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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이 텅텅 비어진 이유

창세기 박신 목사............... 조회 수 1948 추천 수 0 2012.03.09 13: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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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1-5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whyjesusonly.com/ 
이 땅이 텅텅 비어진 이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의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1-5)  

태초와 첫째 날의 사이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창조의 첫째 날에 행하신 일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첫째 날에 천지도 창조하고 빛도 창조한 것처럼 여긴다. 아니다. 천지는 이미 태초에 창조하셨다. 그래서 땅이 먼저 있었다. 첫 날에는 단지 빛을 만드신 것이다.

그럼 천지를 만드신 태초와 창조의 첫날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 간격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간격이 전혀 없이 흔히 이해하듯(?) 하루 안에 다 이뤄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경은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인 ‘태초’와 ‘첫째 날’을 구분해서 사용했기에 다른 시간대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분명 땅이 있고 흑암이 깊고 수면이 형성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었다고 첫째 날 이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지구 역사와 성경이 말하는 짧은 연대와의 모순을 없애보려 시도했던 간극이론(the Gap Theory)을 지지하려는 뜻은 추호도 없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그 이론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으나 그 창조가 실패했기에 파멸시키고 다시 재창조를 했는데, 그 두 창조 사이의 간격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연대 차이인 수 십 억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이 처음 천지를 지을 때부터 인간의 과학적 분석으로는 이미 수십 억 년이 경과된 것으로 나타나는 물체로 만들었을 수 있다. (참고로 이런 이론은 이상적시간이론-the Ideal Time Theory-라고 한다.) 창조의 연대는 인간의 추정 밖의 속한다. 확실한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천지와 빛의 창조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뿐이다.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그대로 첫째 날에 빛을 만들기 전에 이미 천지는 있었다고만 이해하면 그만이다.  .

그 이상한 간극이론이 형성된 이유 중의 하나이자 그 이론 자체의 변증에 동원되는 구절이 본문 안에 있다. 바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부분인데, 이 우리말 번역에는 심각한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혼돈(混沌)이란 단어는 질서 정연한 상태(cosmos)의 반대어인 무질서하고 혼잡한 상태(chaos)를 연상시킨다. 또 공허(空虛)도 마치 형체를 갖춘 물건이나 어떤 의미 있는 사안이 전혀 없는 진공 상태를 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첫 창조가 실패하여 파멸시켰다는 잘못된 주장이 도리어 힘을 얻게 되는 구실로 종종 이용된다.    

그러나 신자가 항상 주지하여 잊지 말아야 할 믿음의 근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절대로 실패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앞서 영적 존재를 먼저 창조하였고 그 중 가장 뛰어난 천사가 배반했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예정과 섭리 가운데 이뤄진 것이다.

혼잡하고 공허하다는 히브리 원어 ‘토후-우보후’에도 그런 부정적 의미는 전혀 없다. 이는 우리말 ‘울퉁불퉁’이나 영어의 zigzag 같은 말처럼 발음이 약간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가진 음절을 동일한 운율에 맞추어 반복함으로써 그 뜻을 더 강조하는 히브리 식 표현법이다. 실제로도 둘째 단어의 접두어 ‘우’는 and의 뜻이다. 단순히 “비고 또 비어있다” 는 뜻이다.

영어로는 비교적 정확하게 “empty without form" 또는 ”empty and void"라고 번역되었다. 아무 물체도 만들어지기 전 땅이 비어진 상태로서 우리말의 혼돈과 공허 같은 부정적 의미는 없다. 특별히 영어 void는 "a void house"(주인이 없는 집)에서 보듯이 아직까지 땅에 주인이 없었다는 의미가 있다.  

결국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형체를 갖춘 생명체 혹은 물체가 없었을 뿐 지구 자체는 있었다는 것이다. 둥그런 구체 위에 수면이 있고 그 위를 흑암이 덮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지구와 물과 하늘을 먼저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천지에 비록 빛이 없고 어둠만 있어도 결코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당신의 뜻에 완벽하게 부합된 아름답고도 완전한 창조였다.

