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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2:2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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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야곱 같은 조상들이 되시라
창32:22-32
2009.9.30
추석을 현재형으로 말한다면 ‘후손들을 위해 좋은 조상이 되려는 자리’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조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조상이 되길 바라십니까? 누구나 후손들에게는 우리가 조상이 된다면 성서에 나오는 야곱과 같은 조상이 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어서 나라 이름을 새로 짓는다고 할 때,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을 짓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누가 좋겠습니까? 위대한 인물이 많은 것 같아도 막상 사람 이름으로 나라의 이름을 짓는다고 할 때 그런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개인의 이름이 나라의 이름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의 이름 [이스라엘]은 지금 [이스라엘]국가의 이름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야곱]을 아십니다만, 그는 한 나라의 이름이 될 만큼 영웅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야심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형이나 아버지까지도 속이는 야비한 사람입니다.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올 만큼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형에게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훔치는 사람입니다. 늙은 아버지를 속이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위험에 처하자 솔직하게 고백하는 대신 도망을 치는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야곱이 태어났더라면 국무총리도 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성서는 야곱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기존의 것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늘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부모 품에서 안락하게 살고자 했다면 절대로 형에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를 속여서도 안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난의 삶을 자처합니다.
우리사회는 지금 성공지상주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얼굴을 들고 다니지도 못하고, 동창회에도 갈 수 없고, 심지어는 교회 가기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성공을 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오로지 성공한 사람만을 평가하는 사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실패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실패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서울에 어떤 목사님이 계십니다. 훌륭한 인격과 삶을 살고 계신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교우와 갈등관계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가만히 있던 교우가 목사님더러 ‘교회도 부흥시키지 못한 목사’라는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목사님이 내게 말합니다. “이 땅의 어느 목사가 이 아킬레스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어.”라고 말입니다. 교회도 성공이 미덕입니다. 목사도 성공한 목사라야 목사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브라함이나 야곱을 비롯한 성서의 인물들을 성공한 사람들로 설교합니다. 성공하려면 야곱과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려서부터 모범적으로 자라서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기본 코스처럼 교육됩니다. 고생을 한다거나, 실패를 하거나, 손해를 보는 삶을 사는 사람을 경멸하고 깔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면 어떻게 실패를 하며, 고생을 하며, 궁색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야곱을 삶을 보면 어디에도 이런 성공적이고, 안락하고, 호사스러운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를 보호해 준적이 없습니다. 그냥 들판에 내 던져 놓았습니다. 그는 맨 몸으로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거기서는 잘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야말로 ‘개고생’하며 살았습니다. 20년간의 머슴으로 살았습니다. 말이 외삼촌이지 남보다 더 지독하게 부림을 당했습니다. 외삼촌에게 속아서 두 번이나 결혼을 했습니다. 품삯도 열 번이나 속았습니다. 이러고도 야곱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야곱을 축복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야곱의 축복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야곱처럼 살아 보겠냐고 하면 기겁들을 할 겁니다. 왜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 삶을 ‘축복’이라고 우기는 걸까요?
성서는 여기서 얄팍하게 성공한 야곱을 주시하는 게 아닙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손해를 볼 줄도 아는 야곱을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인에게 속아 20년을 허송세월한 바보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도 그가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야곱이 사랑을 위해 20년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진정한 사랑에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7년을 며칠처럼 여겼다.”(창29:20).고 합니다. 이것이 야곱이 셈하는 20년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계산하지 못합니다. 어디에 인생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를 알고, 거기에 자신을 던지는 결단과 과감성의 야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얄팍한 성공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야곱과 대조를 이루는 인물로 라반이 나오죠. 그는 딸들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종처럼 부리는 20년 동안에는 자기가 성공한 사람으로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실상 승리자는 야곱이 아닙니까? 야곱은 세상이 볼 때는 패배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쟁취한 승리자입니다. 사람과 세상에 속은 사람 같으나 마침내 이긴 사람입니다. 그가 20년이 지나 라반의 집을 떠날 때 아내들을 불러 의논을 하는데 두 여자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창31:14-16
라반은 딸들의 마음을 잃었고 야곱은 사람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20 년 동안 바보처럼 살면서 그거 하나 얻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곱은 에서와도 비교됩니다. 창 25:27-28에 보면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더 좋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에서는 이방인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여기서 고부간의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에서는 아버지와의 관계만 중요하게 생각했지 어머니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힘의 질서에서 외면당한 어머니의 생각,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가 라반으로부터 떠날 때도 아내들과 의논을 합니다. 실상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챈 것도 어머니의 생각이 아닙니까? 그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자고 할 때 머뭇거립니다. 그러자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뭐라고 합니까? “저주는 애미가 받겠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였습니다. 야곱은 이런 어머니의 편이 됩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날 때도(창31:14-16)역시 아내들의 말을 따릅니다. 라반의 딸들은 아버지를 비난하고 야곱을 신뢰합니다.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드라빔이라는 조상신을 훔쳐서 가지고 나옵니다. 야곱을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감수 하겠다는 결단 아닙니까? 아버지가 뒤쫓아 왔습니다. 그러자 라헬이 이럽니다. “만약 우리의 짐 속에서 아버지가 찾는 드라빔이 나오면 그 사람을 죽여도 좋다.”고 말입니다. 라헬은 말안장 밑에 감추고 월경중이라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아버지를 따돌리죠.
야곱의 아내들은 라반의 인생에 있어서 부품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의 주인공은 라반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외면당하는 여자들, 사람들의 마음을 삽니다. 20 여 년 동안이나 바보처럼 살면서 말입니다. 그게 야곱을 세우는 힘이었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세를 팝니다. 현실에만 눈을 두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산 팥죽 한 그릇의 상상은 현실이 아닙니다. 미래의 어느 날, 그것은 실제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약 없는, 보장도 없는 미래의 그날을 보며 삽니다. 야곱은 현세적으로는 물질의 복이나 권세의 복이나 아내와 백년해로하는 그런 성공을 얻은바 없습니다. 그는 일평생 나그네로 살았으니 그 또한 요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현세적인 것을 넘어서는 더욱 근원적인 복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하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 형 에서와 만나게 됩니다. 강을 건너기 전날 밤에 그는 강가에서 어떤 존재와 밤새워 씨름을 합니다. 그때 야곱은 엉덩이뼈가 부러집니다. 이제는 형에게 나아가는 일도 수월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천사더러 뭐라고 합니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 오늘 본문입니다.
“네가 하나님과 겨뤄 이겼고, 사람과도 겨뤄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그 다음에 야곱에게 축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엉덩이뼈가 부러진 야곱이 다음 날 아침 형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축복이겠어요. 아마 우리가 그런 말을 들으면 대들었을 거예요. 그러나 야곱은 틀립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이럽니다. 그게 30절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의 신비라면 신비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이라면 정신입니다. 절망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절뚝거리면서도 희망 가운데 아침 햇살을 받는 거 말입니다. 하나님과 겨뤄 이겼기 때문에 다음날은 문제없다는 이 사고방식이 야곱의 존재다움입니다.
이만하기 때문에 한 나라의 이름으로 야곱의 이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살아가야지 그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과 겨뤄 이기고, 하나님과도 겨뤄 이긴 다음에라야 밝은 햇살이 비추는 법입니다.
이런 조상이 되라는 것입니다. 현실에 급급하여 사는 하루살이 성공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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