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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4: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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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인생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요일4:10,11)
(조급함도 큰 죄다. 시리즈 4)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조급함이 성경적으로 죄가 되는 이유가 최소한 셋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조급증은 자기 계획과 뜻만 고집하다가 그대로 진척이 안 되어 초조해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기에 죄가 된다고 했다. 둘째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조급해지는데 그 이유는 내면의 중심이 상실 되고 모든 기준이 해체되어서 향방 없는 달음질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 번째로 죄가 되는 이유를 살피면서 인생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제목을 붙였다. 조급해서 사태를 정확이 분석하지 못하면 섣부른 판단을 부르기에 인생을 실패케 한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정도는 성경이 아니라도 누구나 아는 상식이자 인생처세술에 해당된다. 구태여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이 다룰 문제가 아니다. 조급함이 죄가 되려면 그 이유도 훨씬 다른 뜻이어야 한다.
성공한 인생이란?
인생을 실패케 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사람과 경우마다 다 다르다. 그 중에 누구나 공감하는 가장 큰 이유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도리어 인생을 가장 성공케 하는 요인부터 따지는 것이 편할 것이다. 가장 큰 성공을 못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가장 큰 실패의 이유가 됨은 자명하지 않는가?
그럼 인생을 가장 성공케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재물, 권력, 명예, 지성, 건강, 외모 등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런 현실적 기준은 아무리 따져도 성공에나 실패에나 너무 다양하기에 등급을 매길 수 없다. 지금 성경이 조급증을 죄라고 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 당연히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한 인생이 무엇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신자가 자기 인생을 성공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자신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지으신 이가 따로 있다면 그 인생은 생래적으로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자유의지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 같아도 그 의지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살고 죽음을 자유롭게 고르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그 중간의 것도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로 성공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너무 심오하고 경건하게 생각할 것 없다.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복잡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인류 발전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쌓으라거나 종교적으로 신령한 일을 많이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오직 두 가지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1:37-40)
그런데 첫째 계명 하나님 사랑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개인적 관계다. 제삼자가 간섭, 개입,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거기다 눈에 안 보이는 영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종교적 행위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말하자면 하나님 사랑은 현실적 인생살이의 성공과 실패와 직접적으로는 무관하다. 물론 인생 성공의 궁극적 원인은 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해 가시적 공통분모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 계명과 같다고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개인적인 하나님 사랑 그 자체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웃 사랑이라는 가시적 열매로는 입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너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돕는 배필”(창2:18)이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의 결혼 생활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그 때는 둘 뿐이었고 그 둘이 인간 전부였지 않는가? 유독 인간만은 그 일생의 목적이 여타 모든 피조물과는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가 더 있다. 모든 동식물은 그 존재 목적이 오직 종족 보전이다. 반면에 인간은 단순히 이 땅에 번창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도 아름답게 번성해야 한다.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고 성삼위 하나님들 간에 이뤄지는 완벽한 사랑을 닮아 이 땅에서도 그런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덴은 그랬다.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이기적 욕심으로 타산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가 있었다. 타락 이후 실낙원(失樂園) 한 인간이지만 신자는 복락원(復樂園)해야 할 책임을 맡았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뿐이다.
참 사랑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은 가름되어진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자만해도 그 업적으로 따라올 개인적 부나 명예 같은 보상보다는 그 일 자체를 진정으로 사랑한 자이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차적으로 원하시는 사랑이란 사람끼리의 사랑이다. 사람끼리 사랑하지 못하면 모든 인간관계는 왜곡 모순 파괴되며 자연히 그 인생은 괴롭다. 갈수록 피폐해 가는 현대사회의 가장 큰 잘못도 죄악이 더 심하게 타락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사람 사이에 참 사랑이 실종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사랑의 본질
조급증이 죄가 되는 셋째 이유는 바로 참 사랑을 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요인이기 때문이다. 욱하는 성질로, 또 자존심 살리느라 양보를 못해서 연인끼리 부부끼리 싸우는 단순한 조급증도 물론 문제다. 그보다 성경이 말하는 뜻은 사랑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사랑 자체가 조급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사랑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가? 어떤 이를 열심히 좋아하고 만나기만 하면 기쁘고 즐거운 현상인가? 그래서 안 보면 보고 싶어지고,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비용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다 해주는 것인가? 물론 그런 것도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사랑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인생을 성공하는 요인을 먼저 찾은 후에 역으로 실패하는 요인을 따져 보았다. 이처럼 어떤 사안을 정확히 살피려면 반대 되는 개념을 확실히 정리한 후에 그것의 반대를 살피면 의외로 분명하고 쉬울 때가 많다. 때로는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그것이 아닌 것을 더 쉽게 알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다.
