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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2:6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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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말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0-62)
스팔타카스와 십자가 처형
로마 시대 노예 반란을 그린 스팔타카스라는 영화의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반란을 평정한 로마 사령관이 노예대장과 그 직속부하더러 칼을 들고 싸워 이기는 자에게는 십자가처형을 시키겠다고 명합니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떠든 두 학생더러 서로 뺨 때리는 벌을 준 셈인데 친구 사이에는 미안해서라도 처음에는 살살 때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철천지원수인 것처럼 격렬히 싸우다 대장이 부하를 전혀 망설이지 않고 찔러 죽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기에 사랑하는 부하 대신에 자기가 당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칼에 찔려 죽는 것과도 도무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로마가 제국의 통치에 맞서는 자에게 가차 없이 십자가 처형을 시켰고, 주님도 그런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금주는 주님께서 수난 받은 고난주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배드립니다. 많은 신자들이 일주간 내내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더 실감해보려고 금식하거나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거나 간혹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재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식에 동참하지 않는 신자라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애틋한 심정에 젖습니다. 얼마 전에 십자가 처형을 실감나게 묘사한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고난주간의 그런 행사들이 뭔가 형식적인 것 같고, 또 우리의 안쓰러운 마음도 엄밀하고도 솔직히 따져보면 조금은 가식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주님의 고난을 회상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신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어떤 극심한 고통도 그분의 십자가 고통의 1/100 아니 1/1000이라도 될까요? 주님을 위해 좌우에 날선 로마 군인의 칼에 기꺼이 찔려 죽을 수 있지 않는 자라면 그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주님께는 죄에 빠진 인간을 보고 민망하고 통분해 하신 당신의 심정이 정작 더 고통스러웠지 않겠습니까? 우리 또한 진정으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려면 주위의 사단에 미혹된 영혼들부터 참으로 안타까이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온전히 초대될 때까지 꾸준히 눈물로 기도하며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잠시 일주간 섣부른 감상에 젖다가 마는 연례행사로는 그분의 고난에 동참은커녕, 신자 스스로의 영적 만족 내지는 체면치례 한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 가운데 있지 않았다.
거기에다 수난일을 회상할 때에 거의 모든 신자들이 간과하는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금요일에 주님은 고난 가운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뜰에 잡혀와 있는 본문의 상황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물론 그 육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고 얼마 안 있어 빌라도 법정과 십자가에서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또 가장 흉악한 죄인도 받지 않을 온갖 수모, 비방, 조롱, 멸시를 다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 고난과 상황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태초 전부터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세워두신 경륜과 일정대로 모든 환경과 사람과 사건을 당신께서 주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각본을 쓰시고, 연출을 맡으시고, 당신께서 직접 주연하시고, 베드로와 열두 제자와 대제사장과 빌라도 등의 조연배우들을 일일이 캐스팅하셨고, 조명과 무대장치 등을 다 마련하여 드라마를 이끌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드디어 골고다 언덕이라는 마지막 절정을 향해 숨 가쁘게 치닫고 있는 중입니다. 엄밀히 말해 당신 뜻대로 당신께서 감독 주연까지 맡고 있는데 고통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비록 모든 사정이 고통스럽긴 해도 주님의 내면은 오히려 다가올 승리를 예상하며 감사로 가득 차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 아니겠습니까?
비유컨대 권투선수가 세계 챔피언 쟁탈 시합에서 마지막 15라운드 공이 울리기 직전까지 왔고 또 전원일치 압도적 점수 차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분명히 15회까지 오도록 많은 고통이 있었고 지금도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하는 상대의 펀치를 맞고 있기에 아주 힘들긴 합니다. 그러나 이제 곧 영광스런 승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까? 찬란한 챔피언 벨트와 트로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선수가 느끼는 기대, 설렘, 감격은 엄청날 것입니다.
성금요일에 대한 복음서 기록을 잘 살펴보십시오. 예수님 한분을 빼고는 모든 주변 상황과 사람들이 완전히 미처 돌아갔습니다. 전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뭔가에 급히 쫓기듯이, 올바른 이성과 지성으로는 해선 안 되는 일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짓거리들을 자행했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가룟 유다의 배반은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뿔뿔이 도망간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순진하고 열정적이라 본의 아닌 실수가 잦았던 베드로마저 하녀의 닦달에 그 자랑하던 의리는 휴지조각처럼 너덜났고 정말로 치사하고 비겁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삼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배웠던 수제자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더럽고 추한 실체가 사단의 장난에 놀아나 훨훨 춤추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만은 사단이 벌여놓은 그 광란의 춤판에서, 당신께서도 온갖 수치와 고난을 당하면서도, 단 한 치도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떤 심문과 조롱에도 답변 하나 하지 않았던 의미가 여럿이지만, 당신께선 전혀 두려워하거나 조급해 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분은 오직 주님뿐이었습니다
성육신하신 궁극적인 뜻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궁극적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는 것입니까? 물론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라면 구태여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을 주려고 예정한 자를 죽기 직전 혹은 직후에 천국으로 인도하면 끝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다른 종교의 그것과 아주 다른 점은 살아 있는 동안에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지 앎으로써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17:3) 말하자면 구원 얻은 후에 주님의 은혜와 권능 가운데서 범사에 넉넉히 승리케 하는 것이 주님이 성육신하신 최종 목적인 것입니다.
