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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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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십 점 만점에 십 점인가?
한마음 교회 송구영신 예배 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2011년 한 해가 당신에게 성공이었는가? 실패였나? 신나고 기쁘고 감사가 넘친 한 해였는가? 1에서 10까지 점수를 매기면 8, 9, 10점은 되는가? 얼굴 표정들을 보니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혹시 중간인 5점과 그 이하인가?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빌립보서 4:19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너희 모든 쓸 것을 풍성히 채우신다고 약속했다. 그럼 예수님과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오래 전 한국의 시내버스마다 운전석 위 중앙에 그림이 하나 붙어 있었다. 예쁜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이다. 그 옆에 글귀가 하나 적혀 있었다. 바로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이다. 오늘 송구영신 예배로 모인 뜻이 단지 “올해도 무사히”라면 너무나 가난한 신앙이 아닌가?
물론 최근에 살기가 아주 고달프다. 극심한 불경기로 부도가 나는 사람도 많다. 힘든 일을 겪지 않은 것만도 분명히 감사하다. 또 우리의 그런 감사를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신다.
하나님이 신자의 어떤 모습을 가장 싫어하는지 아는가? 어른 성경공부 첫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혹시 기억하는가? 바로 그 자리에 가만히 정체 되어서 서있는 것이다. 아무 발전과 성장이 없는 것이다. “올해도 무사히”도 좋지만 매번 송구영신에 그런 예배만 드린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송구영신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올해는 내 생애 최고의 해였습니다.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라는 고백을 저절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의 정체된 모습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성경에는 행복, 영어로 happy 혹은 happiness 라는 단어가 단 한 차례도 안 나오기 때문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행복하게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신자가 행복해지길 하나님이 더 간절히 원하신다. 그렇다고 돈을 버는 것이 성경적으로 나쁜 일이기 때문도 아니다. 돈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정당하게 벌어서 정당하게 쓰면 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일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영어 happy의 의미와 다르다. 영어 Happy는 동사 Happen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항상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야만 행복해진다는 의미가 있다. 올해 신형 스마트폰, 노트북, 아이패드를 갖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삶이 고달픈 이유가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데 반해 그것을 채울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도 검소하게 사는 자도 많다. 심지어 무소유를 실천하여 큰 존경을 받았던 스님도 있다. 문제는 반드시 좋은 일, 기쁜 일이 눈에 보이게 일어나야만 행복하다고 여기는 생각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신자도 이런 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여 수입이 5천 불에서 만 불로 늘었다. 당연히 기쁘고 행복해진다. 여기까진 아무 잘못이 없다. 문제는 좋은 일이 안 일어나면 금방 불행해지는 것이다. 심지어 영적인 문제에도 그렇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면서 뭔가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뭔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어야 믿음이 좋다고 여긴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다. 기도 응답을, 그것도 내 뜻과 방식대로 당장 응답 받아야 행복해진다.
올해도 무사했다는 뜻은 뭔가 신나는 일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저 그랬다는 말이다. 그럼 그 진짜 속마음은 해피하지 않은 것이다. 송구영신 예배라고 일부러 기쁘고 감사한 것처럼 가장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올 한해는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너무 많이 남았다고, 야곱처럼 나에게 복을 주지 않으면 절대 내년으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영어로 blessing이다. 한국말로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로마서에 딱 두 번만 나오지만 둘 다 영어로 blessing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복 달라고 떼쓴 것도 blessing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복이다. 세상에선 얻지 못하는 복이다. 불신자들은 누리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복이다. 기도해서 사업이 흥하고 병이 낫는 정도의 복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영어 blessing은 어원적으로 놀랍게도 피를 흘린다는 bleed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을 거역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함께 벌을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의 가죽 옷이 있는 한 어떤 어려움에도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신자에게 올해도 무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짐승을 죽이며 피를 흘렸다. 정작 죽었어야 할 아담 대신에 짐승을 죽이고 아담을 살려 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면 하나님과 화목 된다. 또 비로소 인생에서 참 행복과 위로와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예수를 모르는 빌 게이츠보다는 예수를 아는 마이크로소프트사 수위가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 바로 blessing의 뜻이다.
