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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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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예수께서 비유를 하나 말씀 하셨다.
눅18:1-8
2009.9.20
우리가 18장을 읽기 전에 17장의 하반부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을 예수님이 받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노아와 룻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와 롯과 같은 태도를 지니라는 것이었죠.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노아와 롯은 많이, 열심히, 오래 기도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끝까지 신뢰하고 기다린 사람들입니까?”
이런 맥락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비유를 우리는 '혼자 사는 여인과 재판관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결론내립니다. 이 말씀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또는 ‘응답될 때 까지 줄기차게 구하라’는 말씀이라고 믿어 버립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앞장의 노아와 롯의 아내와 같은 맥락에서 이 말씀이 우리가 흔히 해석해 왔던 대로, 어떤 식으로 얼마나 많이 기도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먼저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소개되죠. 그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도 별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의 직업은 재판관입니다. 성서는 그가 도시에 살고 있고, 재판관이라는 정보를 흘립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얼마나 부자이며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얼마나 그가 거만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은 그를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지요? 그렇습니다. 혼자 사는 여인입니다. 구약성서에서 과부는 무력한 사람을 대표합니다(출22:21-23, 사1:17, 렘22:3). 당시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었습니다. 재판관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사람들이죠. 이렇게 사회적으로 갈리는 극명한 두 사람을 비유로 쓰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기도’를 가르치려고 그러시는 걸까요? 아니면 앞에 나온 바리새인들의 물음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를 말하기 위해서 일까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어떤 사람에게 임하느냐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는 ‘불의한 재판관’일까요 아니면 ‘과부’일가요? 불쌍한 과부는 바로 ‘노아’와 ‘롯’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불쌍한 과부의 무엇이 ‘하나님 나라를 맞을 적임자’라는 말씀인가요?
여인은 재판관에게 "내 적대자로부터 나의 권리를 찾아 주세요."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을 생각하는 이들은 이 간청의 내용에 대해서 별로 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멋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면 과부의 이 행동이 핵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알아야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기도의 참뜻을 알게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와 같은 식으로 말씀을 이해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기도도 '탐욕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여인이 재판관에게 간청한 그 행위가 [기도]가 될 수 있을까요? 이걸 기도로 본다는 것 자체가 아주 우스운 일입니다. 우선은 그 여인이 간청하는 대상이 '나쁜 재판관'입니다. 이 나쁜 재판관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걸 하나님께 하는 성도들의 기도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재판관에게 간청하는 내용이 뭡니까? 뭘 들어 달라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해 달라는, 없는 것을 있게 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는데 그걸 바로 잡아 달라는 것입니다. 공동성서 번역은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였습니다. 이 여인은 사회의 약자라는 이유로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여인은 단지 그 사정을 호소하면서 그에게 부당한 행동을 한 사람을 법정에 고소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안티코스' 즉 ‘원수’라는 말이 나오고 그러니까 뭐 대단한 것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관은 억울한 사정을 조사해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권리를 되찾아 주면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정의를 세우면 되는 일입니다. 이게 뭐 떼를 쓰고 그래야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에크디케손'즉 '원한을 푸는 것'입니다. 여인의 이 행위 속에는 재판관의 동정을 사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되는 일인데 재판관은 어떻게 합니까? 아니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그는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그의 인간됨을 예수님은 이미 상세히 알려 주고 계십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정한 일을 그냥 묵살합니다. 완전히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포기합니다. 오늘날에도 재판을 하는 사람들 보면 국가를 상대로 하는 재판 같은 경우 ‘그만 두고 싶을 때가 한 두 번 이 아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인의 형편은 몇 갑절 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뭐 더 좋은 것이 생겨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의 기본권리’를 잃지 않고 되찾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5절은 재판관을 아주 '못 견디게 했다'고 표현합니다. 성가신 정도가 아니라 '못 견디게 했다' 는 것입니다. 이 '못 견디게 했다'는 말은 '눈 밑을 때리다'입니다. 그렇다고 진짜로 눈 밑을 때린 게 아니라 재판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를 망신 주는 것입니다. 그게 '눈 밑을 때리다'입니다. 그것이 재판관을 못 견디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비유는 눅11:5-8에도 나옵니다. 거기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도 마지막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여인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창피해서 들어 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두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노아와 롯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비유로 한다면 바로 과부의 경우와 같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유효기간이 짧은 내 생의 생활에 있어서 어떤 유익을 도모하는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획득하는 무기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슨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무슨 신통력이거나, 내 대신 누가 나의 일을 대신 해 주는 그런 기능쯤으로 전락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낙심하지 않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쟁취는 무기가 ‘기도’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도 사회에서 무력한 것은, 형식적인 기도, 시간적인 의미에서 쉬지 않는 기도만 강조하는데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을 '낙심하지 않는 것' '끈질 긴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쟁취하는데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기도해서 ‘뭘 얻었다’ ‘뭐가 되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쟁취했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노아와 롯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 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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