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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2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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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hyjesusonly.com |
호리(毫釐)까지 갚으신 예수님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毫釐)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5,26)
예수님은 송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호리는 원어로 고드란트(kodrantes)라는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1/64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뜻은 한 마디로 빚진 것이 있다면 빨리 고소 상대방에게 용서를 빌고 모든 손해 배상을 해주어 합의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괜히 돈을 아끼려다 화해하지 않으면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 어차피 호리까지 다 갚기 전에는 나오지 못할 것이기에 금전적으로도 훨씬 손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간혹 신약의 잠언으로 간주해 신자가 현실의 삶에서 실천해야할 도덕적 계명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풀려난 천국의 자녀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사람들 앞에 서야하는가, 아니 설 수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결과적으로 착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모습에선 동일하지만, 이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착하게 살아야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신자가 누리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신자니까 이제는 불신자보다 더 신실하고 경우가 발라야 하므로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으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고 또 그 자리에 확고하게 서 있다면 기꺼이 호리라도 갚게 된다는 것입니다.
송사로 인해 돈을 갚고 합의 보는 것은 단순히 민사(民事) 소송에 해당됩니다. 민사는 사실상 세상에선 죄로도 취급되지 않습니다. 돈이 원수지 사람이 잘못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어느 누가 처음부터 돈을 떼먹을 작정을 하고 빌려가는 법은 없습니다. 돈을 빌려 열심히 사업을 했지만 경영의 미숙함이나 갑작스런 불경기 등 불가항력적인 원인으로 그 돈을 못 갚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돈을 떼먹을 의도였다면 뭔가 거짓과 술수가 동원되고 그것은 사기죄로 형사범이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큰 죄로 여기기 않는 민사상의 호리마저 완전히 깨끗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부분에선 호리의 호리까지 다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거기에 형사적인 죄인 간음, 살인, 폭행, 거짓 증거, 사기 등과 도덕적인 죄인 거짓말, 시기, 질투, 분노, 저주 등을, 그것도 호리에 속한 아주 경미한 것들까지 다 보태면 인간이 갚을 수 있겠습니까? 예컨대 무심결에 지나가는 말로 가까운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경우까지 포함시키면 과연 인간이 그 모든 죄를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종교적 영적 죄악은 어떻습니까?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외면하고 심지어 욕하고 저주한 죄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로 남아 있었다면 그리 미안하지 않을 텐데 아예 사단의 종교에 심취하여 기독교를 매도하고 저주했다면 도대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수라도 있겠습니까?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 자리에 바짝 엎드려 죽을 죄인이오니 처분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그분의 긍휼만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사, 형사, 도덕, 종교, 영적 죄 전부 통 털어 호리까지 남기지 않고 갚을 길은 인간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호리 정도 남기고 죄를 씻으려면 인간 스스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인간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수양하고 선행을 쌓으면 됩니다. 그러나 호리까지 갚으려면 하나님이 그 전부를 감당해 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감당했다면 그 죄악은 완전히 갚아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죽었는데 조금이라도 찌끼가 남아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와는 절대 공존(共存)하지 못합니다. 더럽고 추한 것이 호리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 앞에선 바로 불에 태워져 순간적으로 다 없어집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 죄만 감당하려 한다면 언제든 눈 깜짝하는 사이에 다 태워 없앨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꼭 죽어야만 우리 죄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죽었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해도 몽땅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죄와 죄인을 동일시해서 취급하면 죄인을 구원할 길이 영영 없습니다. 죄는 완전히 없애고 죄인 된 인간은 건져내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죄 값을 대신 치루고 죄인은 살리신 은혜였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은 신자로선 더더욱 죄가 호리라도 남아 있어선 안 됩니다. 신자더러 살아생전에 100% 완벽하게 거룩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속에 죄가 호리라도 남았거나 생기면 그 분과의 교제와 동행에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신자에게 부어주려고 예비하신 은혜와 권능이 전해지는데 방해될까 그렇습니다.
죄에 대해 신자들 가운데는 두 극단이 있습니다. 자꾸만 호리마저 갚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조차 없는 것처럼 믿고 어떻게 하든 스스로 죄 값을 갚으려고 애를 씁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에다 자기가 다시 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다 갚았으니까 호리 정도의 죄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신자를 향해 부어주시는 복의 통로를 자기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 값을 감당하셨기에 우리에게 죄책이 될 것은 더 이상 호리마저 남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당신께서 먼저 그 죄 값을 감당하셨기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았던 장벽마저 완전히 제거 되었습니다. 이제 신자에게 남은 일은 보좌 앞으로 언제 어느 때든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신경 써야 할 단 한 가지 일은 가볍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무겁고도 눌린 마음으로 나아가느냐 뿐입니다.
