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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분심과 처방

수도관상피정 박노열............... 조회 수 2171 추천 수 0 2012.03.29 23: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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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koabbey.com/index.php?document_srl=56432 

출처 : 십자가의 요한의 입문 PP. 187-208 

 

분심과 처방

 

기도를 잘하기 위해 분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느끼는 것이다. "분심 없이 기도하는 것은 위대하다. 그러나 분심 없이 시편을 낭송하는 것은 더 위대하다." 그런데 기도의 초보자들이라면 거의 모든 이들이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과거의 많은 영상들이 떠오르는 것은 물론 용서했다고 생각하면서 평소에 떠올리기 싫었던 혼란스러운 생각과 미움까지 떠오르는 것을 많이, 그리고 자주 체험하고 있다. 기도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분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그리스도, 아니 그분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묵상기도의 관건이다.

 

분심이 생긴다는 것은 창조계 안에 있는 개개의 피조물들뿐 아니라 그것들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가져다주는 정보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갈등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화해와 친교(소통)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격수가 과벽에다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hamartia)과 같으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무엇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심에 끌려간다는 것은 기도자의 정신을 혼란케 하거나 기도가 시간을 때우는 소원풀이로 그치게 만들며, 마치 기도를 하면서도 두 주인을 섬기게 되거나(마 6:24) 심하면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리는 것(왕상 18:21)과 같은 것이다. 분심의 끝은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라는 자문(自問)으로 그칠 것이다. 그런 분심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신을 미워하면서 쉽게 기도하기를 포기한다. 그런데도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은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과 일치라는 사실과는 무관하고 단지 의무감에서 중얼거리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열심하다고 하는 많은 이들이 분심을 직접 공략하려고 덤비거나 분심 자체에 짜증을 낼뿐이다. 자신의 부정적 성향들과 맞서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더 그것들에 고착될 뿐이다. 이미 잘 알다시피 마음이란 것은 외적인 감각을 통하여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동시에 이미 받아들인 정보를 활용하여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가! 마음은 끊임없이 무엇을 찾으며, 더 이상가질 것이 없는지 아니면 미워하거나 거부할 것이 없는지를 찾아 헤맨다. 그것도 항상 자기에게 유익하고 받아들이던 방식을 통해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이 한곳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러고 악습인줄도 모르고 없애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묘안과 계책을 동반한 영적 전략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분심을 공략하려고 덤비는 것은 오히려 분심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며, 분심을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분심을 공략하겠다고 하면서 분심과 씨름하는 가운데 어느 사이에 지성을 거쳐 자신의 기억의 깊숙한 방에 감춰두었던 밝은 사진첩을 꺼내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의지까지도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을 잊어버러고, 기도한다는 것까지도 잊게 된다.

 

시대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요한은 분심을 가져다주는 존재로서 악마를 지칭하는 중세기의 전통적 표현도 놓치지 않고 있다("영", 20,9; "사 3:64). 전통적으로 영성가들은 분심에 끌려가는 것을 마치 악마의 장난으로 이해한다. 즉 악마의 충동을 분심의 원인으로 꼽는다는 것이다. "악마는 자신이 장님이면서 영혼 역시 장님이 되기를 원한다"(사 3:63; "어", 1,23). "악마는 형상들과 지식들과 사색들을 첨가시킬 수 있고, 이것들을 통하여 영혼에게 교만, 인색, 분노, 질투 등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터무니없는 미움과 거짓 사랑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악마는 사물들에 대한 영상을 남겨놓고 환상 안에 자리 잡게 하면서 거짓된 것임에도 진실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반대로 진실한 것을 거짓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 그러나 만일 기억이 이런 모든 것들을 어둡게 하고, 모두 망각 속에 지워버리며, 악마의 해로움에게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다면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데 이야말로 대단히 좋은 일이다. 악마는 기억의 능력들에 의한 작용, 특별히 지식들의 작용을 통하지 않는다면 영혼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가", III,4.1).

