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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4: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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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hyjesusonly.com |
사람을 낚는 어부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8-20)
예수님이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는 너무나 유명한 장면입니다. 고기를 낚는 어부에 대비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즉, 자신의 생업과 그 도구를 몽땅 버리고 단번에 따라나섰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요즘 식으로 따지면 자기 배를 가진 선장 어부에게 생면부지의 사람이 나타나 아무 쓸 데 없는 일일랑 당장 그만 두고 자기에게서 신학이나 배우라고 권한 셈인데, 그 자리에서 출가하듯이 단박 따를 수 있겠습니까?
우선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항은 주님에게서 사람들이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영적 권위가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순간 미처 이유도 모르는 채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최면을 건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분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짐작이 들었거나, 최소한 내적 충만감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것은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마다, 겪는 사건마다 신적 권능으로 당신의 주권대로 이끌었다는 것은 복음서 기록이 반복해서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권유가 결정적 원인임은 틀림없습니다. 이 말씀 없이 단순히 “나를 따르라”고만 했다면 그야말로 신적 권능으로 최면을 건 셈이 되어버립니다. 그게 아니므로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럼 과연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 체감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날의 신자 또한 세상에서 예수님께 불려 나온 제자이므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으니 돈을 버는 세속적인 직업은 허무하므로 그만 두고 이제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이므로 사람들 상대로 일을 하는 다른 직업으로 바꾸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창시할 기독교라는 종교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교세를 늘리는 데에 일조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적 분위기 때문에 처음부터 메시야인 줄 눈치 채고 로마 제국을 무찌르는 일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입니까?
당시 모든 유대 아이들은 13살까지 랍비가 가르치는 학교에서 함께 교육을 받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우수한 학생만 선발해서 랍비의 후계자로 삼습니다. 선발된 후계자는 랍비와 함께 기거하면서 스승의 삶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행동, 말투, 사고방식 등 하나에서 열까지 스승과 판박이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랍비로 선택되지 못한 나머지 학생들은 일반적인 직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또 당시의 랍비는 인간관계에서 파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석, 교육, 판결, 적용시켜 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권유는 자신과 직접 기거하면서 가르침을 받으라는 의미였고, “사람을 낚는 어부”는 랍비라는 직업을 의미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와 닿는 의미가 바로 예수님이 한 사람의 랍비로서 자기들을 제자로 받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자칫 랍비가 될 수도 있었지만 공부를 못했기에 어부 일을 하고 있었다는 배경을 감안해야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어렸을 때의 꿈은 랍비가 되는 것이지만 꿈을 이루는 자는 극소수였습니다. 랍비가 유대 사회에서 갖는 공신력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존경은 일반인들이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막연한 미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제자들이 곧 바로 주님을 따른 가장 큰 이유는 주님의 거역할 수 없는 신적 권능 때문이지만, 그 이후 제자들을 비롯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호칭한 것을 보면 이런 해석에 타당성을 더해줍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랍비가 될 수 없었던 자들이 이제는 역사상 최고의 랍비와 동고동락하는 제자가 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학교의 열등생이자 인생의 낙오자였던 자들을 이제 수석 졸업생도 꿈꾸지 못할 직분을 감당하도록 바꿔주신 주님의 능력만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에게는 그런 일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랍비로서 예수님은 일반적인 랍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다른 모든 랍비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율법준수와 제사제도를 지식적으로만 전수했습니다. 율법을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려 만든 613개의 세부적 규정을 전부 외우게 하고 사람들이 규정대로 따르는지 감독하는 기술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매번 상충되었던 장로들의 유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임을 가르쳤습니다. 당신에 대해 알게 하고 믿고 따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나아가 자신의 전부를 제자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존재부터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새사람이어야만 새사람으로 변화시킬 자를 낚는 어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예수님이나 다른 랍비나 인용한 교과서는 공히 구약성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반 랍비는 하나님 말씀에서 인간의 계명을 추출해 내어 더 우위에 두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이 틀렸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전부 옳고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을 진정으로 경배하기보다는 그분을 섬기는 방식인 성전제사와 율법준수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께 정성을 바쳐서 점수를 더 잘 따내는 법만 고안했던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랍비나 제사장들의 신분과 권한만 높이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믿음 대신에 형식적 습관적 가식적, 나아가 기복적 종교만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구약성경을 인용했지만 차원이 전혀 달랐습니다. 구약성경 전부가 당신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르침과 사역의 초점은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여 죄에서 구속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가르치되 그 구원을 얻기 위해선 바로 자신을 믿고 따라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5:39-43)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낮게 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즉 장로의 유전을 위반했다고 따지자 예수님이 그들이 구약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해 주었습니다. 성경을 상고하긴 해도 막상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려 하기 때문인데 사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랍비들이 아무리 고명한 사상을 훌륭하게 가르쳐도 여호와 하나님의 죄인을 구속하는 계획은 배제한 채 인간이 지킬 계명만 강조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높이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랍비들을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고 합니다. 대신에 지금 예수님이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므로 회개하라고 선포하자 다들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선 구약성경에 아무리 능통해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겐 영광을 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스승은 제자가 당신을 닮게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 본인이 사람 낚는 랍비인 반면에 일반 랍비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랍비에게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린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돈과 칭찬과 존경을 낚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정작 하나님께는 영접 받지 못하는 랍비인 것입니다.