사랑의 반대는 무엇인가? 상대를 싫어하거나 분노하며 미워하는 것인가? 아니다. 애정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연애했던 상대와 헤어져서 미워하고 있다면 아직도 사랑하고 있거나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시기와 질투란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또 반드시 연적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연인을 향할 때 오히려 더 크고 깊어지지 않는가?
정말로 싫어져서 헤어졌다면 어느 순간 아예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워진다. 생각으로 떠올리는 것조차 싫고, 정확히 말해 귀찮고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아예 관심 밖이다. 헤어진 연인이 자기보다 훨씬 나은 자와 다시 만나도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하리 만큼 전혀 시샘이 안 생긴다. 내가 언제, 왜, 얼마나 저 사람을 좋아했던지 자신도 이해가 안 되고 설명이 안 될 정도다. 결국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이다. 그럼 사랑의 본질은 무관심의 반대 즉, 관심이 된다.
엄밀히 따지면 감정적으로 흥분이 되어 그저 좋은 것은 연인과 부부 사이 즉, 남녀 간의 애정에 국한되는 것이다. 예컨대 자식이 아니라 원수다 싶을 정도로 정말로 미운 짓을 해서 아들을 호적에서 파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들을 사랑하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는가? 배우자나 연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다 적용이 되는 그런 사랑의 본질이 바로 “관심”이라는 것이다. 남녀 사랑이든, 불쌍한 자를 돕는 사랑이든 결국은 마음이 자꾸만 그 사람에게 쏠리게 마련이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아예 사랑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만한 좋은 점이 과연 조금이라도 있는가? 정말로 그분의 심정이 기뻐서 춤 출 정도로 선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아름다운 측면이라곤 스스로 눈을 닦고 찾으려 해도 솔직히 없다. 그분은 우리를 보고 감정이 격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을 뿐이다. 하늘에서 눈동자 같이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은 물론 심령까지 꿰뚫어보시고 있다. 또 그런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만드신 자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담이 하나님의 존재를 자기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고 자기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아버리자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주신 선악과 명령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그분을 의지하며 순종해야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졌다. 하나님이 뭐라 하든 아무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분이 싫어하는 짓을 마음 놓고 자행하게 된 것이다. 그분을 사랑해서 관심을 갖고 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열애 중일 때는 내가 싫어해도 상대가 좋다면 그대로 따르지만, 헤어지고 나면 그 싫던 것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듯이 말이다.
본문은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셨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었거나, 유대인의 경우 현저히 줄었거나 엉뚱하고 잘못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전혀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죄 값을 치르게 함으로써 그 관심을 겉으로 완전하게 표출했다.
사랑과 조급증
사랑의 본질은 관심이며 그것이 행동으로 바뀌는 것은 바로 이웃이든 배우자든 섬기는 일이다. 관심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조급증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느긋하게 잘 참을 줄 아는 자가 관심을 오래 더 깊이 가지고 또 그래서 사랑을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인가? 실제로 그렇다. 절교나 이혼을 섣불리 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성경은 사랑의 본질을 분명히 조급증의 반대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랑에는 어떤 기교도 필요 없다. 어떤 면에선 순수한 진심보다도 조급하지 않는 것이 더 우선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을 설명하면서 참는다는 표현만,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셋이다. 총 열다섯 중에 겨우 셋이기에 사랑의 큰 특징일뿐 본질까지는 아니라고 간주해선 안 된다. 우선 처음에 오래 참고라고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마쳤다. 처음과 끝이 참는 것이면 그 전부가 참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열다섯 중에 하지 말아야 할 부정적 내용이 절반이 넘는 여덟이다. 아니 하려면 참아야 하는 수밖에 없다. 또 해야 한다는 긍정적 내용 일곱 중에서도 참는 것 셋을 빼면 넷인데, 그 중에 “모든 것”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믿는 것과 바라는 것 둘이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려면 당연히 오래 참아야 한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까지 믿어지려면 오래 견뎌야 하며,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한 소망도 계속 유지하려면 마찬가지다.
