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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07: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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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침체와 회복의 갈림길에서
2006-09-03
Ⅰ. 본문해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생의 벼랑 끝에서 절망과 곤고함 속에 몸부림치는 한 영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구원해 내시는지를 보여줍니다.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은 전체가 5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모세시대로부터 시작해서 천여 년 간 쓰여 진 시편들을 후일 편집할 때, 다음과 같은 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5권은 각각 모세 오경의 다섯 율법 책과 짝을 이루어 편집되었습니다. 즉, 1권에 속한 시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영광, 그 권능을 노래하는 창세기와 관련이 있으며, 2권은 출애굽기, 3권은 레위기, 4권은 민수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본편이 속한 5권은 모세의 율법 중 신명기의 내용과 관련이 됩니다. 신명기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생의 벼랑 끝에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Ⅱ.생의 벼랑 끝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경험일 수도 있고, 그 경험을 토대로 모든 인간들을 염두에 두고 일반화시킨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10-11절). 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마다, 각기 자신이 그러한 고통 중에 있는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하지 않고 항상 주위의 사람들과 환경의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생의 벼랑 끝에서 곤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원인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시인은 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인간의 상태를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A. 육체: 죽음과 같은 절망
첫째로, 그의 육체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과 같은 절망입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이는 어두운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를 묘사하는 문맥입니다. 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절망적인 모습을 지하나 동굴감옥에 갇혀있는 사형이 확정된 죄수의 모습에 투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죽음과 같은 절망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속에서 모든 희망은 끊어지고 사물들의 질서는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재편됩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러한 형편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죽음의 한 복판에 들어선 것 같은 절대적인 외로움과 고통으로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우리의 육체의 삶이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들어서게 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궁핍한 생활형편으로 인해,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갈등과 미움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됩니다. 자신에게는 그럴 의사가 없지만, 자신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같은 절망 속으로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는 것에 의미가 없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보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삶의 변화된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B. 영혼: 죄수와 같은 속박
둘째로, 그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사형이 확정된 죄수가 경험하는 그런 속박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시인이 그리고 있는 주인공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육체로는 죽음과 같은 절망에 처해있고, 영혼으로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속박아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환경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자유롭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자유를 얻으면 육체의 모든 괴로움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으며, 그 환경의 고통을 파도삼아 하나님을 향하여 항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자가 생의 벼랑 끝에 섰다는 것은, 그의 마음과 영혼이 자유를 잃어버린 속박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 사람은 그런 속박 속에서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언젠가 야생동물을 불법 포획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고발한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야생동물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덫을 놓았습니다. 거기에 어린 멧돼지 한 마리가 걸렸습니다. 기자들이 찾아갔을 때에 덫에 걸린 그 멧돼지는 사슬에 매인 채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날카로운 덫에 걸린 발목은 살이 찢어져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얼마나 많이 몸부림 쳤던지, 덫을 묶어놓은 사슬이 나무껍질을 하얗게 벗겨내었습니다. 이 광경은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의 몸부림치는 상태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생의 벼랑 끝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불신자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과 영혼이 이런 잔인한 속박가운데 있기에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자유롭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은 그런 자유를 따라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또 사랑하고 있습니까?
