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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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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10.11.28 |
변화산에 초막 짓는 교회.
마 17:1-8.
1992년 올림픽이 끝난 직후 미국에서 목회 하시던 선배 목사님 한 분이 한국엘 나오셔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호텔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깜짝 놀랄 뉴스 하나를 보신 모양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어린 아이들이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운동화를 신고 다녀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는 뉴스였습니다. 지금도 10만 원짜리 운동화는 만만치 않은 것이지만 거의 20년 전에 10 만 원 짜리 운동화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김 목사 정말 한국 아이들이 그렇게 비싼 운동화들을 신고 다니나?’ 저는 그런 운동화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저도 놀라서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세상에 10 만 원 짜리 운동화가 다 있냐?’ 아이들이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제가 또 물어 보았습니다. ‘너희 학교에도 그런 운동화 신고 다니는 놈들이 있냐?’ 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만 빼 놓고는 다 신어요.’
아이들에게 그런 비싼 운동화 사달라고 조르지 않아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그 편지에 왜 그런 운동화를 신으면 안 되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내용은 간단하였습니다. 그것은 ‘쓸데 없다’였습니다. 그해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을 하였었습니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기 전 어느 회사에서 1억 원을 들여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화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황영조 선수가 1억 원 짜리 운동화를 시는 것은 괜찮다라고 써 주었습니다. 이유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것은 ‘쓸데 있다’였습니다.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가 발에 잘 맞는 운동화를 신고 기록을 단축하여 메달의 가능성을 높힐 수 있다면 그것은 1억 원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으니 그럴 경우 1억 원 짜리 운동화를 신는 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옳은 일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편지 중에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는 이유가 무엇이냐? 기록을 단축하기 위함이냐 아니면 국위를 선양하기 위함이냐?’ 그리고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 주었습니다. ‘너희들이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는 까닭을 그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냐? 내 운동화는 10만 원 짜리다. 나는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냐? 그러나 애들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거라.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란다. 오죽 자랑할 것이 없으면 신발을 자랑하겠니? 사람이 10만 원 짜리가 안 되니까 10만 원짜리 신발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신발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희의 사람 됨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거라.’
사람들은 잘 사는 것을 소유 가치가 높은 것을 의미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것은 존재 가치가 높은 것입니다. 소유 가치가 높은 사람은 부자이고 존재 가치가 높은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잘 사는 사람입니다. 정말 행복하고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소유 가치를 높이려 하기 보다 존재 가치를 높이려고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 뜻밖에 많지를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소유 가치가 높아질까요 존재 가치가 높아질까요? 예 존재 가치가 높아 집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 중에도 부자는 많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다 부자 된다는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잘 사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지 않고 존재 가치가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존재 가치는 존재 목적에서만 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목적대로 존재할 때 가치가 발생 됩니다.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것을 우리는 고장 났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즉시 가치가 없어지게 되고 맙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 가치보다 존재 가치가 높은 삶을 살려면 언제나 자신의 존재 목적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려고 애를 쓸 때 비로소 그는 존재 가치가 높은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 목적은 매우 중요한 원칙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로부터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케 한 분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은 예외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목적이 존재 자체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모든 피조물은 존재의 목적이 존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세웁니다. 그리고 그것을 욕심으로 이루려고 평생을 애쓰고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진정한 자신의 목적을 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혹 세상적으로 부자가 되기도 하고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유 가치가 높은 사람은 되기도 하나 존재 가치가 높은 잘 사는 사람이 전혀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들도 불행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내 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나를 향하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소유 가치보다 존재 가치를 우선하여 살면 소유 가치도 높아집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 중에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여 주시리라.’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1991년 동안교회 담임 목사로 왔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예배당을 건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50 억 원 정도 규모의 예배당을 지을 계획이었는데 그것을 위하여 6억 원 정도를 모아 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설교하면서 50 억 정도의 예배당을 건축하려면 그 50억 원의 십일조인 5억 정도를 떼어 개척교회 하나를 지어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래야 부끄럽지 않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담임 목사가 부임하여 하는 첫 설교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온 교인들이 그 설교를 아멘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기뻤고 그렇게 쉽지 않은 설교를 교인들이 아멘으로 받아 주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 설교를 다음날 새벽 기도회 때 마태복음 6장을 읽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마태복음 6장 33절을 가지고 제게 도전하셨습니다. ‘예배당을 지을 때 자기 예배당만 짓지 않고 십일조를 떼어 개척교회를 함께 짓겠다는 것 너무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단다. 그것은 너희 예배당을 짓기 전에 먼저 개척교회부터 짓는 것이란다. 네가 이 말에 순종하여 너희 예배당 보다 개척교회를 먼저 지으면 너희 예배당은 내가 지어주마.’