직접 참으라는 표현과 참는다는 뜻이 내포된 "아니하며”와 “모든”이 붙은 것을 빼고 나면 사랑의 특성 15 가지 중에 둘 밖에 남지 않는다. 온유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이 둘도 곰곰이 따져보라. 참지 않고 과연 어떻게 온유해지며, 또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겠는가? 온유란 참는 것의 다른 표현이거나 최소한 공유하는 특성이 있다. 또 불의와 거짓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려면 모든 죄악의 시험과 유혹을 참고 이겨내야 하지 않는가? 한마디로 열다섯 모두가 참는 것에 관한 설명이다. 이제 사랑의 본질이 참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일차적으로 참아야 하는 대상은 사랑하는 상대다. 어떤 허물과 잘못이 있어도 참아야 하며, 아니 바로 그런 결점들 때문에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 사람으로 그런 허물과 잘못을 범하게 만든 이 세상의 모순, 왜곡, 갈등에 대해서도 진리를 견고히 붙들고 참아야 한다. 사람이든 일에든 조급하면 사랑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서로 사랑해야 성공할 수 있게 만든 인생이기에 사랑하지 못하면 즉, 조급하면 가장 크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열정이나 의지가 받혀주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인내심이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조급증이 생기는 이유는 관심이 끊겼기 때문이다. 관심은 반드시 온전한 관계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에 관한 관심을 끊지 않으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만드신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신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이미 생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큰 이유는 자기 몸에서 났기 때문이다. 도무지 그 관계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안 된다.
결국 관심이란 내 쪽의 상황, 감정, 믿음, 소망, 열정보다는 상대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지 여부에 달린 것이다. 관계를 계속하고 싶지 않으면 관심마저 끊게 되거나 자동으로 끊긴다. 남녀 관계는 감정이 고양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관계의 지속여부도 결정된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사랑의 관계는 오히려 관계를 계속하고 싶은 소원과 의지만 있다면, 계속해서 관심을 쏟게 된다. 관심을 가지다 보면, 반대로 관심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사랑을 베풀게 되는 법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라.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는 기도도 해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당신께서 직접 그 본을 보이셨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저들이 하는 짓을 스스로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다. 그 후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그랬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얼마나 용서해주어야 하느냐 물었을 때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것이다. 숫자로는 490번을 용서해 주어야 하니까 491번째는 용서 안 해 주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에선 세 번만 참아도 의인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수십 배 더 오래 참으라는 것도 아니다. 490번의 용서란 우리 모두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숫자다.
우선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가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같은 잘못을 70번 저질러도 용서하고, 또 그런 식으로 일곱 개의 다른 잘못을 범해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 아니다. 일곱 번 용서는 거의 불가능하고 일흔 번 용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숫자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렇게 요구한 이유가 있다. 7이나 10이나 완전 숫자다. 꽉 찬 숫자다. 무조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으면 참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490번까지 용서해주다가 491번째 복수했으면 남는 것은 복수이지 용서가 아니지 않는가? 최근에 황혼 이혼이 유행하고 있다. 금술 좋게 50년이나 해로하다가 51년 째 그동안 참고 산 것이 억울하다고 서로 비방하며 이혼한다. 두 사람은 결국 사랑한 것인가 아닌가?
