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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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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인생의 황혼에 찾아온 위기
2006-09-17
본문: 삼상 8:1-5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 8:1-5)
I. 본문의 배경
몇 해 전 카드빚에 몰리던 사람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가 진 빚의 액수는 육 백 만원에 불과하였습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적은 빚은 염려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은 빚도 절망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젊어서 육체와 정신에 자원이 많이 남아 있을 때에는 큰 환란도 위기일 수 없지만, 늙어서 육체와 정신의 자원이 별로 없을 때에는 작은 환란으로도 우리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를 인생의 위기로 내모는 계기들이 우리 자신에게 있기보다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늙어감에 따라 욕망의 크기도 줄어들고 인생의 모험에도 주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의 황혼에 이러한 삶의 벼랑 끝에 섰던 믿음의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 사무엘입니다. 그는 가장 안온(安穩)하여야 할 인생의 황혼기를 고통 가운데 지나고 있었습니다. 아들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II.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신실한 신앙을 가진 어머니의 서원으로 태어난 사무엘은 일찍이 여호와께 드린바 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평생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직임으로서의 선지자 제도의 시조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세 솥발과 같은 기구가 있었으니,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 사무엘은 선지자 직분이 직임(職任, office)으로서 정착되는 시원이 됩니다. 모든 선지자의 비조(鼻祖)는 모세이지만, 사무엘 이후로는 선지자들이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이스라엘을 위하여 봉사하게 됩니다(왕하 2:7).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신정국가로 세우는 일을 했다면, 사무엘은 그렇게 수립된 신정국가 체제가 왕정국가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둘째로, 그는 탁월하게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와 서원으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년에 신령함을 잃고 세속적이고 무기력해진 제사장 엘리의 지도 아래서 자랐으나, 뛰어나지 못한 스승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젖 뗄 무렵 헤어졌지만 어머니인 한나의 경건한 신앙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듣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삼상 3:10-18), 하나님과의 뛰어난 친교 속에서 동행하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던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삼하 3:19). 그의 신령한 성품은 미스바의 성회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처했을 때에 사무엘은 이러한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온 백성의 영적 회복의 기회로 바꿀 줄 아는 신령한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결국 미스바에서의 민족적인 회개를 통하여 블레셋을 물리치는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그 유명한 에벤에셀의 축복의 증인이 됩니다,
셋째로, 그는 탁월한 권위를 가지고 다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두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초대 왕 사울과 계승자 다윗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울이 비록 한 나라를 다스리던 왕이었으나, 선지자로서 사무엘은 그에게 책망과 직언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삼상 15:15-23). 사무엘은 비록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이스라엘에 왕정을 도입하는 심부름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이상은 왕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다스리는 신정적(神政的) 왕정국가였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신앙적인 이상을 국가 정치에 구현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그는 탁월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말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셨던 역사를 회고케 하며 교훈하였습니다. “늙어 머리가 희었을” 때에도, 왕이 세워져 그들을 다스릴 때조차도 그 백성들을 교훈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24). 그는 이처럼 연로하게 된 후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탁월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엘리의 노년과는 다른 노년을 보내었으니, 탁월한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III. 아비를 따르지 않은 아들들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를 둔 아들들은 얼마나 경건하고 진실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삼상 8:3).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었던 아버지의 아들들이 신앙이 거의 없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더욱이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사사들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아무런 직분이 없이 평범한 농부나 혹은 목부로서 일생을 살았더라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지도자가 된 이들의 불신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A. 요엘과 아비야
그 두 아들의 이름은 요엘과 아비야였습니다. 그 이름은 각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뜻과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이름입니까? 장자의 이름은 여호와 종교의 유일신 사상을 표명하고 있고, 차자의 이름은 하나님을 삶의 모든 방면에서 주인으로 인정하며 가까이 하는 신앙 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었거나 아버지인 사무엘이 지어준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름은 아버지 사무엘이 두 아들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간절한 신앙적인 바람을 담은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정에서 자기의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을 지어주거나 성경인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 부모들은 더더욱 그 자녀들이 그 이름에 합당한 신앙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무엘의 두 아들의 신앙과 삶의 특징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아비를 따르지 않음
첫째로, 그들은 아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사무엘이 저들에게 보인 신앙의 본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라 탁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그 탁월한 모본을 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가정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삶의 모본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과 교훈으로 그들을 가르친다 할지라도 부모들이 모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자녀들은 결코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회심하지 않은 자녀들도 회심한 아버지의 경건한 삶과 어머니의 아름다운 생활을 보며 회심의 필요성에 대해 도전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모본을 부모가 보여준다 할지라도 회심치 않은 자녀는 그 모본을 따라서 살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경건한 아버지를 혐오하거나 싫어해서 그 모본을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세상을 더 사랑했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보다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그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회심을 심각하고 다급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부모들은 이 점에 대해 깊이 각성해야 합니다. 그저 자신만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그 본을 보고 언젠가는 자녀들이 감화를 받아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입니다. 인간의 죄 된 본성의 변화가 지니고 있는 영적 성격을 바로 이해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자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데 있어서 부모의 선한 행실이 꼭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을 보십시오. 흠 잡을 데가 없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집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회심하지 않은 자녀들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식은 신앙의 형식을 어느 시기까지 준수할 수 있으나 결국은 자신의 회심하지 않은 상태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도 하나님을 싫어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열렬히 믿고 섬기는 아버지의 삶의 모본도 사랑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우리의 좋은 모본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초자연적인 일이 그들의 마음과 영혼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정직하게 회개하며 자신이 비록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는 어떤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인 우리가 자녀들의 회심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기억해야 할 핵심입니다. 부모들이 이 일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애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자녀들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로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2. 재물을 사랑함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사랑하였습니다. 사무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마음은 일평생 순전하였습니다. 추후의 흐트러짐도 없이 올곧았고, 한결같은 일생을 산 지도자였습니다. 노후에 스승 엘리처럼 눈이 어두워져 부패하지도 않았으며, 형통한 가운데서도 다윗처럼 육욕에 흘러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히스기야나 아사처럼 노년에 마음이 부유해져서 하나님을 덜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의 비탈길에서 유일신 신앙을 고고하게 외치던 여호수아를 생각나게 합니다(수 24:15).
