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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잠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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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진짜 좋은 친구(잠언 19장 1-7절)
1991년 10월, 저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출신으로 건강한 선교마인드 확산의 큰 비전을 가지고 얼라이언스(Alliance) 신학대학원 졸업 후 바로 귀국했습니다. 당시 미국 지도부에서는 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우리의 핵심사상인 ‘4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100여 년 전에 받아들여 성장한 성결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은 이미 상당히 복음화가 이뤄졌는데 왜 한국으로 가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에 비전을 가지면서 ‘영혼 구원’도 중요하지만 ‘선교자원의 발굴’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한국인의 믿음과 열정이 세계선교를 위한 지원자 및 후원자 배출의 보고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연맹 리더들의 생각은 달랐기에 결국 저는 아무런 후원 약속도 없이 홀로 귀국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분식점 외식 외에는 외식도 거의 못해서 결혼 4년 만에 처음 피자헛 가게에 가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때가 온다고 믿고 열심히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족 부양을 위해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책도 쓰고 번역도 했습니다. 그때 5년 동안 4개 신학교에서 신구약 개론을 비롯해 주로 성경과목을 중심으로 총 24개의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는데 그때의 고생이 성경 전권 설교파일의 비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때 가장 큰 고통은 한국에 교단 배경이 없어 교제할 목사님이나 평신도 리더가 없었던 점이었습니다. 아내도 교제할 사모가 없었기에 위로가 필요한 젊은 시절을 많이 외롭게 보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도 길은 하나씩 열렸습니다. 1996년에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 <네트영어>를 개발했습니다. 그때 개발 후 보름 만에 영어실력이 3배쯤 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스스로 깜짝 놀랐습니다. “영어가 이렇게 쉽다니... 이것은 내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때 저는 네트영어가 위대한 작품임을 확신했고 지금도 앞으로 네트영어의 시대가 올 것을 굳게 믿습니다.
또한 2000년 초에 인터넷 말씀사역을 시작하면서 점차 교제하는 목사님들이 늘고 선교에 동참하는 목사님들도 늘었습니다. 저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목사님들도 많아졌고 온라인 새벽기도 회원 중에 목사님만 2천명이 넘으면서 이제 더 이상 외로움은 없습니다. 그렇게 여러 목사님들과의 교제가 깊어지면서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연맹>이란 초교파적인 공동체가 생기고 그 숫자도 50명이 넘었습니다.
또한 미국에서도 한국 사역에 관심을 보이면서 마침내 귀국 15년 만에 저희 단체가 공식 인정을 받았고 선교사님들도 꽤 많이 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는 2012년 총회의 한국 개최 결정까지 했습니다. 그때 50여 명이 힘을 합쳐 십시일반으로 헌신하고 6년 정도 준비하면 총회개최는 문제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총회를 2달 앞둔 지금 거의 헌신자가 없음을 보고 지금에야 ‘함께 밥 먹는 친구’와 ‘비전에 헌신하는 친구’는 다르다는 현실을 깨닫습니다.
또한 총회가 다가오면서 재정적인 압박이 생기자 다른 북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아직 역량이 없는데 총회 개최는 성급했다. 누가 이 결정을 내렸는가? 한국 체재비를 부담하기는 역부족이다.” 미국 총회 때도 한국대표나 해외 선교사들이 참석하면 부담을 덜어주려고 각종 혜택을 줍니다. 그렇게 받았던 신세를 갚는 의미에서도 체재비 부담결정은 좋은 결정이었지만 힘드니까 다른 북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북소리가 상황을 더 꼬이게 했습니다.
확실히 ‘교제 친구’와 ‘헌신 친구’는 달랐습니다. 재정상황이 어려워 헌신이 힘들면 그냥 기도만 해주면 되는데 6년 전에 함께 기뻐하며 결정했던 사항까지 다른 북소리를 내면 무슨 도움이 됩니까? 물론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총회가 아름답게 개최될 것이란 믿음도 약해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매일 이런 기도가 더욱 간절히 나옵니다. “하나님! 저희들에게 진짜 좋은 친구를 붙여주세요.”
< 진짜 좋은 친구 >
지금 시대는 더욱 진짜 좋은 친구가 그리운 시절입니다. 거의 모두에게 그런 그리움이 있기에 서로 좋은 친구가 되려고 힘쓰면 얼마나 서로에게 큰 힘이 되겠습니까? 진짜 좋은 친구는 어떤 친구일까요?