참는다는 것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신자들은 의지력과 결단력에 따르는 강한 믿음이라고 믿는다.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인내가 진짜 인내 되게 하려면 끝까지 가야 한다.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까지 가야 그야말로 참 인내다. 그러지 않으면 인내가 결코 아니다. 끝까지 참는 것은 중간 중간에 갈등과 분쟁이 많았다는 것이 전제가 되며,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을 다 극복했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참 인내를 결정하는 요인은 단순히 결단, 의지, 끈기가 아니다. 상대와의 관계를 정말로 기꺼이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소망 내지 의사다. 관계를 이어갈 요량이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관심을 가지면 상대의 허물과 잘못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분석도 된다.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반드시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실제로 생겨야만 참 용서가 된다. 신자니까 무조건 종교적 도덕적 의무감으로 용서할 수는 없다. 물론 그렇게 해도 용서 자체가 갖는 힘 때문에 참 용서로 이끌 수는 있다. 그러나 한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는 못한다.
솔직히 예수님이 말하는 490 번의 용서가 불가능해 보일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우리 체질이 진토 같음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전혀 불가능한 계명을 주실 리가 없다. 신자는 혼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끝까지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초대교회 때 맹수의 밥이 되어 순교한 평범한 신자들도 아마 끝까지 용서했을 것이다. 자기들을 죽음에 넘기운 자나, 직접 사형 명령을 내린 자를 원망, 분노, 저주하며 죽지 않았을 것이다. 성령의 평강과 위로가 가슴에 가득 차고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을 것이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주님이 그들을 천국 입성에 합당한 자들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들에게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토록 하신 이유다.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비결
신자는 정말 온전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세상 사람은 하지 못하는 참 사랑을 할 수 있다. 요한 사도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선언했지 않는가? 언뜻 율법적이고 너무 독단적인 선언 같지만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신자 안에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5,16) 예수를 시인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성령의 간섭을 통해 신자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를 십자가의 온전한 사랑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신자다. 신자도 그런 두려움 없는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다.
바울도 동일하게 선포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신자는 더 이상 두려워하는 영의 사슬 아래 묶일 필요 없다. 두려움은 자연히 조급증을 유발한다. 조급증은 끝까지 참게 하지 못한다. 요컨대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만들어 그 인생에 실패만 남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고 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썩는다. 오직 하나님과 당신의 말씀만이 영존한다. 그래서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는 일을 두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29절)이라고 이어서 설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바로 영생하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믿음과 소망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갖는 것이다. 천국에 가면 실현되기에 더 이상 필요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바로 사랑이며 또 천국에서 유일하게 남는 것도 사랑이다. 이 땅에서나 천국에서나 인간은 사랑하는 힘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야 말로 예수님 말씀대로 하자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을 온전히 믿게 되면 성령이 내주함으로써 참 사랑을 할 수 있다.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어떤 고난이 와도 참을 수 있다. 나아가 너무나 미워서 앙갚음을 해야만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원수라도 성령의 내 영을 깨끗이 씻음과 새롭게 함으로 용서하고 사랑까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2-14)
재차 강조하지만 성령의 인도로 참 사랑을 하라고 해서 너무 심오하고 신령하게 생각할 것 은 없다. 예컨대 노년이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도 절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성공한 인생이란 주님 안에서 만난 배우자와 비록 자주 싸우고 심지어 헤어질 뻔한 위기가 있어도 끝까지 참고 함께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노년에 새 인생을 출발한다고 하지만 그 전의 6~70년의 인생은 실패요 허비했다는 실토밖에 안 된다. 대신에 아름답고 복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래야만 한다는 뜻이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참사랑을 할 수 있는 권세를 이미 소지한 자다. 당장에 아주 잘 섬길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결코 버리지 않으려는 확고한 의지다. 그들에게 어떤 결점과 하자가 있어도 끝까지 참아내는 힘이다. 그 힘은 또 그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성령이 심어주는 소원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당장 사랑부터 하려들지 말고 진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까지 이어갈지를 판단하라는 것이다. 정말로 관계를 끊고 싶지 않다면 끝까지 참는 것이 최선이며 그러면 관심과 사랑은 따라오게 된다. 이길 외에 인생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따로 없다.
