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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3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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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세 종류의 사람
본문: 누가복음 10: 30- 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파스칼은 태어나서 정규교육은 일 년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뛰어난 업적들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계산기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16세라는 나이에 많은 수학 난제들을 해결하여 많은 학자들은 파스칼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충격을 받고 자신의 학문을 향한 열정을 쾌락과 사교계에 쏟으며 인생을 탕진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파스칼에게 자신의 재능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1654년 11월 23일, 파스칼은 하나님을 만나고 깊은 회심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빛나는 재능은 다시 학문으로 돌아왔고 신앙에 대한 사색을 담은 훌륭한 신앙서적까지 남기게 되었습니다.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가 죽은 후 친구들이 그의 글을 모아 출판한 ‘팡세’에는 세 종류의 인간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세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이미 발견하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있는 사람, 아직 하나님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 하나님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을 구하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
파스칼은 세 명의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도리에 살고 행복하다. 마지막 사람들은 어리석고 불행하다. 그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 맞는다. 당신은 몇 번째 사람이십니까? 첫 번째 사람이 되십시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 36- 40)
우리 사회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에 나오는 바로 남의 것을 빼앗은 강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폭행으로 내 것이 아닌 것들을 강탈하는 자들입니다. 강도형의 인간상은 모든 것은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잘되기 위해서라면 남을 해치는 것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 나의 쾌락을 탐하는 인간형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이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누군가가 죽어도 나 몰라라 하고는 도망하는 존재들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위해 부정식품을 만드는 사람들, 자기 회사 이익을 위해 중소기업을 도산하게 만드는 대기업 사장 등도 이중에 속합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출20:16, 17)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며’(잠3:29)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둘째는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나 몰라라’, 또는 ‘수수방관’ 형의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들입니다. 문벌도 좋고 교양도 높은 인물들입니다. 권위를 자랑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생명의 자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받을 때 외면했습니다. 남의 고통과 상처를 안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 사람들도 아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내가 해결할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잘 살면 그만인 것처럼 남의 어려움과 불행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습니다. 내가 받은 특권만을 누리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만을 즐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은 중요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보았으나 피했고 결국 지나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도 수많은 핑계로 우리 주위의 연약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아픔을 외면하고 눈감고 있는 사람들이 이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레19:13)
셋째는 다른 사람의 위기와 고난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개와 돼지처럼 천대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맞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말로만 이웃 사랑을 하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실천했습니다. 남을 더 배려할 줄 알고 친절하고 내 주위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22:9)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15:2)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시112:9)
여러분은 이 세 종류의 사람들 중에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 종류의 사람 중에 첫째와 둘째 사람들은 심판날에 왼편으로 분류하시고 영벌에 들어가게 하시고 셋째 사람들은 오른 편으로 분류하시고 영생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마25: 31- 46)
우리는 모두 죄 많고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라도 주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습니다. 이웃들의 슬픔과 아픔을 돌아볼 줄 하는 마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위에 소외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줄 알고,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재물을 내놓을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게 하옵소서.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소망을 전하는 자들 되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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