Ⅲ. 절망과 곤고함의 원인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이러한 절망과 곤고함에 처하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호의와 은총, 그리고 형통한 삶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순종을 담보로 이러한 형통함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곧 살펴볼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지혜와 사랑을 가지고, 이런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 절망과 곤고함을 통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시는 당신의 지혜와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형통할 때뿐만 아니라, 생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인생의 위기를 통해 더욱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면 언약 백성들이 생의 벼랑 끝에서 절망하고 곤고해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것을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A. 말씀을 거역함
첫째로, 말씀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삶의 교훈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지키며 살도록 주신 계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육체는 죽음과 같은 절망에 빠지고, 영혼은 죄수와 같은 속박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히브리 성경에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들(?????????)’이라는 복수로 등장합니다. 인간이 절망과 곤고함에 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을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변의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일은 불신자들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절망과 속박으로부터의 회복과 구원은 사물과 자신을 사실 그대로 살피는 정직함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키며 살아야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그분의 무한한 지혜 속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 가운데,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주신 계명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알고, 우리에게 주신 개별적인 삶의 계명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도록 계명을 주셨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성의 설복 속에서 주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으로 그 계명을 따라 살면, 그것이 최고의 삶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성적으로 이 모든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분만이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는 사실, 그리고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그 계명들을 지킨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계명을 이해할 때든지, 못할 때든지 그분께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으로 그 계명에 순종하면, 우리의 지성은 명정하게 되고, 그로 인해 진리를 바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 영혼이 그 진리를 잘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불타오르게 되는데,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지혜로우신 분, 우리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아시는 분, 우리의 참된 행복을 위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사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빛과 행복 속에서 살아야 할 언약백성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속박 받는 영혼으로 생의 벼랑 끝에 서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아직도 여러분의 곤고한 영혼이 삶의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음과 같은 절망에 처해진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단지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기에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증언합니다. 모든 불순종은 우리로 하여금, 생의 벼랑 끝으로 들어가게 하는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돌이키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주님이 주시는 계명과는 상관없는 산 과거를 추억하십시오. 그리고 마음 아파하십시오. 그리고 돌아서십시오. 그것이 생의 벼랑 끝에서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B. 하나님의 뜻을 멸시함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그의 실천적인 불신앙을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것은 이러한 불신앙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모든 죄와 악의 뿌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뜻을 멸시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 그분의 뜻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자신의 가치가 하나님의 존재 가치보다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인간의 자리를 떠난 생각이며 뜻입니다. 이 세상의 불신자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하나,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 합니다. 전자의 사람들의 잘못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후자의 사람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경험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고 있는 신자의 정체는 영원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영원자체이신 하나님, 진리자체이신 하나님, 불변하시고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자신은 지극히 낮고 천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언약백성의 도리입니다. 이러한 겸비함 속에서 신자는 오히려 자기의 뜻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 멸시의 삶을 통해 신자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거역하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낫게 여기며 살아가려고 하는 자와, 신자라 할지라도 자신을 멸시하는 일이 없이는 이런 절망과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또 한편으로 도움을 위해 그분에게 손을 내미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행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그분이 창조주이시며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전능자이심을 인정하십시오. 그분 밖에서 행복과 형통을 구하는 모든 악한 시도를 포기하십시오. 모든 행복과 평안의 출발이 그분의 뜻을 인정하는데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부패와 교만을 고치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것 같은 절망과 곤고함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성심스러운 화목에의 또 다른 초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절망과 곤고함으로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들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Ⅳ. 하나님의 구원방법
우리는 이러한 절망과 곤고함 속에서 고통 할 때, 어떻게 하면 거기에서 벗어나서 평안과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 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단지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 영혼을 가진 인간의 탁월함을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인간존재의 탁월함은 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영혼을 소유한데 있고, 영혼의 탁월함은 그 영혼이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것 같은 인생의 위기를 통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고치십니다.