 

해적처럼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유혹자"(마 4:3)는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힘을 들여 집중하게 만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면서 영지주의적 착각에 빠지게 하는 동시에 기도의 외적인 현상에 매달리게 한다. 또한 "악마(지나친 탐욕)는 기억과 환상 안에 진실하고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거짓 지식들과 형상들을 제시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영(정신)과 감각 안에 암시를 통하여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각인시키기 때문에 영혼이 그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가" , 1,10,1).

 

기도에서 분심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기도의 방식이나 목적과 거리가 먼 생각과 상상, 혹은 기억에 휘둘리는 나머지 잠심(거둠)의 상태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상상력에 의한 분심은 날쌘 새들이라 부르는데, 상상력은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데 있어서 가볍고 민첩하기 때문이다"("영", 20-21,5).

 

한 주제에 마음을 온통 쏟아 사색하고 음미하려고 하면 즉시 주제와 상관이 없거나 예상치 못한 생각이나 상상, 혹은 기억이 별안간 떠올라 기도의 주제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런데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거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나머지 분별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 분심은 대부분 어떤 인간이나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때로는 묵상의 주제로부터 파생되기도 한다. 이런 파행은 결국 과거로의 재빠른 돌아감이거나 또는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결과에 대하여 선수를 치거나 환상에 빠지게 만든다. 추억이나 기억에 젖어 과거로 돌아감은 참회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미련을 두게 하는 나머지 후회와 더불어 분명히 잘못된 것임에도 그것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꿈꾸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도에서 대단한 분심을 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만일 “열심한 사람이 기억에다가 추리와 지식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반드시 많은 거짓에 빠지게 될 것인데 쉽게 진실한 것이 거짓으로 여겨지고, 확실한 것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그 반대로도 이루어질 것이다"("가", III,3,2). 또한 십자가의 요한은 추억이나 기억에 젖어든다면 기억 속에 있는 육체적인 오관의 대상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들을 끌어들이고, 형상들을 만드는 나머지 자신의 자연적인 한계와 맞닿은 곳까지 끌고 갈 것이며, 자신을 벗어나 일어서게 할 것이므로 기억 속에는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각인된 지식이나 일체의 형상도 남기지 말라고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기억으로 이해될 수 있는 형상이나 영상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관한 것들이 아닌 모든 형상들을 온전히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고 한다("가", III,2,3-4).

 

때로는 기도의 내용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기도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거나 자신의 체험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분심에 빠져든다. 자연적인 지각은 물론 자신을 스쳐갔으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초자연적인 것들(환시, 환청, 영적인 느낌에 의한 영상과 형상, 초상과 지식)을 자랑하거나("가", III,7,1-2) 자기만족에 빠져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가운데 환상에 젖기도 한다. 또한 각인되는 지식들과 형상들에 매달린다면 자주 속게 되고, 자부심과 허영에 빠질 경우가 많아지고, 열심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 손을 많이 뻗치게 되며, 하나님은 물론 다른 이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머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어려워진다("가", III,8,2).

 

결국 분심이란 이루어질 수 있는 결과에 대하여 선수를 치게 함으로써 현실도피를 유도하거나 착각에 빠지게 만들기 쉽다. 이렇게 분심은 모두 기도하는 이에게 영성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격정에 빠지게 하거나 감관의 능력을 일깨우며, 분별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때로는 두려움을 낳게 만드는 나머지 기도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기도의 목적을 잊어버리게 한다. 분심에 놀아나게 될 때에는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나머지 자기 합리화를 하게 하는 교만과 환상에 젖어들면서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는 영지주의적 행동에 빠지게 된다. 더 나아가서 분심은 기도의 정상적인 성숙과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곧 기도인양 착각하게 만든다.