거기다 깊은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운행하고 있었다. 성령은 오순절에 오신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이 땅에 계셨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창조와 섭리의 사역을 공동으로 주관했다. 여기서 ‘운행하다’는 히브리 동사의 뜻은 독수리가 둥지 위를 빙빙 돌며 새끼가 있는 우리를 항상 감시하며 보호하는 그런 행동을 뜻한다. 이 땅이 비어있음에도 여전히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신 것이다.(신32:10,11)  또 성령이 함께 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혼돈과 공허한 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왜 비어있는가?  

정작 따져 봐야할 문제는 왜 성경이 비어있다고 표현했느냐이다. 어쨌든 땅 위에 깊은 물이 있었고 또 그 위에는 흑암이 덮는 3층 구조의 천지는 있었지 않는가? 한마디로 그 이유는 살아 움직이는 물체 즉, 생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인간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라 텅 비어진 상태였다.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적 관점에서도 인간 자체가 존재하기  전인지라 아직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비어있다고해서 부정적 해석은 금물이다. 텅빔은 채움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과 순서에 따라 하나씩 창조하여 하루하루 이 땅을 채우면서 기뻐하셨다. 당신의 마음에 창조의 6일간 기쁨으로 가득 찼다. 모든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하셨다. 첫 날이 시작되기 전 이 땅이 비어있을 때에도 장차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변모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분의 마음은 너무나 벅차고 설레었던 것이다. 정말로 성령이 깊은 수면 위를 독수리가 아기를 보호하듯이 운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특별히 그분은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후에 가장 크게 기뻐하셨다. 인간이 지어지기 전에는 창조는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 창조에 있었다. 당신과 함께 영원토록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으로 인간을 지으셨던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 땅에 인간이 없다면 과연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동물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과일과 채소도 먹지 않는다. 온갖 아름다운 꽃이나 장엄한 경관들을 감상하며 시를 읊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여서 이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다. 종족끼리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거나, 자연을 무차별로 개발하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실 때에 6일을 기뻐하셨듯이 인간도 동일하게 그 아름다운 자연을 기뻐하고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은총을 누리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면 이 땅에 심어놓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릴 존재는 아예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선 실은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 마지막 다섯째 날까지도 이 땅은 비었고 또 텅 비어있었던 셈이다. 인간이 풍성하고도 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미리 조성하셨다. 생존에 가장 적합하도록 환경을 만드신 것은 너무나 기본이다. 정작 더 중요한 사실은 인간으로 다른 동식물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서로 돕고 사랑하게 했다. 하나님 당신과 함께 교제하며 동행하면서 말이다.  

텅 비어있는 땅에 하나님이 가장 먼저 무엇을 채워 넣었는가? 바로 빛이다. 해와 달을 언제 어떻게 창조했다는 설명이 아니다. 넷째 날에 두 광명을 만들어 밤낮을 구분한 것과는 다르다. 빛의 근원을 창조하신 것이다. 지구를 덮고 있던 흑암을 걷으셨다.

나아가 하나님 당신이 바로 빛이셨다. 빛이 빛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께서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이자 삶의 길잡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생존할 모든 내외부적 힘과 자원이 그분으로부터만 온다. 그분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시다. 인간으로 하여금 오직 빛이신 하나님 당신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라는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땅의 모든 것들이 빛이신 당신의 형상을 반사(反射)하게 하셨다.

이어지는 둘째 날에는 지구 표면을 덮고 있던 땅 위의 물과 하늘 위의 물로 나누었다. 수면 위의 흑암만 걷어낸 것이 아니라 흑암으로 가려졌던 하늘이 완전히 드러남으로써 땅에서 하늘을 향해 위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땅의 물도 셋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로 나누어서 한 곳으로 모이게 했다. 즉 인간이 살 수 있는 뭍이 완전히 생성된 것이다.

그 무엇보다 오직 인간만 두 발로 직립(直立)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눈을 하나님이 계신 위로 향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두 발로는 땅을 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더라도 머리만은 위를 향하고 두 손도 하늘을 향해 쳐들고 기도하고 찬양케 만든 것이다.

정말로 혼돈하고 공허하게 된 땅.