1. 입술이 지혜로운 친구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이 구절에서 잠언 기자는 성실하게 행하는 자와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진짜 좋은 친구가 되려면 입술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라는 도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가끔 사람들은 비방의 독침을 쏘며 저속한 만족감과 우월감을 즐기지만 사실상 그 독침은 맞은 자도 죽이지만 결국 쏜 자도 죽입니다. 왜냐하면 비방의 독침은 상대를 맞힌 후에는 반드시 다시 쏜 자에게로 돌아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방을 주의하십시오.
사람은 사람의 행동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누군가 잘못했어도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속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성급하게 비방하는 것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교만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비방으로 형제를 걷어차면 그가 마음의 병을 얻고 자신을 고문하며 영혼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러므로 비방을 최대한 주의하고 동시에 판단도 주의하십시오. 판단은 대개 자기의 가치관과 선입견에 따라 하기에 어떻게 보면 비방보다 더 큰 과오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프랑스 소설가 뒤마가 스위스 여행 중에 식당에서 버섯 요리를 시켰습니다. 주인이 못 알아들어서 종이 위에 버섯을 그리자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서 곧 우산을 들고 왔습니다. 그처럼 사람마다 생각이 얼마나 다릅니까? 그러므로 자신을 재판자로 삼아 남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남의 죄를 살피기 전에 먼저 자기 죄를 살피십시오.
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까? 자신의 얼굴을 보는 거울로 주신 것이지 남의 얼굴에 그 거울을 들이대며 네 얼굴을 보라고 윽박지르고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대개 ‘율법 기준’보다는 ‘자기 수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결국 판단은 판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을 침해하는 큰 죄입니다. 부모가 형제간에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싸우면 그것은 부모를 제일 화나게 하는 부모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도 판단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 침해 행위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이제 판단을 주의하고 판단을 서두르지도 마십시오. 인간 이해에는 항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남의 장점을 말하는 습성을 기르십시오. 최대의 성공비결은 남을 장점을 칭찬해주는 습성을 체질화시키는 것입니다. 요새 멍든 가슴을 안고 비방의 독침과 판단의 아픔을 헤쳐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참 소망과 위로를 전하십시오. 그처럼 가난해도 성실하게 행하며 지혜로운 말로 친구의 아픔을 헤아려주는 좋은 친구가 되십시오.
2. 감사가 넘치는 친구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자세히 보면 사람의 소원 중에는 잘못된 소원도 많습니다. 그런 잘못된 소원을 가지고 자기가 잘못된 길로 갔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출애굽 때 언약궤를 통해 엄청난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언약궤 위로 밤에는 춥고 어두우니까 불기둥이 생겼고 낮에는 덥고 눈부시니까 구름기둥이 생겼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닿자마자 강물이 끊어졌습니다. 그처럼 언약궤를 앞세우면 축복받습니다. 그러나 축복받는다는 계산으로 언약궤를 앞세우면 오히려 더 축복을 못 받습니다. 헌신하면 축복받습니다. 그러나 축복받는다는 계산으로 헌신하면 오히려 축복을 더 못 받습니다. 계산은 반드시 실망과 시험을 낳습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언약궤만 가져오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갔습니다. 승리를 위해 언약궤까지 위험한 전쟁터로 끌고 가는 그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부끄러운 기복주의적인 자세입니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싸워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진실에는 감동하고 움직이시지만 인간의 헛된 장단을 따라서는 그대로 춤추시지 않습니다.
그때 언약궤를 보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흥분해서 소리쳤습니다. “이제 이 전쟁은 끝났다! 이겼다!” 그처럼 잘못된 기복주의적인 확신은 자기 본분을 잊은 무책임한 사람을 만듭니다. 그 바람대로 그들이 전쟁에서 이겼습니까? 오히려 대패하고 언약궤를 뺏겼습니다. 그때 그 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겠습니까? 그처럼 잘못된 기복주의적인 확신은 일과 영혼을 더 망칩니다. 그처럼 자신의 죄와 미련함으로 복을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원망이 체질화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친구가 되려면 늘 원망보다는 감사를 앞세워 사십시오. 사람이 현재 처지에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원망은 몸과 마음을 망치는 무서운 병입니다. 반면에 감사는 어떤 약보다 강력한 치료제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많으면 공동체와 가정이 건강해집니다. 원망은 인생에 어떤 도움도 안 주지만 감사는 생각을 초월한 많은 축복을 예비하고 좋은 친구를 얻게 만듭니다.
