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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koabbey.com/index.php?document_srl=56597&mid=ab_mo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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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본 글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III권 2장의 말씀으로 라틴어 부분은 정확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관상기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믿음과 소망, 사랑의 관계(41-43항)
41. 히브리서 11장 1절에 있는 신앙
믿음의 본질은 믿음의 합당한 기초(proprio fundamento)가 되는 약속의 실체(promissionis substantia)를 통해 제일 낫고 명백하게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약속이 제거될 때 믿음은 완전히 무너지거나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에 근거하여 믿음을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가 내린 정의 아니면 그가 믿음을 논의하면서 적용시킨 묘사, 즉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 참고. Vg.)라는 구절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가 여기에서 사용한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은 경건한 마음이 기대고 쉴 수 있는 일종의 밑받침(quasi fulcrum)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도는 마치 믿음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확실하고 안전하게 소유하는 것(ceitam ac securam possessionem)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단 누군가가 "휘포스타시스"를 신뢰라는 뜻으로 이해하려고하지 않을 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취하지만 이런 해석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한편 바울이 의미하려고 하는 것은 "책들이 펴 놓일"(단 7:10) 마지막 때까지 우리의 구원에 속한 일들은 너무나 고상하기(sublimiora) 때문에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거나 눈으로 보지 못하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이며, 또한 그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감각의 모든 한계들(captum omnem ingenii nostii)을 넘어서고 우리의 지각을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의 건너편으로 향하게 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nos denique ipsos superemus) 것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이러한 일들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유에 대한 확신(securitatem possidendi)은 소망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것이라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바울이 기록하고 있듯이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바울은 그것을 "지시"(indicem) 혹은 "증거"(probationem)-혹은 어거스틴이 종종 번역하고 있듯이 "현재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확신("확신"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ἔλεϒχος이다, 히11:1)-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마치 믿음은 나타나지 않은 것들의 증거(evidentiam)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보는 것(visionem)이요 애매모호한 것들의 선명함(perspicuitatem)이요 현재 없는 것들의 있는 것(pmesentiam)이요 감추어진 것들의 드러남(demonstrationem)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비밀들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구원에 속한 비밀들은 그것들 자체로는 인식될 수가 없으며 또한 말하자면 그 자체의 성격(natura) 상으로도 인식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볼 수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행해졌고 성취된 것으로 간주할 만큼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믿음과 사랑)
그러나 사람의 지성이 일깨워져서 신적인 선하심(divinae bonitatis)을 맛보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시에 불붙지(accendatur)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그 풍성한 감미로움(suavitatis affluentia)을 알려지게 되면 우리는 동시에 크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일단 한 번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게 되면 사람은 그 감미로움에 휩싸여 이끌려가게 된다(penitus ad se rapit et effert).
그러므로 만일 왜곡되고 사악한 마음이 그런 감정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편 우리는 그런 감정으로 하늘에까지 이끌려 들어가서 가장 깊숙이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들(reconditissimos Dei thesauros)과 하나님 나라의 가장 거룩한 장소들(sacratissima regni)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 이러한 장소들은 부정한 마음이 들어가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곳이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먼저 있다(priorem)고 하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미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일으키는 것(primum generat)은 오직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는 베르나르드(Bernard)의 말은 얼마나 더 올바른가! 즉 '바울이' 경건한 자의 자랑'(고후 1:12)이라고 부르고 있는 양심의 증거(testimonium conscientiae)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나는 믿는다. 첫째로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를 떠나서는(nisi per indulgentiam Dei)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행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선행을 할 수 없다. 끝으로, 여러분은 그것이 값없이 주어지지 않으면(nisi gratis detur etilla) 그 어떤 행위로도 영생을 얻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없다."
조금 지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즉 이런 것들은 충분하지 않고 다만 믿음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구원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repositam)는 성령의 증거를 믿어야만 그들이 죄 용서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사하시고 공로를 인정해 주시고(merita ipse donat) 상급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초보 단계에 굳게 설 수 없다는 것도 역시 믿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저런 문제들은 적절한 곳에서 논의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단지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도록 하자.
42. 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살아 있는 곳(viva)에는 어디든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그 불가분리적인 동반자(comitem individuam)로서 결에 함께 두고 있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믿음은 그 자체에서 소망을 일으키고(gignat) 낳는다(exserat). 이 소망이 제거된다면 우리가 아무리 웅변적으로 또는 우아하게 믿음에 관해 논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nullam habere convincimur). 만일 믿음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고히 믿는 것(veritate Dei persuasio)이라면-그것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헛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면-이런 확신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들, 즉 그들이 절대로 참되다고 믿는(persuasione nonnisi verae esse possunt) 약속들을 성취하실 때가 앞으로 오게 되리라는 것을 확고히 기대할 것이다.