요약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첫 삼일 동안에 세 가지의 분리(分離) 사역을 하셨던 것이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눴고, 궁창 아래의 물은 다시 바다와 육지로 나뉘게 하셨다. 이제 그 땅을 비어놓은 채로 두지 않고 뭔가 당신이 의도하신 것들로 채우시겠다는 뜻이다. 물과 어둠으로만 덥혀있는 상태에선 어떤 생명체로도, 특별히 인간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외의 다른 모든 피조물에도 당신의 신비한 능력을 보이게끔 했지만,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이 땅이 충만케 채워져야만 비로소 창조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또 그러려면 빛이 가장 먼저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어둠과 공존할 수 없기에 그 형상을 품고 있는 인간도 흑암 속에 살 수 없음도 너무나 당연했다. 하나님이 인간더러 번성하여 충만토록 명한 의미도 이 땅을 당신의 형상으로만 온전히 덮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최초 인간 부부는 하나님의 형상을 의도적으로 벗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자신의 주인으로 존재의 중심에 모셨던 그분을 완악하게 지워버렸다.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고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땅으로 떨어트리고는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버렸다. 자기가 이 땅의 주인인양 행세하려 들었다. 이 땅은 인간의 탐욕으로 채워졌고 흑암이 다시 온 땅을 덮었다. 창초 때의 물리적 어둠과는 다른 영적 암흑이었다.

아담 이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외의 모든 피조물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며 그 존재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독 인간만은 당신의 거룩한 창조의 질서와 정반대되는 길로 가버렸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하게나마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 더듬어서라도 다시 빛 쪽으로 나오라고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19-23)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마지막 기대마저, 사실상 인간에겐 최후의 기회였는데도, 서슴없이 저버렸다. 이제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 히브리어로 치면 “토후우토후” 즉, 비고 또 비어져 버렸다.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어야 하는 인간이 없는 이 땅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당신의 세상에 당신의 빛이 그 흔적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피조물들은 그분의 빛을 받고 있지만 정작 그 빛을 발견하여 그 안에서 밝게 살아가야 할 인간만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아무리 인간이 개발해 낸 눈부신 문명으로 이 땅에 가득 채워서 살기에 너무나 편리하고 좁아져도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엔 텅 비어져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침례

하나님으로선 당연히 이 땅이 그렇게 텅 빈 상태로 계속 버려둘 수는 없었다. 인간으로 다시 두 손을 하늘로 향하게 만들어야 했다. 제 2의 땅을 채우는 조처가 필요했다. 처음처럼 하늘에서 빛을 비추어 흑암이 물러가게 하고, 또 땅에선 뭍과 바다가 갈리듯이 인간이 정작 살아가야할 그분의 은혜와 권능이 살아 역사하는 터가 드러나야 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예수님이 침례 요한으로부터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이다. 여기서 침례라고 표현한 것은 물에 완전히 잠긴 후에 물을 가르고 일어났음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음성이 내려왔다. 창세기 1장과 관련지어 뭔가 비슷한 점을 찾지 못하겠는가? 바로 빛이 하늘에서 내리고, 물이 갈라지며 땅이 나타나는 것과 같지 않는가?

첫 창조 때의 세 번의 분리는 물리적 현상이었다. 인간의 생존환경을 만드신 것이다. 오직 인간이 할 일은 그분을 찬양하며 교제 동행하는 것뿐이었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깨끗한 영혼이라 그런 분리만으로 충분했다.

창조 시에 완벽하게 이뤄진 그 물리적 분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의해 지금까지 은혜롭게 유지되었기에 사람이 생존하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대신에 인간의 범죄로 인해 그 영혼을 포함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완전히 더렵혀졌다. 인간으로 새롭게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릴 수 있도록 그 영적인 환경을 재창조할 필요가 생겼다.  

공중권세 잡고 있는 흑암의 세력을 걷어내고 다시 광명의 빛을 비추어야 했다. 땅에서도 깊은 궁창의 물을 가르고 하나님의 도성을 사단의 도상 가운데 심어야 했다. 예수님이 물을 가르며 일어서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한 까닭이다. 주님이 이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그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 거의 다 사라진 이 땅을 때가 차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힘입은 자들로 다시 채우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예수가 없는 인간은 그 자체로 텅빈 것이며, 또 그런 자가 아무리 융성해도 이 땅은 비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빛으로 완전히 채우려 오셨던 것이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그 빛을 배척해버렸다. 물리적인 광명은 여전하기에 새로 온 영적 광명을 귀찮았고 또 싫었다. 어둠이 훨씬 더 편하고 좋았다. 인간의 탐욕은 끝없이 쾌락과 죄악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로 얻은 열매의 단 맛은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제 2의 바벨탑은 인간이 사는 곳마다 세워졌고 그 교만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땅은 여전히 비고 또 텅 비어져 있었다.

