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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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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믿음, 그 교묘함에 대해서
마6:25
2009.7.26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을 그리스어 사본에서 읽으면 이렇게 되어 있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먹는 것을 두고 무엇을 먹을까, 입는 것을 두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백합화보다 귀합니다. 여러분에게 입을 것이 없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입겠습니까? 바로 그이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옷을 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내용들이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주제어는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무엇을 먹을까’하는 말은 ‘입을까’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붙여진 말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의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옷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뭐 유명한 사람이라고, 옷을 넣어두는 방을 따로 두고 수백 벌의 옷들을 갖추고 있어서 이른바 코디네이터를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더구나 이스라엘 보통 사람들처럼 겉 옷 한 벌 겨우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 사치스럽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넘어선 말씀입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옷을 벗는다’는 것은 ‘육신을 벗는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옷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어떤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또 이 육신을 입든지 벗든지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연연한다고 해서 사람이 그걸 어떻게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 말씀을 이해 할 때 우리가 일상으로 옷을 입고 벗고 하면서 사는 것도 인생사에 짐이 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 즉 육신의 옷을 벗고 입는 문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쪼잔하게 먹고 입는 걸 하나님께 맡기고 살라는 세속적인 권면이 아니라, 죽든지 살든지 하는 문제, 죽고 사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뜻과 섭리를 믿고 염려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 믿음이란 결국 이처럼 ‘마음 놓고 턱 맡김으로 염려에서 벗어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들은 교묘하게 다음의 4가지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3:1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등과 같이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결국 ‘믿음의 종교’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신학자 [마커스 보그]에 의하면 믿음은 네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남의 말을 참 말이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좀더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확인할 길이 없는 것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를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확인할 수 없지만 그저 ‘승인Assent’하는 겁니다. 이런 믿음의 반대는 ‘의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승인으로서의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면 무조건 사실 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 유독 사이비가 준동하는 여러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승인’으로서의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것이 본래부터 [믿음]으로 이해된 것은 아닙니다. 근래에 와서 이런 형태의 믿음이 믿음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8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과학 사상이 발전하고, 이와 더불어 진리를 ‘사실’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창조, 노아의 이야기나 홍수 이야기를 배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 같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이렇게 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믿음’이란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사실이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사실로, 참말로, 정말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시하게 되었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런 종류의 믿음, 승인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내려온 바른 믿음의 전통도 아닙니다.
둘째. 그러면 18세기 이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턱’맡김입니다. 내가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승인하면서 시작되는 믿음이 아니라 내 처지와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해 “나는 하나님만 믿습니다.”할 때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때 믿는다는 것은 성경이야기나 교리 같은 것을 참말로 받아들인다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식의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명제, 교리나 신조같이 말로된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신의와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뢰로서의 믿음trust'또는 ‘턱 맡기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표현한대로, 천만 길도 더 되는 깊은 바닷물에 나를 턱 맡기고 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잔뜩 긴장을 하고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더 빨리 가라앉고 말지만, 긴장을 풀고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물에 턱 맡기고 있으면 결국 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뜨게 하심을 믿고 거기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반대 개념은 의심이나 불신이 아닙니다. 승인으로서의 믿음과는 달라서 불안, 초조, 두려워함, 안달함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턱 맡기는 믿음’이 있으면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해집니다. 예수님이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강조해서 가르치신 믿음도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믿고,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처럼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와 긴장이 많은 사회에서 우리에게 이런 신뢰의 믿음trust, 마음 놓고 턱 맡김으로서의 믿음은 어떤 진술이나 진술에 대한 승인이나 동의로서의 믿음보다 더욱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은 그렇기에 우리를 이 모든 어려움에서 풀어주는 해방과 자유를 위한 믿음입니다.
셋째. ‘믿음직스럽다’거나 ‘믿을 만하다’라고 할 때의 믿음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음직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 번째 믿음부터는 ‘자기’를 벗어난 ‘이타’의 믿음이 됩니다. 내가 나를 위한 믿음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내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실성으로서의faithfulness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무익한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faithfulness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반대 뭘까요? 그렇습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가 아무 때나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이정도의 믿음은 되어야 우상숭배를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 ‘봄으로서의 믿음’입니다. 이른바 ‘visio'로서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교리로 왜곡하지 않고 하나님의 본성과 뜻이 깃든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사물의 본성이나 실재, 사물의 본 모습, 실상, 총체적인 모습을 꿰뚫어 봄으로서 생기는 결과로서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말하자면, 직관, 통찰, 예지, 깨달음, 깨침, 의식의 변화 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확신입니다. 일종의 세계관이나 역사관같이 세계와 삶에 대한 총체적인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믿음의 성장과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실 때 그는 이 마지막 믿음의 언덕을 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믿음의 수준을 확인하고 완성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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