12/3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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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함도 큰 죄다. 시리즈 4)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조급함이 성경적으로 죄가 되는 이유가 최소한 셋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조급증은 자기 계획과 뜻만 고집하다가 그대로 진척이 안 되어 초조해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기에 죄가 된다고 했다. 둘째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조급해지는데 그 이유는 내면의 중심이 상실 되고 모든 기준이 해체되어서 향방 없는 달음질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 번째로 죄가 되는 이유를 살피면서 인생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제목을 붙였다. 조급해서 사태를 정확이 분석하지 못하면 섣부른 판단을 부르기에 인생을 실패케 한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정도는 성경이 아니라도 누구나 아는 상식이자 인생처세술에 해당된다. 구태여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이 다룰 문제가 아니다. 조급함이 죄가 되려면 그 이유도 훨씬 다른 뜻이어야 한다.
성공한 인생이란?
인생을 실패케 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사람과 경우마다 다 다르다. 그 중에 누구나 공감하는 가장 큰 이유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도리어 인생을 가장 성공케 하는 요인부터 따지는 것이 편할 것이다. 가장 큰 성공을 못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가장 큰 실패의 이유가 됨은 자명하지 않는가?
그럼 인생을 가장 성공케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재물, 권력, 명예, 지성, 건강, 외모 등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런 현실적 기준은 아무리 따져도 성공에나 실패에나 너무 다양하기에 등급을 매길 수 없다. 지금 성경이 조급증을 죄라고 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 당연히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한 인생이 무엇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신자가 자기 인생을 성공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자신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지으신 이가 따로 있다면 그 인생은 생래적으로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자유의지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 같아도 그 의지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살고 죽음을 자유롭게 고르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그 중간의 것도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로 성공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너무 심오하고 경건하게 생각할 것 없다.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복잡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인류 발전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쌓으라거나 종교적으로 신령한 일을 많이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오직 두 가지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1:37-40)
그런데 첫째 계명 하나님 사랑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개인적 관계다. 제삼자가 간섭, 개입,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거기다 눈에 안 보이는 영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종교적 행위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말하자면 하나님 사랑은 현실적 인생살이의 성공과 실패와 직접적으로는 무관하다. 물론 인생 성공의 궁극적 원인은 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해 가시적 공통분모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 계명과 같다고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개인적인 하나님 사랑 그 자체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웃 사랑이라는 가시적 열매로는 입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너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돕는 배필”(창2:18)이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의 결혼 생활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그 때는 둘 뿐이었고 그 둘이 인간 전부였지 않는가? 유독 인간만은 그 일생의 목적이 여타 모든 피조물과는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가 더 있다. 모든 동식물은 그 존재 목적이 오직 종족 보전이다. 반면에 인간은 단순히 이 땅에 번창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도 아름답게 번성해야 한다.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고 성삼위 하나님들 간에 이뤄지는 완벽한 사랑을 닮아 이 땅에서도 그런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덴은 그랬다.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이기적 욕심으로 타산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가 있었다. 타락 이후 실낙원(失樂園) 한 인간이지만 신자는 복락원(復樂園)해야 할 책임을 맡았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뿐이다.
참 사랑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은 가름되어진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자만해도 그 업적으로 따라올 개인적 부나 명예 같은 보상보다는 그 일 자체를 진정으로 사랑한 자이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차적으로 원하시는 사랑이란 사람끼리의 사랑이다. 사람끼리 사랑하지 못하면 모든 인간관계는 왜곡 모순 파괴되며 자연히 그 인생은 괴롭다. 갈수록 피폐해 가는 현대사회의 가장 큰 잘못도 죄악이 더 심하게 타락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사람 사이에 참 사랑이 실종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사랑의 본질
조급증이 죄가 되는 셋째 이유는 바로 참 사랑을 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요인이기 때문이다. 욱하는 성질로, 또 자존심 살리느라 양보를 못해서 연인끼리 부부끼리 싸우는 단순한 조급증도 물론 문제다. 그보다 성경이 말하는 뜻은 사랑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사랑 자체가 조급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사랑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가? 어떤 이를 열심히 좋아하고 만나기만 하면 기쁘고 즐거운 현상인가? 그래서 안 보면 보고 싶어지고,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비용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다 해주는 것인가? 물론 그런 것도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사랑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인생을 성공하는 요인을 먼저 찾은 후에 역으로 실패하는 요인을 따져 보았다. 이처럼 어떤 사안을 정확히 살피려면 반대 되는 개념을 확실히 정리한 후에 그것의 반대를 살피면 의외로 분명하고 쉬울 때가 많다. 때로는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그것이 아닌 것을 더 쉽게 알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다.