신자의 진짜 영광

그러나 그분은 전혀 실망하지 않으셨다. 빛으로 흑암을 가르고 이 땅을 밝히는 일을 결코 중단치 않으셨다. 당신의 독생자와 함께 성령이 그 흑암의 깊음 속에 운행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빛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아니 당신께서 택한 자를 당신께서 그 빛 속으로 옮겨 주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2-14)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빛의 밝음을 보고 그 밝음 안으로 들어간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임했고 은혜와 진리가 그 가운데 충만하다고 했다. 이젠 예수 믿는 자들을 통해서 이 땅은 그렇게 다시 채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 자들에 의해서 이뤄질 것이다..

예수 믿는 신자의 영광이 이 땅에서부터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겠는가? 한마디로 신자가 없으면 이 땅이 비고 또 텅 비어진다. 하나님도 오직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며 또 무한한 은혜와 권능을 그들을 통해 베푸신다. 신자를 통해 이 땅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충만하게 채워가는 일을 하신다. 신자가 그 일에 등한히 하면 이 땅은 혼돈과 공허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창조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신자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충시키는 것이라는 뜻이다. 신자가 그 소명을 제대로 감당 못하면 창조의 목적이 실패하는 것이다. 이 땅이 존속될 의미가 없다. 신자들더러 기독교의 종교왕국을 건설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서 그 형상이 이 땅을 덮게 만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신자만이 인간 존재 본연의 목적대로 충실하게 살 수 있다. 또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가장 인간답게 사는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 삶은 본 모든 이로 참 인간답게 살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며 거룩해져야 한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한다. 신자의 특권이 혼자 잘 믿어 하나님께 보상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기로 인하여 그 주위가 밝아지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그것이 그분이 주시는 은혜이며, 또 그분과 신자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다.  

신자가 매 순간 점검해야 할 것은 물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이어가는 것이다. 종교적 열심과 치성을 겉으로 얼마나 드러내느냐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온전히 사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과연 얼마나 드러내는지 점검해야 한다. 아니 하나님과 진짜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이 땅을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가? 하나님 그분이 당신이 기뻐하시는 의미와 목적이 되어 있는가? 그분께서 맡겨주신 이 땅의 인류 역사를 거룩하게 이끌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일개 평신도로 내 코도 석자인지라 그런 일은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고 할 여유도 없는가? 아니다. 너무 거창하게 여길 것 없다. 고난과 문제들을 뒤치다꺼리하기 바빠도 괜찮다.

내 속에 예수로만 가득 채워져 있으면 된다. 그래서 현실의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담담하게 이겨내는 모습만으로도 이 땅을 거룩하게 변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연약한 우리는 깨어지고 보배이신 그리스도의 빛만 드러나게 하면 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의 십자가만 지고 간다면, 이 땅을 자꾸 비우고 또 비우려는 사단의 흉계를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앞서 가서 대신 채우고 채워주실 것이다. .

8/6/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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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37 빌립보서 서울 춘천고속도로에서 빌3:12-15  허태수 목사  2012-03-08 2020
6536 누가복음 어리석은 농부 눅8:5-8  허태수 목사  2012-03-08 2213
6535 마태복음 믿음, 그 교묘함에 대해서 마6:25  허태수 목사  2012-03-08 1968
6534 창세기 하나님의 새 약속 창9:8-17  정용섭 목사  2012-03-07 2095
6533 마가복음 침묵 명령 막9:2-9  정용섭 목사  2012-03-07 1926
6532 고린도전 믿음은 구도다 고전9:24-27  정용섭 목사  2012-03-07 2090
6531 마가복음 예수의 축귀 능력 막1:29-39  정용섭 목사  2012-03-07 2170
6530 에배소서 순간의 선택 엡5:16-17  최현섭 형제  2012-03-07 2006
6529 디모데후 세 아들에게 나누어 준 아버지의 반지 딤후2:22-26  이경숙 교수  2012-03-07 2385
6528 창세기 순례자의 하나님 창12:1-4  장윤재 교수  2012-03-0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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