그의 자녀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재물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을까요? 그들은 사심 없는 지도자로서 일생을 순전하게 산 훌륭한 아버지 아래서 양육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노년의 사무엘은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삼상 12:2-3). 그때에 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삼상 12:4). 그렇습니다. 요엘과 아비야가 재물을 사랑하였으나 그것은 아버지 사무엘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자신의 좋은 신앙의 모습만을 배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이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경건한 집안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오히려 저들이 쉽게 접해보지 못하는 수많은 즐거움과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에, 훨씬 더 유혹적일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쉽게 그 유혹에 굴복하게 됩니다.
부모인 여러분이 은혜를 받아 잠시 머물 이 세상 대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며 산다할지라도, 여러분의 자녀들은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경험하지 못한 진리들은 붙들고 살 수가 없고, 만나지 못한 하나님은 사랑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모본을 보여주었지만, 자녀들은 하나님 대신 재물을 사랑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 수많은 아름다운 모본을 거절하고 추루하고 악한 이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명예로운 가문을 더럽게 하였을까요? 더욱이 이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언약 백성들을 섬기며 봉사하여야 할 여호와의 종들인 그들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부모의 경건한 모본이 부족하였습니까?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습니까? 제사와 예배의 법도에 대한 교훈이 부족하였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질문은 많지만 대답은 오직 한 가지,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심하고 또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것 없이는 누구도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더 사랑하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회심은 그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감각적 사물들이 빚어내는 세상의 표상을 넘어 영원한 실재(實在, realitas)인 하늘나라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영원(永遠)은 곧 하나님 자신이시며, 진리(眞理)이며, 선(善)이시며, 아름다움(美) 자체이십니다. 그 영원은 영원한 것들을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전달해 줍니다. 그 누구도 거듭난 영혼, 회심한 마음 없이는 이 영원에 대한 감각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아직 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바쁘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 신령한 신앙의 감각을 잠시 상실하고 영혼의 침체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히 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은 정말 회심한 사람입니까? 잠시 유혹도 받고 침체에 빠지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나라에 대한 감각을 가진 복된 사람들입니까? 날마다 유혹을 받지만 날마다 자기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한 것을 회개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순례자들입니까? 그들의 마음에 영원이신 하나님, 진리이신 주님,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나님이 선포될 때마다 그들 마음속에 잠자던 영원에 대한 감각이 깨어납니까? 그래서 잠시 지니고 있던 재물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나의 영원하신 기업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요엘과 아비야와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부모인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어떻게 판단합니까?
3. 판결을 굽게 함
셋째로, 그들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고도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 다음으로 싫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서도 이미 이런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탐내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습니다(출 20:17). 더욱이 재판관에 자리에 있었던 사사들로서 뇌물을 받고 그 이익을 따라 판결을 굽게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말할 수 없는 모독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불의함이 누룩처럼 두루 퍼지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으니 그 장본인이 바로 사무엘의 아들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러한 지속적인 죄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도자, 특히 재판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곧 경건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세우는 자가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격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진실무망(眞實無妄)한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출 18:21).