저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은 그날 새벽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에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본문 말씀으로 ‘먼저 할 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우리 예배당을 짓기 전에 개척교회부터 먼저 지어 보자는 설교였습니다. 예배당은 600석 정도였는데 당시 주일 출석은 장년이 1,300명 정도였으니 좀 비좁아 불편했지만 교인들은 그 설교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당회도 저의 그와 같은 생각에 동의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새로 개발되고 있던 일산에 종교부지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사택과 자동차를 준비하고 일 년 생활비와 자녀 교육비를 약속하여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당시 일산에 무슨 사고가 하나 있어서 교회 건축 허가를 좀 늦게 내 주는 바람에 1994년 2월 20일 주일에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교회가 일산 동안교회입니다. 교회는 건강하게 잘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척 1년 만에 출석교인이 500명을 넘었습니다. 지금은 출석교인이 2,000명 가량 되는 아주 좋은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일산 동안 새롭게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일산 동안 교회는 자기 예배당을 짓기 전에 먼저 20억 원을 헌금하여 김해에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동안 교회도 자기 예배당을 짓기 전에 먼저 우리 교회를 개척해 주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100명 정도 출석하는 좋은 교회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산 동안교회를 먼저 개척한 후 동안교회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50억 원 정도의 예배당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하나님은 100억 예배당을 짓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일산동안교회를 먼저 건축하고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서 동안교회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재정이 거의 4배로 늘어났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당 건축이 쉬어졌습니다. 예배당 건축은 2배 커졌는데 교회는 거의 4배 가까이 성장을 했으니 두배 큰 예배당을 두 배 쉽게 지었다는 계산을 아마 여러분들도 하실 수 있으실꺼라고 믿습니다.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교회가 교회 스스로의 문제만 생각하지 않고 교회가 존재해야만 하는 목적에 먼저 충실하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교회에 복을 주신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변호사를 하는 어느 젊은 집사님 한 분이 제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한국 은행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한국 은행은 한국 은행 자체를 위하여 영업을 하는 은행이 아닙니다. 한국과 한국에 있는 은행들을 위한 은행입니다. 목사님이 세상에 많고 많은 것이 교회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 하나 더 생겼다고 하나님께 도움 될 일 별로 없습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를 하지 마시고 교회가 있어야 할 목적을 위한 교회를 하시지요?!!!!!!.’
제가 평생 잊지 못할 이야기였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그것을 마음에 명심하고 목회하려고 애썼습니다. 출석교인이 3,000명 정도 되었을 때 우리 예배당을 마련할 만한 힘이 있었지만 그것을 뒤로 미루고 200억 원을 헌금하여 탈북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재단을 세우고, 탈북자와 노숙자 그리고 장애우들을 고용하는 공장을 먼저 세웠습니다.
예배당으로 쓰고 있던 학교에서 강당을 비워 달라는 공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말씀은 누가복음 9장 62절이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위기가 생겼다고 한국 은행과 같은 교회가 되는 일을 뒤로 미루고 자기 교회부터 돌아보는 교회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탈북자와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쓰기로 한 200억 원의 헌금을 예배당을 마련하고 준비하는데 먼저 당겨쓰면 안 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었지만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단 돈 10원도 그 돈을 전용하여 우리 예배당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길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결국 높은 뜻 숭의교회를 네 교회로 분립하여 사방으로 흩어 버리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교회의 목적 사업을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한지 2년이 되어 오는데 교회는 너무, 너무 좋아지고 건강해졌습니다. 게다가 부흥까지 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 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이 동안교회에와 똑같이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도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분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변화산에서 너무 신기한 광경을 목도하고 흥분한 베드로가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아예 거기서 살자는 건의를 예수님께 드립니다. 세상 궁궐에서 사는 것 보다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에 귀 기우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산 아래에는 귀신들려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고쳐 주시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해 보면 세상에 교회 생활처럼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재미가 들려 교회에 집중하게 됩니다.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잊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소명입니다. 사명입니다. 변화산에 초막 짓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교회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시험 들기 시작합니다.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날 우리 한국 교회는 바로 이 병에 걸렸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에 관심을 갖지 않고 교회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본시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자기 예배당을 짓기 이전에 먼저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던 교회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나라가 망해가고 있던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가 세운 학교의 수가 거의 800개에 달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줄 알았던 교회였습니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에 충실한 교회였습니다.
임택진 목사님 회갑 때 여전도회에서 금반지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일 날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그 반지를 들고 오셨습니다. 귀한 선물을 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나 이 반지를 낄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 매달 쌀 한 말이라고 도와 주어야만 사는 교인이 50 가정이나 되는데 그런 교인들을 심방하는 목사가 손에 가락지를 끼고서 어떻게 심방을 할 수 있겠냐시며 우셨습니다.
그 때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아 저도 평생 반지 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목회를 해야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마음이 산 아래 귀신들린 아이를 먼저 생각하고 변화산을 내려오신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청량리 중앙교회가 변화산에 초막 짓는 교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사랑하는 우리 청량리 중앙교회가 변화산에 초막 짓고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그냥 교회 생활을 즐기는 무력한 교회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활력을 잃은 무력한 교회는 병들기 쉽습니다. 넘어지기 쉽습니다. 무너지기 쉽습니다. 시험 들기 쉽습니다.
저는 당뇨병 환자입니다. 당뇨병 때문에 약도 먹지만 약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나름 열심히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운동입니다. 체력이 약해지면 약을 먹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환자인 저에게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은 운동을 열심히 하라는 말입니다.
깊이 알려고 하지 않지만 청량리 중앙교회에 좀 어려운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병이 들었으니 약을 먹어야 할 것입다. 그러나 약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운동을 해야만 합니다. 문제를 해결했다고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만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려운 일만 생각하며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말고 교회의 체력과 건강을 다시 한 번 체크하고 교회의 존재 목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 모든 것을 더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힘을 얻어 그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나가는 교회가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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