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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7:3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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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품위 있는 삶
고전7:32-35
2009.8.23
내일부터 우리교회 목사님들은 단체 여름휴가를 지내게 됩니다. 교회는 나 혼자만 남아서 이른바 '소금쟁이'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도 새벽기도회를 한 주간 했지만, 심심하기도 해서 말씀 잔치를 열겠다는 뜻입니다.
여름은 휴가를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산과 강과 도로가 가득 찹니다. 휴가란 도대체 뭘까? 하던 일을 놓고 잠시 쉬는 것입니다. 충전 이라고들 하지요. 그건 단어적인 설명이고, 사회적인 속내는 휴가를 보낼만한 '품위 있는 삶'으로 자신을 해석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동해안으로 휴가를 떠나는 사람은 더 나은 품위를 위해 해외로의 휴가를 꿈꿉니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더 품위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골프에서 승마로, 승마에서 요트로 바꿔 타며 즐기길 바랄 것입니다. 이게 자신의 삶을 품위 있게 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면 오늘 과연 그리스도인의 품위 있는 삶은 어떤 것인지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전 7장에서 혼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로 시작됩니다. 이런 몇몇 구절들을 보면 바울은 마치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신 생활을 강조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러셀 같은 대 문호도 이 구절 때문에 '결혼이란 단지 간음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바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우들을 미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결혼과 성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성령 받고 구원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6:12-13)는 방종주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는 정 반대로 육체는 천한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부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부부간의 성생활까지를 금기시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구절은 바울의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이 하던 말을 바울이 인용을 하는 것입니다. 1절 전체는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적어 보낸,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금욕주의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방종과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교회 안에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에 대해서,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라고 합니다. 긍정적인 면까지 들어가면서 설명을 합니다(12-14). 처녀들이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에서는 아주 조심스럽습니다(6). 개인적인 생각이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까지 합니다(12). 이렇게 바울이 결혼에 대해서 유보하는 입장에서 권면을 하지만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당시 상황을 두 가지 점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결혼이란 그렇게 아름답게만 볼 수 있는 제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혼이 죄는 아니라고 하면서 "그렇지만 그들이 살림살이로 몸이 고달플 것이므로 내가 아껴서 하는 말이다(28)."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결혼제도는 여자에게 많은 노동을 부여했습니다. 결혼함으로 겪는 고생이 여자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처녀들이 결혼을 하는 것은, 오늘날 처녀들이 꿈꾸는 신혼여행, 달콤한 신혼 생활, 소형 아파트와 승용차를 굴리면서 사는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결혼이란 시댁에 일꾼으로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데려갈 때 돈을 지불했습니다. 아내들은 시집의 남자들을 '주인'이라고 불렀지 '여보'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배울 수도, 법정에 설 수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선천적으로 거짓말을 잘 한다는 사회적인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런 여자들의 삶을 보고 바울은 '아껴서 하는 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결혼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사이비 종교인들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포기하거나, 도피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29절을 보면 그가 강조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29절 이하로 나오는 30-31절이 같은 의미의 문장으로 계속됩니다. 이게 바울이 생각하는 종말의 삶입니다. 그것은 ".....아닌 것처럼"사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꾸며서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열광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끌려가지 말라고 합니다. 금욕주의나 방종이나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거기 빠져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여자가 자기 소유인양 하지도 말아야 하고 필요 없는 양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종말이 가까운 사람들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또는 없어도 있는 것처럼'살라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울의 종말론적 신앙 철학입니다.
이제 우리도 바울의 제안을 따라가 봅시다. 남편 된 사람들은 아내 없는 사람들처럼 살면서 아내를 그의 의무와 역할로부터 좀 해방시켜주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도 남편이 아내에게 대해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아내는 남편이 없는 것처럼 살아보면 어떨까요? 인생의 모든 의미와 행복을 남편이 부여하는 의미와 칭찬에만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 행복을 추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이 없다고 생각하면, 경제권이나 자기 인생에서 더욱 주도적이 되고 남편이나 그 스스로 더욱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아직 우리의 의식에서 남편과 아내는 '주종'의 종속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않은 게 사실 아닙니까?
송창식이 부른 노래의 노랫말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사흘만이라도 여행을 떠나자
마저 못한 일들일랑 등 너머로 밀치고
어딘가 있을 내 노래를 찾아
사흘만이라도 여행을 떠나자
남도의 이름 모를 장터에선
선한 이들의 눈들과도 마주치며
가다가 비가 오면 머물러도 좋고
가다가 바람불면 노래를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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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내 모습을 찾은 듯이 좋아라.
송창식의 '당기당기 당기여행'
여행을 왜 떠나는 겁니까? 휴가를 왜 가는 겁니까? 재충전이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생긴 이후로 만들어진 단어이고요, 실상은 자기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구속된 일상을 벗어보려는 자의식인 것입니다. 지난 장년 수련회 때 뭐가 좋았습니까?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당하지 않고 해주는 밥 먹으니 좋지 않던가요? 그겁니다. 왜 아내를 집 밖으로 내 보내지 않습니까? 집에서 시중 들 사람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그저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자기 자식, 자기 부모 밖에 모르는....자기 식구 밖에 모르는 이른바 성실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에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마음은 더 할 수 없이 쫓기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런 상태를 '마음이 갈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갈라지는 상태가 결혼한 사람에게 더욱 심하다는 것입니다. 32-34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갈라진 채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 바울의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의 삶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마음이 갈라진 채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상식에 따르면, 결혼한 남녀가 서로에게 온 마음과 시간과 생의 에너지를 바치는 것은 미덕입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종말의 빛에서 사는 사람은 이런 삶이 전부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삶이 완성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내가 오늘 드리는 이 말은 여러분들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더욱 유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오늘 설교의 골격이 시작됩니다. '품위 있는 삶' 또는 '품위 있는 인간으로의 생활'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갈라지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는 것(35)입니다. 이걸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품위 있는 사람'또는 '품위 있는 삶'은 어떤 걸 두고 말합니까? 고고한 지식이나, 학식, 권세와 명예, 재물이나 성실성을 갖춘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까? 도리를 다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을 말하곤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을 두고 '품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적어도 자기 가족,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에게만 정성을 쏟는 것을 미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머무는 한 그들은 세상살이의 고달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 단계에서 벗어나서 '....이 없는 것처럼'사는 삶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서로를 없는듯 있는듯 무시하며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머물지 말고 마음의 갈라짐이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주님을 온전히 섬긴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지닐 품위도 아닙니다. 죽은 아버지를 장사하겠다는 아들에게, 아내와 남편이, 부모와 자식이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다는 말씀 속에 다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품위 있는 사람' '품위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없는 것처럼"사는 사람들인 만큼 겉모습이나 세상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티 나지는 않지만, 그들은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 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고후6:8-1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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