오늘 날의 신자도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제자들에게 주신 것과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 불려 나온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전도하든 교회로 사람을 많이 이끌고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과 같은 랍비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사상이 아닌 예수님을 알게 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 예수가 아닌 구주 예수를 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교리적으로 전하기보다는 자신에게서 바로 예수님의 닮은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신자의 모든 것을 그대로 닮고 싶어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랍비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 같이 열등하고 이름 없던 우리를 불러내어 당신과 동고동락하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의 일에 쓰임 받는 너무나 영광스런 자리까지 인도하십니다.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이 가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합니다. 또 신자가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 또한 사람에게 영광을 전혀 취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함이 너무나 마땅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시키는 일은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일이 아닙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으로 흑암의 멍에를 벗어버린 새사람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래서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사단과 싸우며 오직 주님을 따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했으며, 바울도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에게 정말 당당하게 나를 본받아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종교의 교주 행세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자를 볼 때에 정말 저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또한 남들에게 동일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작금 사람보다는 사람들의 돈과 칭찬과 존경을 낚는 교회가,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목사가 사람들을 더 많이 낚고 있는 것 같으니 어찌된 셈입니까? 예수님 당대에 비해 기독교가 그대로 정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럼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역사상 최고 랍비의 제자가 된 신자들이 제대로 그 제자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10/23/2009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8-20)
예수님이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는 너무나 유명한 장면입니다. 고기를 낚는 어부에 대비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즉, 자신의 생업과 그 도구를 몽땅 버리고 단번에 따라나섰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요즘 식으로 따지면 자기 배를 가진 선장 어부에게 생면부지의 사람이 나타나 아무 쓸 데 없는 일일랑 당장 그만 두고 자기에게서 신학이나 배우라고 권한 셈인데, 그 자리에서 출가하듯이 단박 따를 수 있겠습니까?
우선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항은 주님에게서 사람들이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영적 권위가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순간 미처 이유도 모르는 채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최면을 건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분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짐작이 들었거나, 최소한 내적 충만감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것은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마다, 겪는 사건마다 신적 권능으로 당신의 주권대로 이끌었다는 것은 복음서 기록이 반복해서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권유가 결정적 원인임은 틀림없습니다. 이 말씀 없이 단순히 “나를 따르라”고만 했다면 그야말로 신적 권능으로 최면을 건 셈이 되어버립니다. 그게 아니므로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럼 과연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 체감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날의 신자 또한 세상에서 예수님께 불려 나온 제자이므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으니 돈을 버는 세속적인 직업은 허무하므로 그만 두고 이제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이므로 사람들 상대로 일을 하는 다른 직업으로 바꾸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창시할 기독교라는 종교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교세를 늘리는 데에 일조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적 분위기 때문에 처음부터 메시야인 줄 눈치 채고 로마 제국을 무찌르는 일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입니까?