우리 어리고 젊은 학생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교리가 어려울 수 있다. 완전한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아무래도 올 해에 아빠가 아이패드를 사줬으면 훨씬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한국 서울에 사는 제 누님의 아들이 3 대 독자다. 중학교 일학년(7학년) 여름 방학 때에 아버지가 대전까지 도보 여행을 가자고 했다. 왕복 300마일을 걸어서 갔다 오는 것이다. 당연히 힘들고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금방 다리가 아프고 물집이 생겼다. 호텔에서 자지도 않았다. 가다가 지치면 아무 여관에서 잤다. 밥도 허름한 시골 식당에서 된장찌개나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비를 맞고 걸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여행 중에 아빠와 그 때까지 했던 것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정말로 힘들어 걷지 못하면 아빠가 업어주기도 했다. 그 여행이 끝나자 아빠와 아들 사이에는 세상에 어느 누구도 깨트리거나 방해할 수 없는 절대적 신뢰와 사랑이 생겼다. 지상 최고의 부자 관계로 맺어졌다. 아빠도 무척 힘들긴 마찬가지인데도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3대 독자니까 더 강하게 키우려는 뜻이었다. 세상을 보고 생각하는 수준을 성숙시키려는 의도였다. 그 여행은 일생 중 최고로 좋았던 경험이 되었고 그런 여행을 시켜준 아빠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아빠에게서 신형 노트북 선물로 받으면 물론 기뻐다. 그러나 그 때 뿐이다. 그렇다고 또 다른 신형이 나오면 바꾸고 싶어서 즉, 욕심이 끝이 없어서만이 아니다. 신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빠가 선물을 사주지 않으면 아빠가 좋다는 생각이 생기지 않는 것이 잘못의 본질이다.
여러분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스마트폰은 사주는데 매일 늦게 오는 아빠와, 구식 셀폰 밖에 못 사주지만 자주 같이 놀아주는 아빠와 어느 쪽이 좋은가? 남모르게 갖고 있는 고민이나 잘못한 것을 아무 때나 털어놓아도 그저 인자하게 끝까지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아빠 말이다.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수 있으며, 아무리 성적이 나빠도 오히려 격려만 해주는 아빠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까닭이 바로 우리가 울 때 함께 울고, 우리가 웃을 때에 함께 웃으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에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언제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밖에서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빠에게 나아가면 바로 용서하고 오히려 격려해주는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Blessing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올해도 무사해서 감사하다는 고백을 결코 싫어하지는 않는다. 아무 문제없이 착한 아들을 부모가 싫어할 리 없다. 그러나 대전까지 도보 여행이 너무 힘드니까 차라리 중학교 일학년에 그대로 머물겠다는 아들을 보는 아빠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얼마나 안타깝고 애가 타겠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이 바로 그러하다. 너무 많아서 차고 넘친다는 뜻과 함께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의미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이라도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에게 blessing하려고 예비하신 하늘의 하나님 창고에는 재고가 절대 마르지 않는다. 영원히 솟는 생명의 샘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사랑, 기쁨, 위로, 지혜, 격려, 경건, 능력, 소망, 심지어 하나님이 심어주는 믿음도 영원토록 넘치고도 넘친다.
문제는 우리다. 양 손에 자꾸만 뭔가 움켜쥐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우리 손이 빈손이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쥐어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다. 본문처럼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만 천국을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우리는 끝이 없을 만큼 탐욕적이지 않다. 빈 손이 된다고 해서 질과 양적으로 소원을 줄이라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우리가 세운 계획과 뜻을 다 없애라는 뜻도 아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려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노력하여 달성해야 한다.
빈손이 된다는 것은 행복에 대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신나는 일이 일어나야 행복해지려면 끝이 없다. 아니 성경에 그런 행복은 단 한 자도 없으니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응답도 받지 못한다. 세상에서 권세와 명예를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사는 천 날 보다, 여호와의 궁정의 문지기로 하루라도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가난한 심령이다. 또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참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부모님들부터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하며 엎드리셔야 한다. 예수님의 blessing을 듬뿍 받아야 한다. 그 받은 복으로 자녀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정말로 복음으로 세상의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세력에 당당히 싸워서 이기는 믿음의 본을 생활에서부터 보여 주어야 한다. 자녀들도 우리 아빠가 당장 아이패드 사주지 못해도 세상에서 최고로 나를 사랑하는 아빠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빠가 그러지 못해서 말은 안 해도 속으로 더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부모님들 정말로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 이 아이가 아이비리그 들어가고 좋은 직장 얻어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그 전에 이 아이가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게 해달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귀한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happiness 보다 blessing의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2012년의 송구영신 예배에선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올해가 내 생애 최고의 해였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2/31/2011
한마음 교회 송구영신 예배 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2011년 한 해가 당신에게 성공이었는가? 실패였나? 신나고 기쁘고 감사가 넘친 한 해였는가? 1에서 10까지 점수를 매기면 8, 9, 10점은 되는가? 얼굴 표정들을 보니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혹시 중간인 5점과 그 이하인가?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빌립보서 4:19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너희 모든 쓸 것을 풍성히 채우신다고 약속했다. 그럼 예수님과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오래 전 한국의 시내버스마다 운전석 위 중앙에 그림이 하나 붙어 있었다. 예쁜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이다. 그 옆에 글귀가 하나 적혀 있었다. 바로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이다. 오늘 송구영신 예배로 모인 뜻이 단지 “올해도 무사히”라면 너무나 가난한 신앙이 아닌가?