A. 마음을 낮추심
첫째로, 마음을 낮추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12절). 인간의 마음은 커다란 배 끝에 장착된 방향타(helm)와 같습니다. 인간이 진취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무엇인가 일하며 살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마음은 이 모든 에너지를 가동할 때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배이지만, 방향타가 고장 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지혜로운 항해사라면 방향타를 고치기 전까지는 항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망가진 방향타를 가진 배가 강력한 추진력으로 항해하면 항해할수록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사태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마음은 신자의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인해 부유하게 되거나 혹은 그 반대로 가난해지는 것, 주님이 높여 주셔서 좋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거나 혹은 비천하게 되는 것, 젊음과 늙음, 홀로 사는 것과 결혼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삶의 양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이 어떠하든지 그 모든 양태들이 가는 방향은 양태가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이는 마치 배에다 아무리 다양한 물건을 싣거나 새롭게 칠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때때로 교만해지거나 세상을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끊임없이 권고하시며, 또한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돌같이 굳어진 우리 마음과 욕정에 굴복하는 삶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설복을 거절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생의 벼랑 끝에 세우십니다. 거기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절망과 곤고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세상의 헛된 욕심과 미련을 버리게 하시며, 잠세적인 것이 영원한 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얼마나 잠식해 나갔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거기서 우리의 마음은 낮아집니다. 낮아진 마음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무엇으로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데서 오는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 자신의 자원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자원과 힘을 빌려서라도 하나님 없이 살아서 당하게 된 절망과 곤고함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미리 아십니다. 그래서 돕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일반적인 고생은 피할 길이 있지만,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그분이 의도를 가지고 허락하신 고난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모든 구원의 길이 차단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신자의 마음이 낮아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벼랑 끝에 선 위기 가운데 있고, 그런 자신을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는데, 그동안 자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졌고, 자신의 영혼과 마음은 죄로 불결해 졌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자니 자원과 능력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자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하시는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의지할 바가 없게 됩니다. 그때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마음이 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이렇게 낮아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분주하고 바쁘게 일하며 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때로는 힘에 넘치도록 헌신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섬김과 우리의 행위 속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처럼 낮아진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지사의존의 마음이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그러므로 높아진 마음을 낮추십시오. 겸비해지십시오.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온전한 복종 속에서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하십시오.
B. 기도하게 하심
둘째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생의 벼랑 끝에서 절망하고 있는 곤고한 당신의 백성들을 건지실 때, 그들 스스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13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기도해 주는 기도 섬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중보기도라고 말하는데, 사실 중보기도라는 말은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쓰지 않는 말입니다. 최근에 생겨난 표현이지요. 신학적으로 이 중보라는 말은 오직 중보자가 드리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중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중보자적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든지 인간은 인간을 위한 중보 기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혹시 그의 유익을 위하여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람과 같은 인간의 위치에서 대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대신 죄 값을 지불하실 수 있는 중보자셨으나, 우리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지 하나님 앞에 받아 드려질만한 대신하는 어떤 공로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중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많이 기도 해주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기도를 받는 사람이 자신만의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을 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기도해주는 사람의 기도를 따라 자기도 살아가고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의 단절된 채, 자기를 위해 대신 드려지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만을 의지함으로써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기 보다는 신앙을 가장한 미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기도해주는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도 귀를 기울이시지만, 죄인 스스로가 참회하며 기도할 때 그 많은 기도의 효과를 응답으로 보여주십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당신의 뜻을 멸시함으로써 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된 사람들을 기도하게 하십니다. 마음이 낮아진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영혼을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절망에서 건져 내십니다.
여러분은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살던 인간이 어떻게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되는지, 그 과정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죄인이 홀로 살 수 없는 고통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동기는 에로스의 사랑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 진실한 참회 속에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될 때, 새로운 사랑 곧 까리따스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랑이며, 지순의 사랑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완덕의 길을 가게 하는 그 사랑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무엇일까요? 죽음을 각오하며 선교의 길을 떠나는 모습도 하나님께는 소중할 것입니다. 맡은 바 사명을 위해 땀 흘리며 애쓰는 섬김의 모습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아름다운 순간은,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오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형식이 아닌 마음 바침으로써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흐느끼며 기도할 때, 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배향하던 모든 삶에 대한 후회와 그렇게 살게 만들었던 원흉인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혐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고 싶은 그 전향의 아름다운 의지,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난주에, 어린이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그들의 회심을 위한 집회를 열었습니다. 주일날 모이는 어린이들보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나와서 변화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들의 회심을 빌며, 그 아이들을 안고 기도해 줄 때에, 많은 어린이들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저의 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어찌하든지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던 인간들이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절망가운데 기도하게 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말할 수 없는 곤고함과 절망적인 시련, 살을 찢는 것 같은 심령의 고통이 때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아니고는 우리의 굽어진 마음의 방향타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이를 우리를 고치기 위한 기회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인생의 벼랑 끝에서 절망하고 있다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어둠 가운데 곤고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마음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진토에 엎드린 것 같은 지극히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망가진,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 수 없게 된 자신을 고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소생케 된 영혼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하실 것입니다.