따라서 간단히 말하자면 소망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참으로 약속되었다고 믿는 것들을 기대하는 것(exspectatio)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이 진실하시다고(veracem) 믿으며, 소망은 그의 진실이 나타나게 될 시간(temporis)을 기다린다. 믿음은 그가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으며, 소망은 그가 친히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기대한다. 믿음은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믿으며, 소망은 그것이 언젠가 계시될(reveletur) 것을 기대한다. 믿음은 소망이 근거를 두는 기초(fundamentum) 이며, 소망은 믿음을 키워 주고(alit) 유지시켜 준다(sustinet).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무너지거나 희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의 연약성이 오래 참는 소망(patienter sperando)과 기대(exspectando)에 의해 유지되고 양육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올바르게 우리의 구원을 소망에 두고 있다(롬 8:24) 소망은 고요하게(in silentio) 주님을 기다리면서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억제시킨다. 소망은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줌으로써(confirmat) 하나님의 약속들 가운데 흔들리거나 그것들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지 못하게 한다. 소망은 믿음을 새롭게 만들어 줌으로써(recreat) 지치지 않게 해 준다. 소망은 믿음을 그 마지막 목적지에 이르게 될 때까지 유지시켜 줌으로써(extendit)중도에서 아니 첫 출발점에서 넘어지지 않게 해준다. 간단히 말해서 소망은 믿음을 새롭게 하고 회복시켜 줌으로써(renovando et instaurando) 계속적으로 믿음을 인내로써 기운을 내게 해 준다.
만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종류의 시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공격하고 때리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는 소망의 뒷받침(spei subsidia)이 여러 방면에서 얼마나 필요한지를 더욱더 잘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것들을 늦추심으로써(differendo) 종종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초조한 마음상태에 두실 때가 있다. 여기에서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 2:3)고 한 예언자의 말을 시행케 하는 것이 소망의 역할(officium spei)이다.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연약한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허용하실(languere nos sinit)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 노골적으로 분노(indignationem)를 나타내 보이시기도 한다. 이릴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선지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낮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릴"(사 8:17) 필요가 더욱더 절실해진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일어나서(벧후 3:3),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라고 물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육신과 세상은 우리에게 이와 동일한 말들로 속삭인다(insusurrant). 여기에서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는 소망(spei tolerantia)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버팀으로써(fidem suffultam)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길 정도로(시 90:4; 벧후 3:8) 영원을 고정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43.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동일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과 유사성 때문에 성경은 종종 "믿음"과 "소망"을 서로 바꾸어서 사용하고 있다(confundit). 베드로가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칠 때(딤전 1:5) 그는 믿음을 소망에 해당되는 어떤 것(magis quadrabat)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소망은 믿음의 영양분(alimentum)과 힘(robur)이기 때문이다.
때로 이 두 단어는 동일한 서신에 나오고 있는 것처럼 함께 결합되기도 한다. 즉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소망으로부터 기대가 나오는 것(ex spe deducit exspectationem)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참고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나타나게 되기까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유보시키기(suspendimus) 때문이다(빌 1:20). 이 모든 문제는 이미 인용한 바 있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1절).
다른 구절에서 비록 부정확하기는(improprie) 하지만 바울은 동일한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즉 그 이유는 값없이 주어진 사랑에 관한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지금 소망 아래에 감춰져 있는(nunc sub spe absconditum) 것을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보여 주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소망의 기초를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의 공로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이제 분명해지고 있다. 소망이 가지고 있는 목표(scopus)는 믿음이 가지고 있는 목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믿음의 유일한 목표(unicum scopum)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두 눈을 떠서 그 목표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롬바르드가 그럴듯하게 제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이 감히 공로 없이(sine mentis) 어떤 것을 소망한다면 그것은 '소망' 이 아니라 '과대망상' (praesumptio)이라고 불려야만 한다"고 하였다.
친애하는 독자여, 하나님이 참되시다고 믿는 사람을 무모하고 과대망상적인 행동을 하는 자라고 공언하고 있는 이런 짐승과 같은 자들(bestias)을 무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닐까?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일들이 그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기다리기를 원하시는데, 그들은 그것에 의지하고 바라는 것을 과대망상적인 행동(praesumptionem)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선생은 선생이다! 그들이야말로 논쟁을 일삼은 자들의 미친 학교(insanis rabularum scholis)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학생들에게 값어치 있는 선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품으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에서(Dei oraculis) 받은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참되심을 기꺼이 믿음으로써 오직 그의 자비하심만을 의지하고 행위에 의존하는(operun fiducia) 것을 버리고 감히 선한 소망을 가지도록 하자.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고 말씀하신 그분은 결코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non faller 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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