물론 최근에 살기가 아주 고달프다. 극심한 불경기로 부도가 나는 사람도 많다. 힘든 일을 겪지 않은 것만도 분명히 감사하다. 또 우리의 그런 감사를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신다.
하나님이 신자의 어떤 모습을 가장 싫어하는지 아는가? 어른 성경공부 첫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혹시 기억하는가? 바로 그 자리에 가만히 정체 되어서 서있는 것이다. 아무 발전과 성장이 없는 것이다. “올해도 무사히”도 좋지만 매번 송구영신에 그런 예배만 드린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송구영신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올해는 내 생애 최고의 해였습니다.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라는 고백을 저절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의 정체된 모습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성경에는 행복, 영어로 happy 혹은 happiness 라는 단어가 단 한 차례도 안 나오기 때문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행복하게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신자가 행복해지길 하나님이 더 간절히 원하신다. 그렇다고 돈을 버는 것이 성경적으로 나쁜 일이기 때문도 아니다. 돈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정당하게 벌어서 정당하게 쓰면 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일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영어 happy의 의미와 다르다. 영어 Happy는 동사 Happen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항상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야만 행복해진다는 의미가 있다. 올해 신형 스마트폰, 노트북, 아이패드를 갖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삶이 고달픈 이유가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데 반해 그것을 채울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도 검소하게 사는 자도 많다. 심지어 무소유를 실천하여 큰 존경을 받았던 스님도 있다. 문제는 반드시 좋은 일, 기쁜 일이 눈에 보이게 일어나야만 행복하다고 여기는 생각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신자도 이런 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여 수입이 5천 불에서 만 불로 늘었다. 당연히 기쁘고 행복해진다. 여기까진 아무 잘못이 없다. 문제는 좋은 일이 안 일어나면 금방 불행해지는 것이다. 심지어 영적인 문제에도 그렇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면서 뭔가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뭔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어야 믿음이 좋다고 여긴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다. 기도 응답을, 그것도 내 뜻과 방식대로 당장 응답 받아야 행복해진다.
올해도 무사했다는 뜻은 뭔가 신나는 일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저 그랬다는 말이다. 그럼 그 진짜 속마음은 해피하지 않은 것이다. 송구영신 예배라고 일부러 기쁘고 감사한 것처럼 가장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올 한해는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너무 많이 남았다고, 야곱처럼 나에게 복을 주지 않으면 절대 내년으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영어로 blessing이다. 한국말로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로마서에 딱 두 번만 나오지만 둘 다 영어로 blessing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복 달라고 떼쓴 것도 blessing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복이다. 세상에선 얻지 못하는 복이다. 불신자들은 누리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복이다. 기도해서 사업이 흥하고 병이 낫는 정도의 복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영어 blessing은 어원적으로 놀랍게도 피를 흘린다는 bleed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을 거역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함께 벌을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의 가죽 옷이 있는 한 어떤 어려움에도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신자에게 올해도 무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짐승을 죽이며 피를 흘렸다. 정작 죽었어야 할 아담 대신에 짐승을 죽이고 아담을 살려 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면 하나님과 화목 된다. 또 비로소 인생에서 참 행복과 위로와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예수를 모르는 빌 게이츠보다는 예수를 아는 마이크로소프트사 수위가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 바로 blessing의 뜻이다.
