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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4:1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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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조남식과 최수정의 잔칫날을 앞두고
눅14:15-24
2009.9.6
이 달 12일에 조장로님의 막내 남식군이 수정양과 결혼을 합니다. 주례는 제가 서는데, 지난주에 결혼할 두 사람에게 이런 저런 숙제를 내주려고 기도 하는 중에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이 쏟아졌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성서에 나타난 '잔치의 비유'를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참 교훈을 누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잔칫집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잔치에 갈 수 없다고 둘러대는 말들이 영 시답지 않습니다. 밭을 사기 전에 이미 조사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소를 시험해 보는 것도 꼭 그 날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장가를 들었다고 하루 종일 새색시하고 붙어 지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잔치에 갈 수 없는 정당한 사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가기 싫은 겁니다. 첫 번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은 그래도 '양해를 바랍니다'하고 예의를 구하지만 세 번째 사람은 그것도 없이 못 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잔치의 풍경을 '하나님 나라 잔치'에 비유 하고 계십니다.
이 잔치는 우리네 잔치의 풍속도와는 다릅니다.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 하기를 거절하고 나아가 그 잔치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잔치의 초대장을 받은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잔치가 아니라 그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 잔치만 없으면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지 않았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은 그만 그 잔치 때문에 인간성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눅15장에도 잔치가 나옵니다.
이른바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을 위한 잔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큰 아들은 모범적입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방탕하고 반항적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어린아이도 알 수 있습니다. 잔치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잔치가 벌어지자 두 사람의 인간성은 정반대가 됩니다. 본색이 드러납니다. 모범적인 것 같았던 큰 아들은 격분하고 비난합니다. 아버지를 거칠게 몰아세웁니다. 결국 큰 아들은 그동안 묵묵하게 살아온 그의 삶이 진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공개합니다. 그동안 그는 욕심을 숨기고 억누르면서 살아온 어두운 인격자였습니다. 그는 동생에 대한 연민도 애정도 지니지 않는 매정한 인간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위선이었습니다. 이 또한 잔치 때문에 된 일입니다.
마20:1-16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는 어떨까요?
이른 아침에 일하러 온 사람들은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루 품삯만 받으면 불평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이 오후 늦게, 일이 거지반 끝날 무렵에 일하러 온 이들에게도 그들과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문제, 아니 인간성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안색이 변했습니다. 주인에게 항의 합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그 성실성은 그만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계산이 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는 이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주인이 오후 늦게 일하러 온 사람들에게 그날의 생계비용인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이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 잔치입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는 두서너 가지의 잔치 비유를 어떤 통일성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한쪽의 사람들, 곧 성실하고 모범적인 큰 아들, 이른 아침에 일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그 잔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닥쳐오고 침입해 오는 무조건적인 현실입니다. 작은 아들, 그는 그에게 일어나는 잔치에 대해서 어쩌고 저쩌고 할 처지가 못 되지요. 조건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황송하고 감사할 뿐이지요. 오후 늦게 와서 한 시간 정도 일하고 하루의 품삯을 받는 일꾼들도 주인의 파격적인 행동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자, 오늘 우리가 은혜로 받은 본문은 어떻습니까?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이면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노하여 거리나 밭으로 나가서 아무나 데려 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차지 않으니까 강제로라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들의 의견 따위는 묻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무식하고 용감한 주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적인 표현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그런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초첨은 주인이 그렇게 할 때 그들은 그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르기만 하면 올 사람들이고, 그저 그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고 고마워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잔치는 잔치 중에 큰 잔치입니다. 거리와 골목에서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여전히 자리가 남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또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큰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이번에 말하는 그들은 가난하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부자거나 누구나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하튼 '울타리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잔치의 초청장이란 본래 '울타리 안'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법입니다. 가족이거나, 이런저런 인연을 맺어 '내 삶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그 주인공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급기야는 울타리를 허물고 말았습니다. '큰 길과 울타리 밖으로 나가라'가 그것입니다. 정식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 거절한 하나님 나라 잔치는, 이제 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울타리를 허물고 밖의 사람들에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억지로라도 채워라'는 구절을 오역하고 잘못 받아들임으로 5세기 초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을 척결하는데 써 먹었습니다. 우리 개신교의 어느 시대에서는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는데'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긴 합니다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요점은 '강제'가 아니라 '울타리를 넘다'에 있는 겁니다.
눅10:29-37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에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잔치에 초대받은 '울타리 안의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듯이 말입니다. 거의 꼭 같죠? 그러나 그들이 절대로 상종하지 않던 울타리 밖의 사람이 그에게 다가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죠? 그는 그에게 울타리 밖의 존재였습니다. 그의 진정한 이웃은 울타리 안이 아니라 울타리 밖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 그는 재난을 당하기 전에는 울타리 안과 밖을 엄격히 구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하고는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재난을 당하고 거리에 버려졌을 때 그 울타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되었겠지요. 그런 위기 앞에서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 물을 겨를도 없이 강제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아니, 이성적이고 관습적이며 종교적인 울타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고 보살펴 준 것은 앞에 나열된 [하나님 나라 잔치]의 현실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자기가 뜻한 바는 아니지만, 재난을 당하고 거리에 버려졌을 때, 그만큼 철저히 낮아지고 위기에 처했을 때, 울타리를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 잔치의 현실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큰 잔치의 비유(눅14:15-24)에서도 처음에 초대받은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 다 참석했다면, 거리와 골목의 사람들이나 울타리 밖의 사람들까지 참석하는 멋진 잔치는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올 줄 알았던 그들이 오지 않게 되자 빈자리가 많이 남았습니다. 잔치에 빈자리가 많으면 그 잔치는 망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잔치를 망치겠다는 위기 의식이 주인으로 하여금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문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위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생의 나날은 위기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믿음이 좋아도, 하나님께 단단히 붙어 있어도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의 위기 앞에서 울타리가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잔치'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는 위험인 동시에 기회인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들 생의 견고한 울타리를 허물면서까지 강제로라도 부르시는 그 간절함을 거절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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