 

분심의 자연적인 원인으로는 육체적 건강을 꼽을 수 있다, 육체적인 건강의 악화는 정신(영)을 흐러게 하거나 집중을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기도하려는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한다. 때로는 건강을 핑계로 기도에서 면제된다는 자기 암시에 빠지기도 한다. 심리적인 원인으로는 지나치게 왜곡된 상상과 자기중심적 성격(자기애성 성격장애) 때문에 생기는 불안정으로서 기도하기를 어렵게 만든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는 신념이나 이미지, 즉 자기개념"이 "때로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좀 더 심층적인 무의식 속에 있는 자기 모습에 대한 신념과 이미지는 오히려 부정적이고 불안정하다.

 

즉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는 의식적으로 '나는 우수하고 대단한 존재이며 당연히 타인의 칭찬과 찬사를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마음 깊은 곳에는 이와는 달리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열등의식이 내재되어 있으며, 매우 상처받기 쉽고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안에 성숙한 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갖고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그 장애물을 '유년기의 상처' 혹은 '심리적 갈등', '마음속의 아이'라고 한다. 내적 치유를 하는 사람들은 '쓴뿌리'라고도 한다. 이 무의식의 장애물을 그대로 놔둔 채 겉으로만 칭찬이나 웃음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으로 상대의 환심을 사려는 얄팍한 기술일 뿐, 진솔하고 오래 가는 인간관계를 맺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기 안의 장애물을 이해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때 자라면서 받은 상처로 인해 무의식 속에 있는 "마음속의 아이"가 성숙되지 못하면 어른이 되면서 열등감이 깊어지고, 성난 아이가 자라게 된다. "마음속의 아이는 유년기에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생겨나 무의식에서 살아왔던 아이다. 그래도 허상은 허상이다. 실상은 현재의 어른인 자기가 실상이다. 실상인 어른이 허상인 마음속의 아이의 감정에 지배당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통찰이다.

 

또한 분노로 말미암아 기도의 목적에 집중하지 못한다. 기도의 목적이란 사랑이신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이웃과의 관계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겸손 때문이 아니라 열등감 때문에 자신이 작아져 있고, 몹시 초라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분노가 치미는 나머지 기도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된다. 분노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남과 비교해 못났다고 말할 때, 그러고 열등감을 자극했을 때 생긴다. 결국 나는 작아지고, 반면에 상대는 거인이 되어 있을 때 화가 치민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라면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 즉 벌하시는 공포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앞설 때에도 공포심 때문에 기도의 목적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열등감은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요구와 현실 사이에서 내적으로 분열된 자신을 느끼기" 때문에 생기며, "이상적 자기(ideal self)와 현실적 자기(real self)의 차이를 느낄 때 생긴다." 이런 열등감과 함께 마음속(무의식)에 성난 아이가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분노가 많이 일어난다.

 

이 분노는 자신이 작아져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리고 자신이 초라해졌다는 것을 느낄 때 별안간 발동한다. 남이 어떻게 했느냐에 상관없이 자기 안에서 "상대방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스스로 남과 비교해서 못났다고 느끼기 때문에", 결국 "자기가 지니고 있는 열등감을 자극했다고 느낄 때" 분노가 치민다. 이런 분노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발산된다.

 

하나는, 안으로 폭발하면서 우울증에 빠지거나 심하면 자학과 자살로 몰고 간다. 다른 하나는, 밖으로 터트리면서 이웃들에게 화를 내고,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분노를 터트리는 대상이 만만하면 할수록 분노의 강도가 심하다. 그런데 사실 내적인 분노가 큰 사람은 대단한 열등감이 무의식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실제로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데도 자신이 대단히 잘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이 중요한 직무를 맡아야 되고, 자신이 늘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된다고 믿고 있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보다 윗사람에게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깍듯한데 아랫사람에게는 황제처럼 대우받기를 원한다. 이상적 자기만 바라보고 현실적 자기를 잊어버린 일종의 공상가이며, 완벽주의자이다. 열등감 때문에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분노가 클수록 다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크며, 동시에 사람들이 자기를 중상모략하고 있다는 생각과 자기 자리를 빼앗아 갈 것 같은 생각에 시달리기도 한다. 심각한 문제는, 많은 이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듯이, 열등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극복하려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열등감이 심할수록 기도에서 분심에 빠지기 쉬운 것은 물론 남을 지능적으로 괴롭힌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남을 괴롭히는 것을 모르고, 남이 자기에게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방어를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하다는 신앙인이 그렇다면 얼마나 유치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인가?

