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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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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4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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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hyjesusonly.com |
논리를 이기는 유일한 길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불신자들을 전도하다 보면 기독교를 아주 세밀하게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심지어 신학적으로도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종교와 비교해 가면서 논리적인 접근을 해올 때는 전도자가 당황되는 경우마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말문이 막힌 신자가 어쩔 수 없이 “일단 믿어 보라니까!” 혹은 “끝까지 안 믿고 고집부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는 식으로 결론을 맺곤 합니다. 그들을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해 만병통치약 믿음을 동원하거나, 이런 진리도 못 알아먹나 싶어 같이 반발하고 치우는 것입니다.
토스트에프스키의 소설 ‘카 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반은 무신론자이고 알료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반이 하루는 알료사의 신앙을 비난할 목적으로 장편의 시를 지어서 들려주었습니다. 내용인즉 종교재판관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세상에 고통과 죄악을 가져온 것에 대해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종교재판관의 준엄한 추궁 후에 예수님이 아무런 말 한 마디 못하고 그에게 키스하는 것으로 끝나는 시였습니다.
이반의 의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에게 병 주고 약주는 식의 불합리한 것이라고 풍자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두지 말지, 반역할 것을 뻔히 알고도 방임하고는 이제 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재판관의 그런 논리적 추궁에 아무 반발할 말이 없으니까 키스하는 것으로 대충 때우려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를 다 듣고 난 알료사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이반에게 키스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시고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결코 논리적으로 불합리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식적인 이해의 차원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논리입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고 또 그 지으신 모든 만물을 태초부터 영원까지 다 꿰뚫어 섭리하시는 하나님만이 세울 수 있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이 우주 전체가 존재할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인간의 이해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만의 무조건적, 무제한적, 신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온전히 드러내 보이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죽으시고 부활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은 결코 논리가 아니라 오직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아주 특이합니다. 그 내용이 절대 비논리적이지 않는데도 이해되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난 후에라야 그 논리가 이해됩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완전히 누린 자만이 비로소 성경에 기록된 교리가 영원한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원수가 우리를 핍박할 때도 원수 나름의 타당한 논리는 있습니다. 심지어 선하고 정의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논리는 항상 자기중심적이기에 당연히 그 논리가 맺는 결과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세운 진리는 절대적 진리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수학적 과학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학과 과학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 범위 내에서 작동되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인간이 발견한 것이기에 그중에는 영원한 진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적 철학적 종교적 진리는 아무리 심오하고 고상해도 하나님 당신이 계시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사고하여 추출한 것이라면 상대적, 가변적, 일시적, 부분적 진리일 뿐입니다. 그런 진리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불편부당성을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진리를 옹호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뉩니다. 쉽게 말해 여러 종교가 있고 각 종교마다 교세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상태에선 인간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입니다. 각기 자기들의 논리가 옳거나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 그런 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적 수단은 전혀 없습니다. 다 상대적인데 어떻게 다른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구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각기 상대의 주장을 인정해 주자는 관용과 포용성만이 가장 큰 미덕으로 꼽힐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 로마인, 다른 이방인 모두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했을 때에 그분이 논리적으로 궁하고 할 말이 없어 사랑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만이 그 모든 것을 초월해 모든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반이 예수님을 조롱했든 말든 알료사로선 그런 이반이 더 불쌍하고 애처로워 사랑 외는 보여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만이 어떤 조건에서도 상대성을 없애고 불편부당을 유지하며 회의와 불신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헬라인은 논리를 좋아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좋아 합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도 그들과 똑 같이 기독교가 이성적으로 믿어져야 믿겠다고 하거나, 뭔가 위급한 일을 해결해 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도 우리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기독교가 논리가 부족하거나, 표적을 나타내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세상 어떤 종교보다 가장 논리적이며 초자연적인 은혜가 더 풍성합니다. 그러나 논리와 표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항복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스스로 자기애(自己愛)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교만이자 탐욕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한 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기에 인간을 완전히 설득시켜 항복시키는 길은 오직 사랑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만 창조 목적에 온전히 부합되어집니다. 또 인간끼리 만든 어떤 공동체도 사랑만이 그 작동 원리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인간의 논리로선 너무나 정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비논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논리나 힘이나 정의로는 원수를 결코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 원수가 불쌍하니 사랑하라 혹은 사랑하는 것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한 일이니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신자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기 위한 것이고 더 정확하게는 원수와 핍박받는 자가 함께 승리(win & win)하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것을 주위에 나누는 길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불신자들과 타종교인들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으로 관용과 포용을 듭니다. 말하자면 사랑입니다. 인간의 논리로도 모든 사상, 종교 간의 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끼리 인간적 사랑으로 얼마든지 그 일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하며 불완전하고 유한하며 죄로 부패되어 있다는 것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참 하나님 앞에 절대로 무릎 꿇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을 역사상 가장 비논리적인 죄목으로 십자가에 죽이는 한이 있어도 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 경향을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종교 간에 관용을 하자고 목청 높여 부르짖고 기독교가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온갖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자기 나라, 민족, 집단, 교세가 현실적으로 위축되어진다 싶으면 절대로 관용하지 않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입술로는 아무리 사랑을 떠들어도 내용적으로는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인간의 논리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용과 포용은 오직 다른 종교의 교세를 침범하지 말자는 한도 내에서만 작동되는 제한적, 이기적, 가식적 사랑일 뿐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외에 대안이 있습니까? 대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비논리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저들이 예수님은 비논리적이라 인정해 주지 않겠다고 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합니다. 또 다시 그들의 뒤에 사단이 있다는 성경의 진술이 영원한 진리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마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만이 모든 인류를 영원히 비출 거룩한 빛입니다. 이 아침에도 예수님을 영원토록 찬양합니다. 아멘!