사랑의 반대는 무엇인가? 상대를 싫어하거나 분노하며 미워하는 것인가? 아니다. 애정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연애했던 상대와 헤어져서 미워하고 있다면 아직도 사랑하고 있거나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시기와 질투란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또 반드시 연적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연인을 향할 때 오히려 더 크고 깊어지지 않는가?
정말로 싫어져서 헤어졌다면 어느 순간 아예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워진다. 생각으로 떠올리는 것조차 싫고, 정확히 말해 귀찮고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아예 관심 밖이다. 헤어진 연인이 자기보다 훨씬 나은 자와 다시 만나도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하리 만큼 전혀 시샘이 안 생긴다. 내가 언제, 왜, 얼마나 저 사람을 좋아했던지 자신도 이해가 안 되고 설명이 안 될 정도다. 결국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이다. 그럼 사랑의 본질은 무관심의 반대 즉, 관심이 된다.
엄밀히 따지면 감정적으로 흥분이 되어 그저 좋은 것은 연인과 부부 사이 즉, 남녀 간의 애정에 국한되는 것이다. 예컨대 자식이 아니라 원수다 싶을 정도로 정말로 미운 짓을 해서 아들을 호적에서 파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들을 사랑하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는가? 배우자나 연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다 적용이 되는 그런 사랑의 본질이 바로 “관심”이라는 것이다. 남녀 사랑이든, 불쌍한 자를 돕는 사랑이든 결국은 마음이 자꾸만 그 사람에게 쏠리게 마련이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아예 사랑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만한 좋은 점이 과연 조금이라도 있는가? 정말로 그분의 심정이 기뻐서 춤 출 정도로 선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아름다운 측면이라곤 스스로 눈을 닦고 찾으려 해도 솔직히 없다. 그분은 우리를 보고 감정이 격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을 뿐이다. 하늘에서 눈동자 같이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은 물론 심령까지 꿰뚫어보시고 있다. 또 그런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만드신 자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담이 하나님의 존재를 자기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고 자기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아버리자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주신 선악과 명령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그분을 의지하며 순종해야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졌다. 하나님이 뭐라 하든 아무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분이 싫어하는 짓을 마음 놓고 자행하게 된 것이다. 그분을 사랑해서 관심을 갖고 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열애 중일 때는 내가 싫어해도 상대가 좋다면 그대로 따르지만, 헤어지고 나면 그 싫던 것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듯이 말이다.
본문은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셨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었거나, 유대인의 경우 현저히 줄었거나 엉뚱하고 잘못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전혀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죄 값을 치르게 함으로써 그 관심을 겉으로 완전하게 표출했다.
사랑과 조급증
사랑의 본질은 관심이며 그것이 행동으로 바뀌는 것은 바로 이웃이든 배우자든 섬기는 일이다. 관심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조급증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느긋하게 잘 참을 줄 아는 자가 관심을 오래 더 깊이 가지고 또 그래서 사랑을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인가? 실제로 그렇다. 절교나 이혼을 섣불리 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성경은 사랑의 본질을 분명히 조급증의 반대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랑에는 어떤 기교도 필요 없다. 어떤 면에선 순수한 진심보다도 조급하지 않는 것이 더 우선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을 설명하면서 참는다는 표현만,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셋이다. 총 열다섯 중에 겨우 셋이기에 사랑의 큰 특징일뿐 본질까지는 아니라고 간주해선 안 된다. 우선 처음에 오래 참고라고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마쳤다. 처음과 끝이 참는 것이면 그 전부가 참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열다섯 중에 하지 말아야 할 부정적 내용이 절반이 넘는 여덟이다. 아니 하려면 참아야 하는 수밖에 없다. 또 해야 한다는 긍정적 내용 일곱 중에서도 참는 것 셋을 빼면 넷인데, 그 중에 “모든 것”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믿는 것과 바라는 것 둘이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려면 당연히 오래 참아야 한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까지 믿어지려면 오래 견뎌야 하며,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한 소망도 계속 유지하려면 마찬가지다.