3. 끝까지 진실한 친구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진실한 친구를 얻거나 진실한 친구가 되려면 거짓말을 삼가십시오. 진실은 우정관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어떻게 다윗이 성군이 될 수 있었습니까? 끝까지 진실했던 친구 요나단 때문입니다. 사실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만큼 용사였습니다. 외모와 풍채도 뛰어났습니다. 무엇보다 요나단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출중해서 다윗을 누구보다 아껴주었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은 리더에게 필요한 가장 귀한 덕목입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아낄 줄 알아야 진짜 좋은 친구를 얻습니다.
또한 요나단은 남을 칭찬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경계하며 의심할 때 요나단은 다윗의 장점을 얘기하며 변호해주었습니다. 그처럼 비판 전문가가 아닌 칭찬 전문가가 되십시오. 남을 볼 때 흠잡을 것을 주로 찾아서 보면 나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쾌해지지만 사심 없이 누군가를 칭찬하면 나도 흐뭇해지고 남도 푸근해집니다. 그처럼 요나단은 ‘이익’보다는 ‘의리’를 중시한 진짜 좋은 친구였습니다.
살다 보면 이익 문제로 친구가 갈라지는 상황을 많이 봅니다. 그처럼 자기 이익이 판단의 근거가 되면 ‘진리’도 사라지고 ‘의리’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을 굳게 지켜 끝까지 진실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의 은신처를 찾아가 다윗을 피신시켰고 헤어질 때는 서로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처럼 손해가 예상되어도 진리와 의리를 지키고 끝까지 진실한 친구가 되십시오.
4. 주기를 좋아하는 친구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좋은 진짜 친구를 원하면 열심히 나눠주는 훈련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친구는 주기만 해도 안 되고 받기만 해도 안 됩니다. 서로 주고받을 줄 알아야 최소한 친구가 됩니다. 그러나 친구 중에서도 진짜 좋은 친구가 되려면 줄 때는 최대한으로 주려고 하고 받을 때는 최소한으로 받으려고 하십시오.
살면서 항상 무엇을 얻으려는 마음보다 무엇을 주려는 마음을 앞세우십시오. 아무리 좋은 사이도 세 번 거듭해서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면 ‘사이’가 멀어지고 아무리 나쁜 사이도 세 번 거듭해서 무엇인가 선물을 주면 ‘차이’가 멀어집니다. 이익을 위한 사귐은 수명이 짧지만 나눔을 위한 사귐은 수명이 깁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줄 때는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정신적인 나눔도 중요합니다.
중국 제나라에 관중과 포숙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동업할 때 포숙은 자기 몫을 많이 챙긴 관중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관중이 자기보다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중이 여러 번 관직에서 파면될 때도 무능함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불운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중에 전쟁 때마다 도망쳐도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관중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환공을 도와 천하를 움직이는 대 정치가가 된 관중은 말했습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었다.”
‘물질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알아주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이제 그의 진가를 알아주십시오. 현재는 부족해도 그의 가능성을 알아주십시오. 그렇게 알아주면 그가 언젠가 인물이 되어 거꾸로 나를 알아줄 것입니다. 그처럼 정신적으로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상 물질적인 나눔도 역시 중요합니다.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은 욕심과 기복주의를 극복하는 최대의 훈련 통로이자 축복 통로입니다.
왜 하나님이 재물을 주셨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잘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얼마나 그런 현실을 많이 봅니까?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가난하면 친구를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두 가지 도전을 줍니다. 하나는 재물로 친구를 평가하지 말라는 도전입니다. 또 하나는 재물을 잘 나눔으로 많은 친구를 만들라는 도전입니다. 이제 열심히 나눔을 실천하십시오. 친구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혜성처럼 나타나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고 유성처럼 조용히 사라지는 음지의 고수가 되십시오. 물질을 그렇게 멋지게 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진짜 좋은 친구를 얻을 것입니다.
< 진짜 좋은 친구가 되십시오 >
성경에는 좋은 친구관계를 통해 큰 역사를 일으킨 예가 많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엘리야와 엘리사,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의 친구관계를 통해 얼마나 위대한 일들이 많이 이뤄졌습니까? 참된 우정의 나무는 늦게 자라지만 나중에 큰 그늘을 제공합니다. 결국 우정은 축복의 둥지와 같습니다.