당시 모든 유대 아이들은 13살까지 랍비가 가르치는 학교에서 함께 교육을 받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우수한 학생만 선발해서 랍비의 후계자로 삼습니다. 선발된 후계자는 랍비와 함께 기거하면서 스승의 삶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행동, 말투, 사고방식 등 하나에서 열까지 스승과 판박이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랍비로 선택되지 못한 나머지 학생들은 일반적인 직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또 당시의 랍비는 인간관계에서 파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석, 교육, 판결, 적용시켜 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권유는 자신과 직접 기거하면서 가르침을 받으라는 의미였고, “사람을 낚는 어부”는 랍비라는 직업을 의미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와 닿는 의미가 바로 예수님이 한 사람의 랍비로서 자기들을 제자로 받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자칫 랍비가 될 수도 있었지만 공부를 못했기에 어부 일을 하고 있었다는 배경을 감안해야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어렸을 때의 꿈은 랍비가 되는 것이지만 꿈을 이루는 자는 극소수였습니다. 랍비가 유대 사회에서 갖는 공신력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존경은 일반인들이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막연한 미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제자들이 곧 바로 주님을 따른 가장 큰 이유는 주님의 거역할 수 없는 신적 권능 때문이지만, 그 이후 제자들을 비롯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호칭한 것을 보면 이런 해석에 타당성을 더해줍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랍비가 될 수 없었던 자들이 이제는 역사상 최고의 랍비와 동고동락하는 제자가 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학교의 열등생이자 인생의 낙오자였던 자들을 이제 수석 졸업생도 꿈꾸지 못할 직분을 감당하도록 바꿔주신 주님의 능력만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에게는 그런 일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랍비로서 예수님은 일반적인 랍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다른 모든 랍비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율법준수와 제사제도를 지식적으로만 전수했습니다. 율법을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려 만든 613개의 세부적 규정을 전부 외우게 하고 사람들이 규정대로 따르는지 감독하는 기술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매번 상충되었던 장로들의 유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임을 가르쳤습니다. 당신에 대해 알게 하고 믿고 따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나아가 자신의 전부를 제자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존재부터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새사람이어야만 새사람으로 변화시킬 자를 낚는 어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예수님이나 다른 랍비나 인용한 교과서는 공히 구약성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반 랍비는 하나님 말씀에서 인간의 계명을 추출해 내어 더 우위에 두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이 틀렸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전부 옳고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을 진정으로 경배하기보다는 그분을 섬기는 방식인 성전제사와 율법준수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께 정성을 바쳐서 점수를 더 잘 따내는 법만 고안했던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랍비나 제사장들의 신분과 권한만 높이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믿음 대신에 형식적 습관적 가식적, 나아가 기복적 종교만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구약성경을 인용했지만 차원이 전혀 달랐습니다. 구약성경 전부가 당신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르침과 사역의 초점은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여 죄에서 구속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가르치되 그 구원을 얻기 위해선 바로 자신을 믿고 따라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5:39-43)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낮게 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즉 장로의 유전을 위반했다고 따지자 예수님이 그들이 구약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해 주었습니다. 성경을 상고하긴 해도 막상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려 하기 때문인데 사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랍비들이 아무리 고명한 사상을 훌륭하게 가르쳐도 여호와 하나님의 죄인을 구속하는 계획은 배제한 채 인간이 지킬 계명만 강조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높이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랍비들을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고 합니다. 대신에 지금 예수님이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므로 회개하라고 선포하자 다들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선 구약성경에 아무리 능통해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겐 영광을 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스승은 제자가 당신을 닮게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 본인이 사람 낚는 랍비인 반면에 일반 랍비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랍비에게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린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돈과 칭찬과 존경을 낚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정작 하나님께는 영접 받지 못하는 랍비인 것입니다.
오늘 날의 신자도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제자들에게 주신 것과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 불려 나온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전도하든 교회로 사람을 많이 이끌고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과 같은 랍비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사상이 아닌 예수님을 알게 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 예수가 아닌 구주 예수를 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교리적으로 전하기보다는 자신에게서 바로 예수님의 닮은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신자의 모든 것을 그대로 닮고 싶어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랍비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 같이 열등하고 이름 없던 우리를 불러내어 당신과 동고동락하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의 일에 쓰임 받는 너무나 영광스런 자리까지 인도하십니다.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이 가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합니다. 또 신자가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 또한 사람에게 영광을 전혀 취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함이 너무나 마땅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시키는 일은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일이 아닙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으로 흑암의 멍에를 벗어버린 새사람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래서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사단과 싸우며 오직 주님을 따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했으며, 바울도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에게 정말 당당하게 나를 본받아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종교의 교주 행세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자를 볼 때에 정말 저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또한 남들에게 동일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작금 사람보다는 사람들의 돈과 칭찬과 존경을 낚는 교회가,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목사가 사람들을 더 많이 낚고 있는 것 같으니 어찌된 셈입니까? 예수님 당대에 비해 기독교가 그대로 정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럼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역사상 최고 랍비의 제자가 된 신자들이 제대로 그 제자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10/2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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