직접 참으라는 표현과 참는다는 뜻이 내포된 "아니하며”와 “모든”이 붙은 것을 빼고 나면 사랑의 특성 15 가지 중에 둘 밖에 남지 않는다. 온유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이 둘도 곰곰이 따져보라. 참지 않고 과연 어떻게 온유해지며, 또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겠는가? 온유란 참는 것의 다른 표현이거나 최소한 공유하는 특성이 있다. 또 불의와 거짓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려면 모든 죄악의 시험과 유혹을 참고 이겨내야 하지 않는가? 한마디로 열다섯 모두가 참는 것에 관한 설명이다. 이제 사랑의 본질이 참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일차적으로 참아야 하는 대상은 사랑하는 상대다. 어떤 허물과 잘못이 있어도 참아야 하며, 아니 바로 그런 결점들 때문에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 사람으로 그런 허물과 잘못을 범하게 만든 이 세상의 모순, 왜곡, 갈등에 대해서도 진리를 견고히 붙들고 참아야 한다. 사람이든 일에든 조급하면 사랑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서로 사랑해야 성공할 수 있게 만든 인생이기에 사랑하지 못하면 즉, 조급하면 가장 크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열정이나 의지가 받혀주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인내심이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조급증이 생기는 이유는 관심이 끊겼기 때문이다. 관심은 반드시 온전한 관계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에 관한 관심을 끊지 않으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만드신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신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이미 생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큰 이유는 자기 몸에서 났기 때문이다. 도무지 그 관계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안 된다.
결국 관심이란 내 쪽의 상황, 감정, 믿음, 소망, 열정보다는 상대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지 여부에 달린 것이다. 관계를 계속하고 싶지 않으면 관심마저 끊게 되거나 자동으로 끊긴다. 남녀 관계는 감정이 고양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관계의 지속여부도 결정된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사랑의 관계는 오히려 관계를 계속하고 싶은 소원과 의지만 있다면, 계속해서 관심을 쏟게 된다. 관심을 가지다 보면, 반대로 관심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사랑을 베풀게 되는 법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라.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는 기도도 해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당신께서 직접 그 본을 보이셨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저들이 하는 짓을 스스로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다. 그 후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그랬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얼마나 용서해주어야 하느냐 물었을 때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것이다. 숫자로는 490번을 용서해 주어야 하니까 491번째는 용서 안 해 주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에선 세 번만 참아도 의인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수십 배 더 오래 참으라는 것도 아니다. 490번의 용서란 우리 모두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숫자다.
우선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가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같은 잘못을 70번 저질러도 용서하고, 또 그런 식으로 일곱 개의 다른 잘못을 범해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 아니다. 일곱 번 용서는 거의 불가능하고 일흔 번 용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숫자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렇게 요구한 이유가 있다. 7이나 10이나 완전 숫자다. 꽉 찬 숫자다. 무조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으면 참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490번까지 용서해주다가 491번째 복수했으면 남는 것은 복수이지 용서가 아니지 않는가? 최근에 황혼 이혼이 유행하고 있다. 금술 좋게 50년이나 해로하다가 51년 째 그동안 참고 산 것이 억울하다고 서로 비방하며 이혼한다. 두 사람은 결국 사랑한 것인가 아닌가?