말구유에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에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3)라고 찬양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문을 잠그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오셔서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요20:19)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주님이 태어나실 때와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이 모두 평강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구원 받은 것만 붙들고 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정말로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양보하여도 그분을 향한 믿음만큼은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성금요일에 주님을 회상할 때도 사실은 그분의 고난보다는 평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또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던 실제로 주님 안에서 평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그 현장을 주도하기에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어리석고 무능하며, 무엇보다 탐욕과 교만과 죄에 찌든 인간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기는커녕 의지적으로 범사에 감사하려 해도 잠시 잠간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솔직히 기도마저 안 나올, 아니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기억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범사에 평강을 유지하는 일이 초자연적 권능을 받아야만 가능하리라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 평강이 어디서 올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베드로를 그윽이 쳐다보신 눈길입니다.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은 자기가 택한 자에게 어떤 경우가 생겨도, 비록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해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관저의 뜰은 밤중에 미쳐 돌아가는 사람들로 혼란의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주님의 관심은 오직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가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어느 구석에 숨어서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까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닭이 세 번 울자 비로소 베드로가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금방 베드로가 당신의 제자인 줄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주님은 정확히 베드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또 고개를 돌렸어도 사람들이 모르게 바라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길 사이에 교감했던 의미들은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도 눈치조차 못 챘습니다. 그 성급하던 베드로도 이때만은 스승의 뜻을 알았습니다. 조롱, 멸시, 비방, 야단, 정죄는 물론 판단과 재확인하는 뜻이라곤 전혀 없이 주님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최소한 야단치기는커녕 나를 용서해주고 또 이 자리에서 끝까지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점만은 확신했을 것입니다.
정작 고난주간에 할 일은?
여러분이 지금 어떤 경우에 처했든지 간에 주님의 이 눈빛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알고, 믿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나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해서 주님의 동행하심에 확신 없습니까? 너무나 어리석은 착각이자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염려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분은 우리가 어떤 땅 끝에 가더라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세상 끝날 까지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모든 성도에겐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날까지, 아니 마지막 부활의 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인을 쳤습니다. 절대로 변개, 수정, 포기,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입성할 자녀답게 살라는 것이 이 구절 전후 문맥의 뜻입니다. 단순히 도덕적 선함을 실천하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천국에 들어갈 자답지 못하세 산다면 내주하신 성령이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주님이 함께 하셔서 당신의 영광 가운데로 이끌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마저 모르거나 잊고 있다면 더더욱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권투시합 15라운드의 초반이나 중반에서 아주 열세에 몰려서 두들겨 맞느라 너무 아파도 마지막 공이 울리면 승리의 월계관은 우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조금 힘들다고 그 시합의 주관자에게 의심, 불평, 부인하려 들면 얼마나 어이없겠습니까?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여서까지 이미 그 월계관을 확보해 놓았는데도 말입니다.
육신적 큰 질병이나, 불경기로 인한 경제적 고난이나, 왜곡된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여러분 인생을 이끄시는 이는 여러분이 아니라 바로 주님입니다. 그분이 각본, 연출, 주연까지 맡고 계십니다. 그분이 각본을 짰다면 비록 현재는 고통스러워도 그 결말도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맞도록 이미 짜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고난 주간에는 더더욱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어떤 고난, 슬픔, 상처, 문제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꺼내 놓고 그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받으시어 평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보혈의 은혜가 기도하고 찬송한다고 그냥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때로는 원망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주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윽이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처형의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조연으로 캐스팅한 자는 베드로가 아니고 사실은 사탄이었지 않습니까? 신자를 훼방할 수 있는 존재는 사탄뿐인데 그 사탄이 최고의 지혜를 짜내어 꾸민 골고다이지만, 주님이 그 모든 흉계를 다 꿰뚫어보시고 그것마저 이용해 부활 승리로 이끄셨지 아닙니까?
주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징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어리석고 연약하며 무엇보다 아직도 죄의 본성이 생생히 살아있는 우리가 어울리지 않게 수난일이라고 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듯이 괜스레 감상에 젖으려들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베드로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주님은 지금도 나를 세상에서 단 한명의 사랑하는 사람으로 삼아서 나만 바라보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환난 가운데 있더라도 이번 주간 동안에 오히려 나를 그윽이 바라보시는 주님의 사랑의 눈길을 발견하시어 너무나 기뻐하여야, 최소한 평강을 되찾아야 합니다. 또 그래야만 주님이 고난당하신 목적과 의미가 정말로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4/1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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