 

이럴 수가 있는가? 그렇다. 이럴 수가 있다. 출렁거리는 베데스다 연못 앞에 와 있으면서도 일생 동안(삼십팔 년은 한 세대를 말한다 : 신 2:14) 스스로 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사람(요 5:1-18)은 철저하게 남이 해주기만을 바랐던 사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웃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사람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요 5:7). 사실 이 사람은 육체적인 병인 중풍 병이라기보다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 즉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겪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지 자신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로지 남들로부터 사랑받고, 칭찬받고, 대우받고, 인정받고, 인기를 얻으려고 발버둥 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사랑에 굶주렸고 열등감에 찌들은 나머지 오로지 다른 사람의 도움과 인정과 지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로지 대우만 받으려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 부모, 혹은 누구에게 소외되었거나 끊임없이 비교되면서 차별을 겪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사랑에 대한 굶주림 때문에 생긴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있던 것이다. 이렇게 손상된 마음속의 아이가 성숙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무도 그에게 사랑도, 칭찬도, 대우도, 인정도 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과거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하지 않은 것 같다. 애정과 인정을 받기 위해 스스로는 무척 노력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인정받으려고, 사랑받으려고, 대우받으려고 겉으로만 완벽하게 행동을 한 것이지 실제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 사람을 상대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기도하려면, 즉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면 분노가 앞설 것이다. 분노에서 벗어나려면, 이상을 낮추고 현실을 높일 수 있을 때 열등감을 극복하면서 분노를 추스를 수 있을 것이며, 그래야 분심이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을 낮춘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상대를 용서하라는 것이고, 현실을 높이라는 것은 자신은 물른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결국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하여 깨달은 열등감의 원인들, 즉 "자기 마음속에 남아 있는 유년기의 상처"를 준 인물들과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상처를 주는 이와 화해하고, 용서해주어야 한다. 화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이였을 때 제대로 채워지지 못한 욕구들로 인해 만들어진 상처(마음속의 아이)를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슬퍼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싫고, 또 이 사실이 더욱더 분노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초라함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눈물을 흘리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죄를 잊어버리거나 눈감아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용서를 하기 위해 꼭 가해자와 직접 만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하는 이는 정작 상처를 준 줄 모를 수도 있다.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이도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속의 아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상처를 주었는지 조차도 모를 수 있다. 아니 알고 있다면 와서 용서를 청할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의식적인 결단을 통해 증오의 행위를 멈추는 일을 말한다. 증오는 우리의 마음에 암처럼 퍼져서 몸과 마음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펴주신 예수님의 치유(막 3:1-6)가 무엇일까? 분노가 치밀면 주먹이 쥐어진다.

 