참는다는 것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신자들은 의지력과 결단력에 따르는 강한 믿음이라고 믿는다.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인내가 진짜 인내 되게 하려면 끝까지 가야 한다.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까지 가야 그야말로 참 인내다. 그러지 않으면 인내가 결코 아니다. 끝까지 참는 것은 중간 중간에 갈등과 분쟁이 많았다는 것이 전제가 되며,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을 다 극복했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참 인내를 결정하는 요인은 단순히 결단, 의지, 끈기가 아니다. 상대와의 관계를 정말로 기꺼이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소망 내지 의사다. 관계를 이어갈 요량이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관심을 가지면 상대의 허물과 잘못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분석도 된다.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반드시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실제로 생겨야만 참 용서가 된다. 신자니까 무조건 종교적 도덕적 의무감으로 용서할 수는 없다. 물론 그렇게 해도 용서 자체가 갖는 힘 때문에 참 용서로 이끌 수는 있다. 그러나 한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는 못한다.
솔직히 예수님이 말하는 490 번의 용서가 불가능해 보일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우리 체질이 진토 같음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전혀 불가능한 계명을 주실 리가 없다. 신자는 혼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끝까지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초대교회 때 맹수의 밥이 되어 순교한 평범한 신자들도 아마 끝까지 용서했을 것이다. 자기들을 죽음에 넘기운 자나, 직접 사형 명령을 내린 자를 원망, 분노, 저주하며 죽지 않았을 것이다. 성령의 평강과 위로가 가슴에 가득 차고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을 것이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주님이 그들을 천국 입성에 합당한 자들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들에게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토록 하신 이유다.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비결
신자는 정말 온전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세상 사람은 하지 못하는 참 사랑을 할 수 있다. 요한 사도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선언했지 않는가? 언뜻 율법적이고 너무 독단적인 선언 같지만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신자 안에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5,16) 예수를 시인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성령의 간섭을 통해 신자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를 십자가의 온전한 사랑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신자다. 신자도 그런 두려움 없는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다.
바울도 동일하게 선포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신자는 더 이상 두려워하는 영의 사슬 아래 묶일 필요 없다. 두려움은 자연히 조급증을 유발한다. 조급증은 끝까지 참게 하지 못한다. 요컨대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만들어 그 인생에 실패만 남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고 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썩는다. 오직 하나님과 당신의 말씀만이 영존한다. 그래서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는 일을 두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29절)이라고 이어서 설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바로 영생하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믿음과 소망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갖는 것이다. 천국에 가면 실현되기에 더 이상 필요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바로 사랑이며 또 천국에서 유일하게 남는 것도 사랑이다. 이 땅에서나 천국에서나 인간은 사랑하는 힘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야 말로 예수님 말씀대로 하자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을 온전히 믿게 되면 성령이 내주함으로써 참 사랑을 할 수 있다.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어떤 고난이 와도 참을 수 있다. 나아가 너무나 미워서 앙갚음을 해야만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원수라도 성령의 내 영을 깨끗이 씻음과 새롭게 함으로 용서하고 사랑까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2-14)
재차 강조하지만 성령의 인도로 참 사랑을 하라고 해서 너무 심오하고 신령하게 생각할 것 은 없다. 예컨대 노년이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도 절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성공한 인생이란 주님 안에서 만난 배우자와 비록 자주 싸우고 심지어 헤어질 뻔한 위기가 있어도 끝까지 참고 함께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노년에 새 인생을 출발한다고 하지만 그 전의 6~70년의 인생은 실패요 허비했다는 실토밖에 안 된다. 대신에 아름답고 복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래야만 한다는 뜻이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참사랑을 할 수 있는 권세를 이미 소지한 자다. 당장에 아주 잘 섬길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결코 버리지 않으려는 확고한 의지다. 그들에게 어떤 결점과 하자가 있어도 끝까지 참아내는 힘이다. 그 힘은 또 그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성령이 심어주는 소원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당장 사랑부터 하려들지 말고 진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까지 이어갈지를 판단하라는 것이다. 정말로 관계를 끊고 싶지 않다면 끝까지 참는 것이 최선이며 그러면 관심과 사랑은 따라오게 된다. 이길 외에 인생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따로 없다.
12/3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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