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1:47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그 때 그 사람
요1:47
2009.9.13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어느 날 차안에서 그는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
위로하며 다정했던 사랑한 사람
안녕이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할까
어쩌다 한번쯤은 생각해줄까
지금도 보고 싶은 그때 그 사람
그 때 그 사람' / 심수봉
누구든 나이가 들면 '그 때 그 사람'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은 심민경의 노래 말처럼 슬프게 기억되는 '그 때 그 사람'이지만 말입니다. 이런 과거 회향적인 습속이 우리 몸에 배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단지 추억으로만 '그 때 그 사람'을 품고 살지는 않습니다. 현제 내 앞에 있는 사람도 자꾸 '그 때 그 사람'으로 여기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생이 저에게 전화해서는 자기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꼭 오라는 말과 함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몇 토막 하게 되었습니다. 자주 말씀드렸지만, 저는 근 40여리를 걸어서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큰 산을 하나 넘어야 우리 동네가 나오는데 저는 통학하는 친구들을 괴롭히곤 했습니다. 고개 마루에 오르면 늘 쉬어서 가야 했습니다. 그 때 마다 나는 친구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짓궂게 놀렸습니다. 어떤 아이는 아예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 두었으니까요. 그런데 친구가 전화로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그럽니다. "그 때 너는 참 못 된 놈이었는데. 너 네 교인들 참 불쌍하다."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긴 줄 알지만, 이런 대화는 우리의 삶 속에 누구나 어디서나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사람의 어떤 사건을 현재에 투사해서 현재의 그를 판단하고 선입견을 갖는 일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한 번 찍히면 영원히 찍힌다'는 속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대할 때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 남들이 그에게 대해서 뭐라고 하든, 한 사람 한 사람을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보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인상 보다는, 껍질속에 웅크리고 있는 본래의 모습을 보곤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세상의 상식으로 치자면 적당히 기회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빌립이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자, 그는 대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갈릴리 사람들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다나엘의 태도나 표정에서 그것을 읽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아주 불순한 말이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무시하는 건방진 태도입니다. 그야말로 나다나엘은 '그 때 그 사람'을 현실에 적용하는 대표적인 경우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되레 나다나엘을 칭찬합니다.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거짓을 모르는 참된 인물이다."였습니다. 설교자들은 간혹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신통력'을 이야기 합니다만, 이 이야기는 신통력에 관한 사건이 아니라 한 인간을 대하는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말 한다고 보아질 때, 신통력 운운은 조금 과장된 추측일 뿐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충격을 받고 금 새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꿰뚫어 보는 예수님의 신통력에 대한 무서움 때문이거나 경외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을 대하는 전혀 다른 방식이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사렛 어쩌고 하면서 깔보던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아들 어쩌고 하는 표현으로 바뀐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의 건방진 태도를 보고 문제로 여겨서 괘씸하게 여기고 퉁명스럽게 반응을 보였다면 나다나엘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 때 그 사람'을 적용하지 않고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에겐 그 때 그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수가라는 동네 우물가에서 어느 여자를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고 목이 말라서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대뜸 "당신은 유대 사람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면서 차갑게 거절을 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아주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유대인끼리라도 대낮에 여자와 단둘이 있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여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왠지 말투에서 싸늘함이 느껴집니다. 피곤에 지친 사람에게 물 한 모금 주면 될 걸 따지고, 은근히 유대인에 대한 반감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인 십중팔구 상대방으로 하여금 화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에 대한 판단을 내리거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말을 건데 대해서 여자가 응대해줬다는 사실이 반갑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응수를 하십니다. 이 이야기의 목적도 '예수님이 여자의 내밀한 고통과 형편까지 읽는 신통력이 있었다'가 아닙니다. 속단하지 않고 대화하는 예수님이 주제입니다. 과거가 어떠하던지, 현재를 받아 주시는 예수님의 인간 이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물을 달라는 이가 누군지 알았다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구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그 때 그 사람'에 붙들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리 없었씁니다. 그래서 다시 허튼 소리를 내 뱉습니다.
"두레박도 없는 양반이, 맨손으로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예수를 무시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런 좋은 우물을 만든 것은 야곱 같은 훌륭한 이가 하는 것이지 당신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물을 팔수도 없는 이가 생수를 준다니 무슨 가당찮은 이야기냐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야곱을 '우리 조상'이라고 하는데서 그녀의 허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족보를 따지고 따져 위로 올라가면야 사마리아 여자의 조상이 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외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지금 여자가 예수님을 극도로 깔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서 물러날 법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머뭇대지 않고 다시 말씀합니다.
"이 물은 또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목마르지 않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 물을 나에게 주세요."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자가 비로소 정신을 차려서 겸손해 졌구나 하는 것입니다. 또는 태도를 여전히 바꾸지 않은 상태애서 빈정대는 투로 '그런 물이 있으면 한 번 줘 보시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가 태도를 바꿀 이유가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만약 여자가 눈이 떠지고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면 예수님이 그녀더러 집에 가서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느닷없이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목마르고 피곤하시던 양반이 점점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젠 아예 물을 먹자는 마음을 포기한 상태처럼 보입니다. 여자는 이 당혹스러운 물음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을 했나요?
"남편이 없다."
이 말은 참 재미있습니다. 이 말은 이러구 저러구 한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사생활을 말하기 싫다' 또는 '말할 게 없다'입니다. 더 이상 여자는 허세를 부릴 틈이 없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예수님은 허세의 껍질을 깨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하는 생수의 의미입니다. '그 때 그 사람'에 붙들려 살지 말고 현재에 살라는 것입니다. 그 스스로 그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 때 그 사람'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가장 귀한 존재로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 때 그 여자'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짜증을 내며 얼마 던지 대화를 그만두면서 나무랄만한 상황임에도 그녀에게 말을 거십니다. 껍질을 깨고 참된 자아를 드러낼 때까지, 거듭 참고, 다시 말을 걸고 질문을 합니다. 어쩌면 그 여자가 부끄러워하거나 아파할 문제까지 파고 들어가 곪은 것을 터드려 놓습니다. 늘 그 상처에 여자는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항상 '그 때 그 여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녀의 환부를 들춰내자 그는 당혹스러워 했지만 한 편으로는 속 시원해 하면서 더 이상 거기 붙들려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여자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과도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교회를 다니다가 어느 날 홀연히 예수와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그이 말씀을 통해 '그 때 그 사람'에서 탈출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맨 날 '그 때 그 이야기'나 '그 때 그 사람'에 붙들려 살면 결코 이런 다시 남의 변화는 없습니다. 심수봉의 노래나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 이십니다."
이것이 새롭게 태어난 사람의 선언입니다.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가 느껴지고 보여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는 온전히 예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 편견과 경험에 근거한 비난과 판단을 일삼던 것이 멈추고 마침내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는 그 때가 바로 '생수의 강'이 배에서 시작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 때 그 사람'이나 '그 때 그 사건'들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가로막거나 상대방을 가로막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요? 교육도 혁명도 사람을 바꾸어 놓지 않습니다. 필요한 사람으로 포장을 달리 할 수는 있습니다.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는 이런 방식에서 이것이 가능합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늘 새로운 가능성으로 새롭게 대하며, 마지막 남은 허세의 껍질까지 깨뜨려버리고, 감동과 떨림이 있는 본래의 자아와 부딪치고 만나는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들뜨고 흥분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보지 못한 말을 하게 되고, 일찍이 해본 일이 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 때 그 사람'으로 삽니다. 누구를 대할 때도 '그 때 그 사람'으로만 봅니다. 이게 병폐입니다. 그래서 생수가 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겐 '그 때 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걸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