호리라도 한 두 번은 몰라도 자꾸 쌓이면 금방 두꺼운 철벽이 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든 빈틈만 생기면 우리 속에 견고한 진을 만들려 들고 그 출발은 항상 호리입니다. 사단이 처음부터 중장비를 동원해 철벽을 설치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상처와 죄악들이 쓴 뿌리가 되기 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과 급히 사화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오직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일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5/3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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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毫釐)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5,26)
예수님은 송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호리는 원어로 고드란트(kodrantes)라는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1/64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뜻은 한 마디로 빚진 것이 있다면 빨리 고소 상대방에게 용서를 빌고 모든 손해 배상을 해주어 합의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괜히 돈을 아끼려다 화해하지 않으면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 어차피 호리까지 다 갚기 전에는 나오지 못할 것이기에 금전적으로도 훨씬 손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간혹 신약의 잠언으로 간주해 신자가 현실의 삶에서 실천해야할 도덕적 계명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풀려난 천국의 자녀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사람들 앞에 서야하는가, 아니 설 수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결과적으로 착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모습에선 동일하지만, 이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착하게 살아야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신자가 누리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신자니까 이제는 불신자보다 더 신실하고 경우가 발라야 하므로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으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고 또 그 자리에 확고하게 서 있다면 기꺼이 호리라도 갚게 된다는 것입니다.
송사로 인해 돈을 갚고 합의 보는 것은 단순히 민사(民事) 소송에 해당됩니다. 민사는 사실상 세상에선 죄로도 취급되지 않습니다. 돈이 원수지 사람이 잘못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어느 누가 처음부터 돈을 떼먹을 작정을 하고 빌려가는 법은 없습니다. 돈을 빌려 열심히 사업을 했지만 경영의 미숙함이나 갑작스런 불경기 등 불가항력적인 원인으로 그 돈을 못 갚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돈을 떼먹을 의도였다면 뭔가 거짓과 술수가 동원되고 그것은 사기죄로 형사범이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큰 죄로 여기기 않는 민사상의 호리마저 완전히 깨끗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부분에선 호리의 호리까지 다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거기에 형사적인 죄인 간음, 살인, 폭행, 거짓 증거, 사기 등과 도덕적인 죄인 거짓말, 시기, 질투, 분노, 저주 등을, 그것도 호리에 속한 아주 경미한 것들까지 다 보태면 인간이 갚을 수 있겠습니까? 예컨대 무심결에 지나가는 말로 가까운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경우까지 포함시키면 과연 인간이 그 모든 죄를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종교적 영적 죄악은 어떻습니까?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외면하고 심지어 욕하고 저주한 죄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로 남아 있었다면 그리 미안하지 않을 텐데 아예 사단의 종교에 심취하여 기독교를 매도하고 저주했다면 도대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수라도 있겠습니까?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 자리에 바짝 엎드려 죽을 죄인이오니 처분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그분의 긍휼만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사, 형사, 도덕, 종교, 영적 죄 전부 통 털어 호리까지 남기지 않고 갚을 길은 인간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호리 정도 남기고 죄를 씻으려면 인간 스스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인간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수양하고 선행을 쌓으면 됩니다. 그러나 호리까지 갚으려면 하나님이 그 전부를 감당해 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감당했다면 그 죄악은 완전히 갚아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죽었는데 조금이라도 찌끼가 남아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와는 절대 공존(共存)하지 못합니다. 더럽고 추한 것이 호리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 앞에선 바로 불에 태워져 순간적으로 다 없어집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 죄만 감당하려 한다면 언제든 눈 깜짝하는 사이에 다 태워 없앨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꼭 죽어야만 우리 죄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죽었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해도 몽땅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죄와 죄인을 동일시해서 취급하면 죄인을 구원할 길이 영영 없습니다. 죄는 완전히 없애고 죄인 된 인간은 건져내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죄 값을 대신 치루고 죄인은 살리신 은혜였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은 신자로선 더더욱 죄가 호리라도 남아 있어선 안 됩니다. 신자더러 살아생전에 100% 완벽하게 거룩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속에 죄가 호리라도 남았거나 생기면 그 분과의 교제와 동행에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신자에게 부어주려고 예비하신 은혜와 권능이 전해지는데 방해될까 그렇습니다.
죄에 대해 신자들 가운데는 두 극단이 있습니다. 자꾸만 호리마저 갚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조차 없는 것처럼 믿고 어떻게 하든 스스로 죄 값을 갚으려고 애를 씁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에다 자기가 다시 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다 갚았으니까 호리 정도의 죄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신자를 향해 부어주시는 복의 통로를 자기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 값을 감당하셨기에 우리에게 죄책이 될 것은 더 이상 호리마저 남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당신께서 먼저 그 죄 값을 감당하셨기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았던 장벽마저 완전히 제거 되었습니다. 이제 신자에게 남은 일은 보좌 앞으로 언제 어느 때든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신경 써야 할 단 한 가지 일은 가볍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무겁고도 눌린 마음으로 나아가느냐 뿐입니다.
호리라도 한 두 번은 몰라도 자꾸 쌓이면 금방 두꺼운 철벽이 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든 빈틈만 생기면 우리 속에 견고한 진을 만들려 들고 그 출발은 항상 호리입니다. 사단이 처음부터 중장비를 동원해 철벽을 설치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상처와 죄악들이 쓴 뿌리가 되기 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과 급히 사화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오직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일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5/3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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