주먹이 쥐어지면 심장이 오그라든다. 분노가 풀릴 때 주먹이 펴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고백 심리적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심리학적으로 입증해준다. 우리는 고백의 심리적 차원을 간과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고백를 위한 양심성찰(자아인식)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친교의 은총이란 "당신이 원하실 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서, 시간과 장소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으시면서, 그것을 청하는 사람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베풀어 주신다"("가", III,2,3). 이런 친교의 은총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시는지 알아서 자신이 그렇게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무조건 청하기만 하기 때문에 분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기도란 자아인식의 과정("어", I,12,2-9)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분심의 윤리적인 원인으로는 율법주의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에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있는데, 여기에서 기도의 필요성을 잊어버리게 한다. 소죄에 대한 지나친 너그러움으로 일상적인 의무에 대한 소홀함을 가져오게 하며,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본능에 충실하려는 욕망과 격정을 다스리려는 의지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죄의식을 상실하게 되는 나머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저버러게 된다.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롬 7:25)고 했던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한쪽에서는 어둡고 악한 면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 안에 있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볼 수 있을 때 분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무조건 억압하거나 길게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를 전혀 알아채지 못할 때 내적 분열에 시달리면서 환상을 쫓아가게 된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추구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이란 바로 그분의 가르침을 잣대로 삼아 자신의 분열된 참된 본성을 찾아내고, 그 분열로 인해 생긴 많은 상처들을 "영혼의 건강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영", 11,11)에 맡겨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심에서 벗어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잘못된 영적지도 때문에 빛어지는 문제도 있으며, 교만함 때문에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망각하게 되는 나머지 은총의 필요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더 나아가서 기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는 나머지 기도의 장소와 분위기, 그리고 성상(聖像)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역시 분심을 끌어들이게 한다("가", III,36-39장). 끝으로 기도의 방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좋은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심의 원인을 꼽을 수도 있다. 억지를 부린다면, 하나님께서 분심의 원인이 된다는 표현도 가능하지만, 묵상을 하면서 성경에 나오지만 직접적인 의미에서는 기도에는 불필요한 단어에 집착하기 때문에, 보편적 구원의지를 지니신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이해(공포의 하나님, 처벌의 하나님) 때문에, 그러고 신앙적 이해를 요구하는 문제에 대한 분별이 없기 때문에 분심을 끌어들이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은 "분심이란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이라고 하는 낮은 부분에서는 물론 이성적 부분이라고 하는 윗부분(정신)에서 생기는 것"("영", 16,10)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분심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감관의 작용을 끌어들이려고 하지 말아야 하며, 주님께로 향하는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아무런 욕구도 갖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사", 3,65). 욕구들이란 성령께 반발하게 하고, 영혼을 피곤하게 하고, 괴롭히고, 어둡게 하고, 더럽히고, 연약하게 한다("가", I,6,4-5).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욕구는 장작을 넣으면 즉시 커지고, 장작을 태워버리고 난 뒤에는 바로 꺼져버리는 불과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욕구는 이런 상황보다 훨씬 더 나쁘다. 불은 장작이 떨어지면서 줄어들지만 욕구는 일단 발동이 걸리기만 한다면 재료가 다 떨어졌다 할지라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줄어드는 대신에 장작이 떨어졌을 때 불이 줄어드는 것처럼 영혼을 피로함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가', I,6,6-7).

 

 다음으로 "내적이건 외적이건 모든 감각과 육체적 감관의 능력 안에 들어오는 모든 상상적이며 환상적인 것들, 보고 듣는 것들에 있어서 영혼에게 분심, 형상, 영상, 초상, 그리고 어떤 표상도"("영", 16,10)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는 헛된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에는 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비하여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기도의 주제, 묵상기도의 핵심인 말씀으로 돌아가거나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고, 산책을 하라고 영성가들은 권고한다. 물론 이것이 습관적으로 될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묵상기도에 충실해야 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묵상기도는 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이므로 "과감한 결단"을 가지고 영성생활과 일상생활에서 오는 위로와 맛과 기음을 동시에 추구하지 말라고 한다. 많은 영성가들이 분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나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잠심완색(潛心玩索)의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일들(기도)에 대하여 감각이나 상상력을 집중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 미온적 태도나 분심에서 오는 것일 때에는 영혼이 상상력을 즉시 다른 이상한 것들에 두려는 욕구와 의욕이 생기고 그곳으로 끌리는 동기가 생기기 때문이다"("가", II,13,6). 결국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분심이란 영혼이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기쁨을 거두지 못했거나 감각을 지나치게 움직였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잠심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가", III,26,2).

 

십자가의 요한은 분심의 결정적인 첫 번째 원인을 허영과 자만, 교만과 이웃을 업신여김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감각을 쾌락과 관능적 만족, 그리고 음란함으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욕구들이 영혼의 덕을 약하게 하는데 이것은 마치 나무에 새로운 가지들이 많이 돋아나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영혼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욕구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영혼에게 덕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가", I,10,2).

