둠과 공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둠도 빛과는 상극이다. 그래서 어둠은 항상 어둠에 머물러 있기만을 좋아한다. 어둠은 어둠끼리 모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이 조금이라도 어둠을 싫어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여기면 당장에 어둠의 본색이 상실된다. 어둠은 절대 그 본색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므로 당연히 빛을 싫어하게 된다. 죽어라고 싫어한다. 빛을 인정하는 순간 어둠은 빛에게 완전히 자기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빛은 가만히 있어도 그냥 빛일 뿐이다. 빛은 항상 밝게 빛나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숨을 필요가 전혀 없다. 아니 숨는 것과는 전혀 본질을 달리 한다. 숨으면 빛이 아니다. 어둠을 없애는 기능과 사명이 빛의 본질이다. 빛은 그래서 어둠을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다. 어떤 장애가 있던 전혀 가리지 않고 밝음을 전파한다.
어둠이 스스로는 빛을 가로막을 수는 결코 없다. 어둠은 빛을 만나는 순간 바로 빛 가운데 흡수되어 함께 빛이 된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막는 장애물 뒤에 그림자의 형태로 숨어 있으려고만 한다. 항상 빛이 전혀 안 비취는 곳에 몰려 있거나 빛의 반대편으로만 찾아다니는 습성을 지닌다. 말하자면 어둠은 스스로 어둠이라고 밝히지를 않는다. 그 말은 어둠을 벗어나 빛 가운데로 들어오고 싶다는 뜻이 되므로 그 순간 어둠으로서 본색이 완전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20)
어둠을 진정으로 싫어하는가?
“빛과 어두움” 또 “진흙탕 속의 아이”라는 이 두 유비에 비추어 과연 우리의 회심이 바울의 것과 동일한지 다시 점검해보자. 자신의 구원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셨는가? 또 극렬한 예수의 반대자에서 적극적 전도자로 바뀌었는가? 세상이라는 진흙탕을 향해서 십자가 앞으로 무릎 꿇고 나오라고 소리 치고 있는가?
항상 전도에 전념하고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의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어둠과 빛을 분명하게 대조시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그래서 어둠을 사랑하여 어둠 속에 있는 자들로부터 비방, 멸시, 핍박을 받아야 한다. 이 또한 전도하여 종교적 핍박을 받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정부패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당하는 불이익과 피해를 기꺼이 또 담대하게 짊어지는 것이다.
참 신자가 현실적 불이익과 핍박이 있음에도 빛을 전하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다. 우선 진흙탕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어둠인지 절실히 체험했기에 두 번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그곳을 혐오하고 저주해야 한다. 자연히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져야 한다. 자기에게 어떤 험한 일이 생겨도 그 진흙탕에서만은 빠져 나오라고 권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예수님의 은총과 권능 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절감했기 때문이다. 밝고도 따뜻한 빛 가운데 들어온 자만이 어둠이 얼마나 어둡고 추운지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보호와 인도에 따르는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충만함으로 넘쳐난다. 그래서 정말 자기 목숨을 잃더라도 새롭게 얻은 그 충만함을 절대 놓치지 않을 만큼 새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당연히 아직 새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어둠으로 오직 어둠만 사랑한다면 아무리 전해도 진흙탕 속에 빠져 나오지 않으려 할 것 아닌가? 우리가 전도할 때마다 느끼듯이 말이다.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고 눈앞에서 큰소리로 야단치지 않는 한에는 그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 자에게 전도는 불가능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바로 그러니까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이뤄지는 법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예정하시어 선택한 자의 인생에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로 태중에서부터 분명히 간섭 인도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가시적 영역에서 당신의 일을 대행할 사람과 사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불신자에게 현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일순간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뒤바꾸어주는 일은 없다.
바울의 예에서 보면 아나니아보다는 스데반이 바로 그런 역할을 맡았다. 아나니아는 이미 예수님 앞에 완전히 깨어진 영혼을 최종적으로 거두는 역할을 한 것뿐이다. 그 전에 이미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에서, 또 회당에서 율법을 두고 토론하는 과정 중에 바울의 견고한 진에 작은 틈새가 생기게 했다. 그래서 바울더러 자기 영혼의 가난한 실상을 다시 점검하고 예수에 대해서 계속 갈등과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다. 구도자라는 이름대로 율법 외에서도 진리를 찾아 볼 생각을 만들어 준 것이다.
아무리 세상사람 전부가 진흙탕에 빠져서 신나게 놀고 있고 그들에게 십자가 진리를 전하는 자를 자기들 노는 데 방해가 된다고 두들겨 패려 들어도, 그들 안에는 사울같이 갈등하는 자는 있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참 진리 즉, 자기 일생을 걸만한 길을 찾고 있는 자가 있다. 비록 그마저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로 예비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신자가 바로 그런 자를 찾아내는 것이 전도다. 그래서 진흙탕에서 언뜻 고개를 교실 쪽으로 돌리게 만들어야 한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21) 하나님을 몰랐던 자신의 지난 모든 인생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춰보았을 때에 몽땅 죽어 마땅한 죄였고 자신 또한 철저하게 더럽고 추해 의롭고 선한 것이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결국 무슨 말이 되는가? 복음을 전하는 신자가 바로 그래야만 전함을 받는 자가 수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회심을 한 자는 철저한 죽음에서 철저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철두철미 확신하는 자다. 그러니 철저한 죽음 가운데 빠져 있는 자를 만날 때마다 철저한 생명으로 옮기고 싶어서 안타깝고 불쌍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바울처럼 세상 어느 쪽에서도 동조를 못 받는 한이 있어도 더욱 힘을 내어 예수를 주라고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전함을 받는 자도 철저한 죽음이 철저한 생명으로 바뀐 것을 목도할 수 있어야 전해지는 복음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여러분의 회심은 바울과 비교해 어떠한가? 극적인 체험을 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열심히 예수를 전하고 있는지를 따지자는 뜻도 아니다. 단지 예수를 몰랐던 이전의 생활 방식과 사고체계가 너무나 더럽고 추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돌아가지 않겠는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알고 믿고 따르는 새로운 생활방식과 사고체계가 너무 귀하고 좋아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바꾸지 않겠는지 묻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삶이 현실적으로는 많이 후패하고 내 존재가 거룩과도 한창 거리가 멀더라도 말이다.
10/20/2009
유타대학촌 교회 1/12/1997 주일설교를 보완 정리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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