6/7/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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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불신자들을 전도하다 보면 기독교를 아주 세밀하게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심지어 신학적으로도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종교와 비교해 가면서 논리적인 접근을 해올 때는 전도자가 당황되는 경우마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말문이 막힌 신자가 어쩔 수 없이 “일단 믿어 보라니까!” 혹은 “끝까지 안 믿고 고집부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는 식으로 결론을 맺곤 합니다. 그들을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해 만병통치약 믿음을 동원하거나, 이런 진리도 못 알아먹나 싶어 같이 반발하고 치우는 것입니다.
토스트에프스키의 소설 ‘카 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반은 무신론자이고 알료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반이 하루는 알료사의 신앙을 비난할 목적으로 장편의 시를 지어서 들려주었습니다. 내용인즉 종교재판관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세상에 고통과 죄악을 가져온 것에 대해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종교재판관의 준엄한 추궁 후에 예수님이 아무런 말 한 마디 못하고 그에게 키스하는 것으로 끝나는 시였습니다.
이반의 의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에게 병 주고 약주는 식의 불합리한 것이라고 풍자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두지 말지, 반역할 것을 뻔히 알고도 방임하고는 이제 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재판관의 그런 논리적 추궁에 아무 반발할 말이 없으니까 키스하는 것으로 대충 때우려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를 다 듣고 난 알료사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이반에게 키스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시고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결코 논리적으로 불합리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식적인 이해의 차원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논리입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고 또 그 지으신 모든 만물을 태초부터 영원까지 다 꿰뚫어 섭리하시는 하나님만이 세울 수 있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이 우주 전체가 존재할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인간의 이해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만의 무조건적, 무제한적, 신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온전히 드러내 보이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죽으시고 부활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은 결코 논리가 아니라 오직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아주 특이합니다. 그 내용이 절대 비논리적이지 않는데도 이해되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난 후에라야 그 논리가 이해됩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완전히 누린 자만이 비로소 성경에 기록된 교리가 영원한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원수가 우리를 핍박할 때도 원수 나름의 타당한 논리는 있습니다. 심지어 선하고 정의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논리는 항상 자기중심적이기에 당연히 그 논리가 맺는 결과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세운 진리는 절대적 진리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수학적 과학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학과 과학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 범위 내에서 작동되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인간이 발견한 것이기에 그중에는 영원한 진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적 철학적 종교적 진리는 아무리 심오하고 고상해도 하나님 당신이 계시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사고하여 추출한 것이라면 상대적, 가변적, 일시적, 부분적 진리일 뿐입니다. 그런 진리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불편부당성을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진리를 옹호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뉩니다. 쉽게 말해 여러 종교가 있고 각 종교마다 교세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상태에선 인간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입니다. 각기 자기들의 논리가 옳거나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 그런 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적 수단은 전혀 없습니다. 다 상대적인데 어떻게 다른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구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각기 상대의 주장을 인정해 주자는 관용과 포용성만이 가장 큰 미덕으로 꼽힐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 로마인, 다른 이방인 모두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했을 때에 그분이 논리적으로 궁하고 할 말이 없어 사랑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만이 그 모든 것을 초월해 모든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반이 예수님을 조롱했든 말든 알료사로선 그런 이반이 더 불쌍하고 애처로워 사랑 외는 보여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만이 어떤 조건에서도 상대성을 없애고 불편부당을 유지하며 회의와 불신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헬라인은 논리를 좋아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좋아 합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도 그들과 똑 같이 기독교가 이성적으로 믿어져야 믿겠다고 하거나, 뭔가 위급한 일을 해결해 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도 우리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기독교가 논리가 부족하거나, 표적을 나타내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세상 어떤 종교보다 가장 논리적이며 초자연적인 은혜가 더 풍성합니다. 그러나 논리와 표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항복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스스로 자기애(自己愛)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교만이자 탐욕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한 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기에 인간을 완전히 설득시켜 항복시키는 길은 오직 사랑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만 창조 목적에 온전히 부합되어집니다. 또 인간끼리 만든 어떤 공동체도 사랑만이 그 작동 원리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인간의 논리로선 너무나 정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비논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논리나 힘이나 정의로는 원수를 결코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 원수가 불쌍하니 사랑하라 혹은 사랑하는 것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한 일이니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신자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기 위한 것이고 더 정확하게는 원수와 핍박받는 자가 함께 승리(win & win)하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것을 주위에 나누는 길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불신자들과 타종교인들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으로 관용과 포용을 듭니다. 말하자면 사랑입니다. 인간의 논리로도 모든 사상, 종교 간의 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끼리 인간적 사랑으로 얼마든지 그 일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하며 불완전하고 유한하며 죄로 부패되어 있다는 것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참 하나님 앞에 절대로 무릎 꿇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을 역사상 가장 비논리적인 죄목으로 십자가에 죽이는 한이 있어도 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 경향을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종교 간에 관용을 하자고 목청 높여 부르짖고 기독교가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온갖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자기 나라, 민족, 집단, 교세가 현실적으로 위축되어진다 싶으면 절대로 관용하지 않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입술로는 아무리 사랑을 떠들어도 내용적으로는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인간의 논리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용과 포용은 오직 다른 종교의 교세를 침범하지 말자는 한도 내에서만 작동되는 제한적, 이기적, 가식적 사랑일 뿐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외에 대안이 있습니까? 대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비논리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저들이 예수님은 비논리적이라 인정해 주지 않겠다고 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합니다. 또 다시 그들의 뒤에 사단이 있다는 성경의 진술이 영원한 진리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마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만이 모든 인류를 영원히 비출 거룩한 빛입니다. 이 아침에도 예수님을 영원토록 찬양합니다. 아멘!
6/7/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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