C. 영혼을 자유케 하심
셋째로, 영혼을 자유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므로 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을 때,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우리의 삶의 상황을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섭리하실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속박을 먼저 끊어 자유를 주심으로써, 삶의 모든 상황을 능가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터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진정한 자유는 물질의 풍성함과 육체의 건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구김 없이 살아가는 영혼의 자유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13,14절).
생의 벼랑 끝에서 절망과 곤고함으로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은 자유케 하셨으나 곤고한 상황은 잠시 남겨두실 때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된 영혼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사슬에 매인 것처럼 속박 받고 있을 때에는 생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절망을 통해 배우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 영혼으로 그 난관을 극복해 갈 때에는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신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많은 학우들이 등록금을 낼 계절이 되면, 기도원에 금식하러 올라가곤 하였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였죠. 어떤 사람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가 한 성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감격적인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채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학우는 등록금이 없으면 학교를 휴학하겠다고 마음먹고 기도도 하지 않은 채 애매한 태도로 새 학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떤 성도가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 운이 좋았지요. 제가 그 성도님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의 친구였기 때문에 저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린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먼저 그들의 영혼을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절망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보고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은 자유 합니까? 고난과 시련이 있으나 양심은 자유를 얻으셨습니까? 환란과 핍박에 직면하나 여러분의 심령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Ⅴ. 구원하시는 우리 아버지
이처럼 마음을 낮추고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저들을 고통 받는 상황에서 건져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107편에는 다음과 같은 시인의 고백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해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어 주심으로써 완전히 구원하십니다. 고통스러운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그를 이끌어내시어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온 몸으로, 실제의 삶속에서 구가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죄가 들어오기 전, 인간에게 허락하신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 선한의지를 가지고 주님의 뜻을 좇아 사는 그 온전한 자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행하실 때, 지혜와 사랑으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아실뿐 아니라, 또한 그 지혜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더 뛰어나고 완전한 지혜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당신의 언약을 좇아 살게 하십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침체에 빠진 인생의 벼랑 끝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지 아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는 그 탁월한 지혜로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 모든 회복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삶은 모두 믿음의 눈으로 한 것이 아니요, 보이는 육체의 눈으로 그리한 것이니,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될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행하실 때 사랑으로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높이며 사는 아름다운 신앙의 때뿐만이 아니라, 주님을 거스르며 거역하는 침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니, 징계 중이라고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며, 심판 중에라도 우리의 약함을 헤아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이 모든 회복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여야 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더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VI. 결론과 적용
우리의 인생의 길에는 언제나 두 길이 놓여있습니다. 특별히 시인이 노래하는 내용과 같이 영혼의 침체에 빠졌을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영혼으로 벼랑 끝에서 추락할 수도 있고, 거기에서 날개를 달아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그 인생의 벼랑을 아름다움 활공의 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그분께 부르짖으며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면,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선한 의지를 소유함으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지금도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며 아름다운 활공을 꿈꾸는 사람들, 자신의 모든 죄와 얽매임들을 벗어버리고 날개를 달아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건져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나눔의 시간
나눔 1: 지난 주간의 말씀 “여호와께서 치실 때(룻 1:16-18)”를 듣고 실천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나눔 2: 절망 중에 처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절망 중에 빠졌을 때, 인간은 대개 그 원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의 경험을 곁들어서 이야기해 봅시다.
나눔 3: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유를 성경은 무엇이라 가르칩니까? 구체적으로 그것이 우리 삶속에서 어떤 것인지를 나누어 봅시다.
나눔 4: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우시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를 고치십니까? 세 단계를 말해 봅시다.
나눔 5: 그러한 회복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두 가지를 배웁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다시는 하나님에 대해 상상해 봅시다.
200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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