 

세 번째는 아첨과 공치사이며, 네 번째는 재물들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피조물들에 대한 집착과 욕구라고 한다("가", III,22,1-6) 집착과 "욕구는 그 자체로 장님이기 때문에 영혼을 어둡게 하고, 그의 눈을 밀게 한다. 욕구는 아무런 지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욕구라는 장님을 인도하는 어린애는 이성이다. 영혼이 욕구에 끌려갈 때마다 장님이 되는 것이다"("가", I,8,3).

 

물론 기도의 장소와 실내장식에서 올 수 있는 분심도 소홀하게 여기지 말라고 권고한다("가" , III,42,1-2). 기도에 있어서 앞으로 나아간 이들에게서도 분심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죄로부터 오는 습관적 결함들, 즉 마음이 무뎌짐과 본래의 거칠음, 그리고 영(정신)의 산만함과 집중하지 못함"을 말하면서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밤의 압박감과 고통을 통해 영(정신)을 새롭게 하고, 마음을 거두고, 밝게 하고, 맑게 할 필요가 있다."("어", II,2,2)고 한다. 끝으로 영적 지도자들 스스로가 아직도 관상기도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즉 무엇이 묵상에서 벗어나는 징표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혼들에게 분심을 가져다준다고 한다("사", 3,44.53).

 

분심을 극복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화해가 잘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감관의 능력을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관상기도에 가까이 이르려면, 즉 묵상기도에서 더 이상 상상이나 추리가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감관의 능력들이 더 이상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하도록 침묵하게 하고 조용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기억과 더불어 감관의 능력들을 계속해서 작용하게 한다면 애착과 욕구가 또 다시 생길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무슨 생각이나 추리를 하지 않는다면 마치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하고 분심과 게으름에 빠질 것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분심에 빠져들 것이다. 오히려 현세나 내세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기억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분심이 들지도 않을 것이며, 침묵 가운데 영(정신)의 귀를 오로지 하나님께만 열어놓는다면 악습들이 파고들지도 않을 것이다("가", III,3,4-5).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특별히 "가르멜의 산길"에서 분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두운 밤을 거치는 가운데 감관의 능력들을 잠재우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바로 감각을 닫는 수련인데, 하나님의 사랑에 몰입하기 위해 오관의 능력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시키고,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에 집중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도록 자기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자기를 내어드린다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 얻어진 지각들에 의해 지성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며, 신앙의 밤으로 지성을 끌고 가려는 것"("가", II,23,1)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억으로 이해될 수 있는 형상이나 영상을 가지고 계시지 않기"("가", III,2,4) 때문에 감관의 능력들을 정화시키고, 그것들에 의지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분심은 사라지고 신비체험이 시작될 것이다("가", II,14.12; 15,2). "초자연적이고 수동적으로 건네지는 이런 것들 안에서 영혼이 자연적 지성이나 다른 감관의 능력들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재주를 피운다면 자기 방식과 거칠음 때문에(영적으로) 높게 오를 수가 없다"("가", I,29,7).

 

또한 "감관의 능력들의 작용이 멈출 때까지 지식과 사랑이 진정으로 일치되지 않는다"("가", II,13,4). "본성적인 감관의 능력들은 초자연적인 일들을 자기들 방식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며 거룩하게 받아들이거나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맛을 느낄만한 깨끗함도 힘도 능력도 없다"("어", II,16,4). 감각을 닫는 수덕적 노력이 없어서 만일 감관의 능력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애착과 욕구들이 깨어서 작동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심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혼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어", II,15,1).

 

결국 분심을 극복했다는 것은 지성이 하나님을 더욱더 잘 섬기려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는데 전념한다는 것이며, 의지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만 향하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에 전념한다는 것이며, 기억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과 섬기려고 노력하는 것에 전념한다는 것이다("영", 28,3). 이렇게 십자가의 요한은 분심 자체에 매달리지 않고, 분심의 원인이 되는 내면적인 문제를 탁월하게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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