한문으로 친구를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란 뜻으로 지기(知己)라고 합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가 오랫동안 곁에 있어주는 것은 행복의 큰 요소입니다. 그런 오랜 친구를 ‘죽마를 타던 어릴 때 친구’란 뜻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마고우를 ‘죽치고 마주앉아 고스톱 치며 우정을 나누는 친구’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죽마고우는 ’죽기를 각오하고, 마음을 주고, 고통을 나누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입니다.
친구는 ‘또 다른 자기’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사람됨을 보려면 그의 친구를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친구를 잘 선택하십시오. 인생의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선택은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영생을 좌우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선택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일생을 좌우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선택은 친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성공과 행복을 좌우합니다.
진짜 친구는 비밀까지 나누는 친구입니다. 사람이 어릴 때는 비밀이 없다가 청소년이 되면 점차 자기 비밀이 생기면서 말 수가 줄고 방문을 닫습니다. 그래도 충격 받지 마십시오. 발전과 성숙 과정의 한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비밀이 생기면서 비밀을 나눌 친구를 찾는데 그때 좋은 친구를 만나면 복된 인생이 펼쳐지고 나쁜 친구를 만나면 호된 인생이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더 성장하면 자기 비밀을 나눌 이성을 발견하고 결혼합니다.
사실상 부부는 깊은 비밀을 나누는 최고의 친구입니다. 약점과 아픔도 나누고, 좌절과 실패도 나누고, 몸 구석까지 다 나누는 특별한 친구가 바로 부부입니다. 그처럼 사람은 누구나 건강한 친구를 필요로 합니다. 서로 그런 건강한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히틀러의 유일한 친구 중에 엘버트 스피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그를 중용해서 군수물자 책임자로 삼았는데 그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틀러는 우정에 반응할 줄 몰랐고 우정을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친구는 거대한 에고(ego, 육신적 자아)의 투사체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히틀러의 불행은 우정을 거부했던 불행이었습니다. 그처럼 우정을 거부하면 행복도 거부됩니다. 반면에 우정을 쌓으면 나중에 인생의 큰 도움을 얻습니다. 친구로 인해 낙심과 절망을 극복하고 큰일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날, 선교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선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여러 선교 프로젝트로 인해 선교 본부와 이견충돌이 생겼습니다. 마침내 선교 본부에서 경고장 하나가 날라 왔습니다. 선교 본부를 탈퇴하든지 아니면 현재의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순종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편지였습니다. 그 통지를 받고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얼마 후 그는 편지 또 한 장을 받았습니다. 영국에 있던 애인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그가 너무 모험적인 삶을 살기에 일생을 함께 할 자신이 없어서 그만 사귀자는 절교편지였습니다. 그는 더욱 깊은 낙심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선교를 포기하고 싶었고 심지어는 삶까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를 건진 사람은 20살 많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윌리엄 번스란 친구 선교사였습니다.
번스는 테일러의 능력과 가능성을 알아주고 젊은 그를 좋아하며 친구하자고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테일러가 절망에 빠지자 모든 것을 다 잊고 같이 선교여행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7개월간 둘은 중국 전역을 다니며 재충전하고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여행 중에 번스는 테일러에게 끊임없이 2가지 말을 해주었습니다. 하나는 “나는 자네를 믿네(I trust you).”란 말이었고, 또 하나는 “나는 자네를 따르겠네(I will follow you).”란 말이었습니다. 마침내 테일러는 회복되었습니다.
만약 테일러에게 번스란 좋은 친구가 없었다면 그는 결정적인 때에 결정타를 맞고 쓰러졌겠지만 좋은 친구가 있었기에 결정적인 위기를 결정적인 기회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여행 중에 번스는 테일러의 생각과 태도에 100%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교정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낙심과 외로움으로 신음하는 그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면서 가끔 바른 말도 해주었습니다. 그때 테일러의 잘못된 생각과 태도가 많이 교정되었습니다.
지금 번스처럼 자신을 믿어주고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그런 친구를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친구 대상과 교제하며 그가 자기 맡에 귀를 기울여주기만 기대하지 말고 먼저 그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들을 때는 청력으로 듣는 히어링(hearing)을 하지 말고 귀 기울여 듣는 리스닝(listening)을 하십시오. 그처럼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우선함으로 좋은 친구를 만들고 그 좋은 친구와 함께 인물의 꿈을 멋지게 펼쳐나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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