우리 어리고 젊은 학생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교리가 어려울 수 있다. 완전한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아무래도 올 해에 아빠가 아이패드를 사줬으면 훨씬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한국 서울에 사는 제 누님의 아들이 3 대 독자다. 중학교 일학년(7학년) 여름 방학 때에 아버지가 대전까지 도보 여행을 가자고 했다. 왕복 300마일을 걸어서 갔다 오는 것이다. 당연히 힘들고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금방 다리가 아프고 물집이 생겼다. 호텔에서 자지도 않았다. 가다가 지치면 아무 여관에서 잤다. 밥도 허름한 시골 식당에서 된장찌개나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비를 맞고 걸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여행 중에 아빠와 그 때까지 했던 것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정말로 힘들어 걷지 못하면 아빠가 업어주기도 했다. 그 여행이 끝나자 아빠와 아들 사이에는 세상에 어느 누구도 깨트리거나 방해할 수 없는 절대적 신뢰와 사랑이 생겼다. 지상 최고의 부자 관계로 맺어졌다. 아빠도 무척 힘들긴 마찬가지인데도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3대 독자니까 더 강하게 키우려는 뜻이었다. 세상을 보고 생각하는 수준을 성숙시키려는 의도였다. 그 여행은 일생 중 최고로 좋았던 경험이 되었고 그런 여행을 시켜준 아빠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아빠에게서 신형 노트북 선물로 받으면 물론 기뻐다. 그러나 그 때 뿐이다. 그렇다고 또 다른 신형이 나오면 바꾸고 싶어서 즉, 욕심이 끝이 없어서만이 아니다. 신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빠가 선물을 사주지 않으면 아빠가 좋다는 생각이 생기지 않는 것이 잘못의 본질이다.
여러분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스마트폰은 사주는데 매일 늦게 오는 아빠와, 구식 셀폰 밖에 못 사주지만 자주 같이 놀아주는 아빠와 어느 쪽이 좋은가? 남모르게 갖고 있는 고민이나 잘못한 것을 아무 때나 털어놓아도 그저 인자하게 끝까지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아빠 말이다.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수 있으며, 아무리 성적이 나빠도 오히려 격려만 해주는 아빠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까닭이 바로 우리가 울 때 함께 울고, 우리가 웃을 때에 함께 웃으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에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언제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밖에서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빠에게 나아가면 바로 용서하고 오히려 격려해주는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Blessing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올해도 무사해서 감사하다는 고백을 결코 싫어하지는 않는다. 아무 문제없이 착한 아들을 부모가 싫어할 리 없다. 그러나 대전까지 도보 여행이 너무 힘드니까 차라리 중학교 일학년에 그대로 머물겠다는 아들을 보는 아빠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얼마나 안타깝고 애가 타겠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이 바로 그러하다. 너무 많아서 차고 넘친다는 뜻과 함께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의미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이라도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에게 blessing하려고 예비하신 하늘의 하나님 창고에는 재고가 절대 마르지 않는다. 영원히 솟는 생명의 샘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사랑, 기쁨, 위로, 지혜, 격려, 경건, 능력, 소망, 심지어 하나님이 심어주는 믿음도 영원토록 넘치고도 넘친다.
문제는 우리다. 양 손에 자꾸만 뭔가 움켜쥐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우리 손이 빈손이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쥐어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다. 본문처럼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만 천국을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우리는 끝이 없을 만큼 탐욕적이지 않다. 빈 손이 된다고 해서 질과 양적으로 소원을 줄이라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우리가 세운 계획과 뜻을 다 없애라는 뜻도 아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려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노력하여 달성해야 한다.
빈손이 된다는 것은 행복에 대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신나는 일이 일어나야 행복해지려면 끝이 없다. 아니 성경에 그런 행복은 단 한 자도 없으니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응답도 받지 못한다. 세상에서 권세와 명예를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사는 천 날 보다, 여호와의 궁정의 문지기로 하루라도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가난한 심령이다. 또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참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부모님들부터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하며 엎드리셔야 한다. 예수님의 blessing을 듬뿍 받아야 한다. 그 받은 복으로 자녀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정말로 복음으로 세상의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세력에 당당히 싸워서 이기는 믿음의 본을 생활에서부터 보여 주어야 한다. 자녀들도 우리 아빠가 당장 아이패드 사주지 못해도 세상에서 최고로 나를 사랑하는 아빠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빠가 그러지 못해서 말은 안 해도 속으로 더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부모님들 정말로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 이 아이가 아이비리그 들어가고 좋은 직장 얻어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그 전에 이 아이가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게 해달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귀한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happiness 보다 blessing의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2012년의 송구영신 예배에선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올해가 내 생애 최고의 해였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2/3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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