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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선물이다

에배소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904 추천 수 0 2012.04.06 1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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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2:1-1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81328 

jys.jpg 정용섭 목사

 

구원은 선물이다

에베소서 2:1-10, 사순절 넷째 주일, 2012년 3월18일


오늘 여러분은 왜 예배에 참석했습니까? 그 대답은 여기 모인 분의 숫자만큼 다를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나온 분도 있고, 친구나 가족 따라 오신 분도 있고, 심심해서, 또는 교회에서 맡은 일 때문에 나온 분도 있을 겁니다. 가장 모범적인 대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왔다는 것이겠지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토대는 바로 구원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며, 또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자 찬송입니다. 신약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 사건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질문 앞에서는 망설여질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건가요, 죽어서 천당 가는 건가요, 지금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건가요, 여러 가지 복을 받는 건가요, 무병장수 하는 건가요?

    

사실 구원은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종교도 구원을 지향합니다. 구원은 종교적인 주제만도 아닙니다. 인간행위는 기본적으로 구원론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구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의학은 인간을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구원해내려는 노력입니다. 소설과 시도 인간 구원을 추구합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거기서 구원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개그콘서트도 일종의 구원사건입니다. 사람들이 거기서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정치는 훨씬 자극적인 구원 행위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당시 독일 사람들에게 일종의 구원사건으로, 즉 메시아니즘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21세기의 메시아는 돈과 자본이겠지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 및 인간의 모든 구원 지향적 노력과 선의의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 구원관이 설득력을 잃으면 언젠가는 역사에서 사라질 겁니다. 또는 지금의 무당종교처럼 주술적인 일부 사람들만 찾는 종교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설득력을 확보하려면 먼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구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구원론의 차별성

    

신약성서는 그것에 대해서 일관된 입장을 피력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 기자도 똑같이 말합니다. 8,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여러분이 익숙하게 들었던 내용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압축한 것처럼 보입니다. 에베소 기자는 바울의 제자이거나 바울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또한 ‘행위에서 난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구원과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노력한 것만큼 대가를 주는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고등학생들은 수능점수로 평가됩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연봉으로 평가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만큼 보상을 받는 세상입니다. 21세기 들어서서 이런 방식의 삶은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국립대학교 선생님들이 기술교육부 장관 불신임 투표를 시작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대학교 선생님들에게 점수를 매겨서 연봉에 차등을 두려는 정책이 그 원인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점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생산성을 높이자는 철학이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FTA도 기본적으로 이런 경쟁 원리를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경제 원리이자 철학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자기 구원과 세계구원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스티브 잡스 처럼 그런 부분에서 큰 능력을 이룬 이들은 메시아처럼 추앙받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이런데 영향을 받으며, 세뇌당하며, 길들여집니다.

    

에베소서 기자를 비롯해서 신약성서 기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사람에게는 자기와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게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문장의 의미입니다. 9b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말기 간암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다행스럽게 암 이식 수술을 받았고, 완치되었습니다. 그가 암에서 구원받은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간 제공자와 의사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그 사람 밖에서 온 것입니다. 밖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즉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덕분으로 우리는 말기 암을 극복하고 건강을 찾은 사람과 똑같습니다.

    

이런 설명은 너무 초보적인 것이어서 시시하게 들리시나요? 정말 신앙이 깊기 때문이라면 다행이지만, 너무 몰라서, 또는 기독교 신앙을 상투적으로만 알아서 시시하게 들린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 알려면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구원이 선물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전체 기독교 교리의 결론입니다. 결론을 정확하게 아는지는 그 출발을 아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도대체 허물과 죄가 무엇인가요? 그것으로 죽었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허물과 죄가 있어도 시퍼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죽었다는 말은 실제로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합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걸 확인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의 관점으로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유럽 교회가 죽었다는 말을 한국교회가 자주 하는데, 이런 관점으로는 교회가 부흥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죽은 사람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입니까?

    

에베소서 기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삶을 세속에 기울어진 삶이라고 말합니다. ‘세상풍조’를 따르는 것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2절) 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세상풍조는 그 시대정신이라고 보면 됩니다. 초기 기독교가 자리를 잡을 때는 로마정신이 지배했습니다. 로마정신은 매력적입니다. 매우 지성적이고 문화적입니다. 로마는 군사적으로 주변 세계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배했습니다. 관용정신도 뛰어났습니다. 로마법과 의학과 건축 등은 요즘도 모범으로 인정받습니다. 당시에 로마정신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이고 세련되게 산다는 뜻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한민국 체제에서 출세한 삶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기자는 그런 삶을 가리켜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씀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수도사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죽음과 생명

    

잘 생각하십시오. 세상풍조를 따르는 삶이 결국 죽음이라는 말을 오해하거나 낭만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파렴치한 삶, 이기적인 삶, 파괴적인 삶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합니다. 세상풍조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은 아주 세련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든지 그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평생 인기를 끄는 배우나 가수로 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늙어 죽을 때까지 미모를 잃지 않았던 여자라 하더라도 죽습니다. 그가 추구하던 모든 것들은 시간과 더불어 녹슬고, 늙고, 해체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놓았던 모든 열정적인 삶은 허무로 돌아갑니다. 순간적인 열정으로 뭔가 얻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열정들이 허물과 죄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잘못을 많이 한 사람은 그 많은 잘못과 함께 죽을 것이고, 잘한 일이 많은 사람은 그 잘한 일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아직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해도 곧 죽는다면 이미 죽은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 여기 예배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 아주 짧은 순간인 100년 뒤에 살아남을 분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절망적입니다. 마지막이 죽음이니까요.

    

에베소서 기자는 하나님이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증언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물입니다. 그런데 허물로 죽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렸다거나 하늘에 앉히셨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좀 까다롭지요? 더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도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말은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적인 열광주의에 빠집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어 보려고 열광적으로 매달리는 겁니다. 그런 태도로 기도도 열광적으로 하고, 찬송도 그렇게 부르고, 단기선교를 그렇게 다녀옵니다. 모두 귀한 종교 행위들입니다. 거기에 진정성도 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늘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종교적 열정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결국 자기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를 속일 정도로 영악하기도 하고 미련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앞에 내세우는 것 같은데 속에는 자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태가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마 23:5) 자신들이 경건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결국 그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하신 일에 영혼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관심은 줄이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늘려야 합니다. 그 관심이 믿음입니다. 8절에서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관심(spiritual concern)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의 중심을 알려면 그 사람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동일한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종말에 그 생명은 실체가 되고 완성됩니다. 우리는 그 종말의 순간이 온 것처럼, 즉 예수님의 생명 사건에 참여한 것처럼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은가요? 가능합니다. 성서기자들과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살았던 뛰어난 신앙인들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놀라운 사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살아보십시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여러분의 영혼을 신비로운 생명의 능력으로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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