아버지 사무엘은 의와 공정으로 판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를 정의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요엘과 아비야는 한번도 아버지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 다른 것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대신 재물을 사랑하여 율법을 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들 가운데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들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심한 사람이 보이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의 이끌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알 수 없는 사랑의 힘으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경외는 곧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이끌림(timor et fascinatio)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한 자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처럼 자녀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의 이끌림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경건한 사무엘의 집안에 두 아들의 이러한 행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더욱 우리 자녀들의 회심 여부를 깊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시오. 그러나 자녀들의 회심 없이는 이것이 그들 안에서 삶을 위한 내적 원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회심을 위하여 전심으로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B. 늙었을 때에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사사가 되기 전에 이처럼 방종한 삶이 만 천하에 드러났더라면 아마도 사무엘은 자신의 아들이었으나 이들을 사사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사가 되었고, 이처럼 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무엘이 늙으매...”(삼상 8:1). 보십시오. 사무엘이 아직 젊고 힘이 있었을 때에는, 그리고 그 자녀들이 어렸을 때에는 이처럼 노골적으로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재물을 탐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늙고 그 영향력이 쇠퇴하였을 때에,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또 권력이 부여되었을 때에는 그들 자신 안에 있는 불신앙을 마음 놓고 노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영혼이 변화되는 것과 단순히 길들여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길들여지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전적으로 변화될 기회로부터 더 멀어지게 합니다. 저는 이 광경 속에서 일종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지금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아직까지는 자녀들을 통제할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말을 듣고 신앙적인 삶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그들의 본성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일까요? 영혼과 마음이 참으로 변화하여 그 원리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까지도 우리의 힘과 자원의 슬하에 있기에, 아직 완전한 자유와 힘이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기에 회심하지 않은 자신의 영혼을 감춘 체 흉내 내고 있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직 회심하지 않았다면 이런 형식뿐인 신앙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잠시 동안의 일입니다. 회심 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자신의 회심하지 않은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고야 맙니다. 노년의 사무엘에게 이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영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부러울 것이 없는 축복 속에서 일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일생을 후회 없이 마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년에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저무는 인생에 찾아온 이 위기의 급습은 회심하지 않은 자녀들을 통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물로 인해 위기를 만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속된 욕망에 포로된 사람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더러운 추문으로 위기를 초래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기는 회심치 않은 자녀들을 통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일생을 주님을 위해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찬 가운데 하얀 머리를 쓸어 올린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회심치 않은 자녀들은 인생의 노년에 거치는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과 같이 경건하고 탁월한 인물도 자신의 자녀들의 회심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면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무엘이 훌륭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가 만약 자신의 생애 중 더 많은 시간들을 자녀들의 회심에 두고 고민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진실무망한 신앙을 심어 주기 위해 더 많이 수고하고 눈물을 흘렸더라면 다른 결과가 오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판단할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반드시 회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심한 우리의 자녀들은 어찌하든지 회심한 그 은혜를 보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생을 믿음을 따라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황혼에 예기치 않은 위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아, 우리에게 그런 일이 없기를…….
IV. 은혜로 다스려지게 하라
우리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려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하듯이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언제나 다양한 삶의 환경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부요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가난할 때도 있고, 또 병들 때가 있는가 하면 건강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의 행복과 신앙이 환경에만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다스려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A. 은혜로 다스려질 때
우리의 자녀들이 어떠한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은혜로써 다스려지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안전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에 우리가 은혜 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 고난을 통해 얼마나 많은 유익들을 얻게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고난 속에서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그 질기디 질긴 불순종과 고집들을 그 고난을 통해 발견하고 겸비해지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또 형통할 때에 은혜 안에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형통함 안에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공급해 주시는 물질과 그 힘 안에서 우리의 사명도 발견하게 됩니다. 물질의 풍부함 속에서도 은혜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교만해지고 행위 또한 부패하게 되지만, 은혜가 있다면 그것으로써 사명을 따라 살고 주님이 주시는 축복들을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 데 쓰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자라났다 할지라도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려지는 사람들이라면 그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상처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놀라운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상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 눈뜨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이 모든 것들을 이기게 만들어줍니다. 부모 된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젊고 이 세상 자원을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결국은 늙고 병들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원들은 사라져 버리거나 자녀들에게 넘겨집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누가 붙들어줍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으로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붙들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도 그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선한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아도, 지켜야 할 그들의 의무는 회심하지 않은 자녀들은 이행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은 먼저 회심하여야 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녀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마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인생의 황혼에 이 같은 고통스러운 갈림길에 서지 않기 위해서는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몸부림 쳐야 합니다. 자녀들의 남은 생애 중 지금이 그런 결심을 하기에 가장 빠를 때입니다.
B. 은혜로 다스려지는 길
은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이 어찌하여야 은혜로 다스려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회심하는 것입니다. 회심함으로써 그 영혼과 마음 안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져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둘째로는 회심한 자녀들을 방치하지 말고 은혜 안에 있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였다 할지라도 은혜 안에 있지 않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행복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얻은 구원인데, 어떻게 해서 들어가게 된 회심의 상태인데,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여 죄의 지배 아래 살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할 인생의 수많은 날들을 불순종과 타락 속에서 방황하게 내버려 둡니까? 회심하지 못한 자녀들에 대해 설교 할 때마다 이미 회심한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부채감이 덜할 것입니다. 이미 회심하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늘나라에 갈 것이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회심함으로써 영생을 얻은 자녀들의 행복은 성화의 삶 속에서만 누려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실제로 아름답게 회심한 경험이 있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죄의 지배 아래 들어가서 고통스럽고 아픈 시절들을 보내는 광경들을 지켜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놓은 은혜의 샘을 죄와 사단이 얼마나 막으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회심도 어려운 것이지만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 보십시오. 회심 이후 흘린 그 수많은 눈물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눈물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그분의 자녀가 되기 위해, 자기의 죄를 버리고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습니까? 온전한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하여 얼마나 다양한 진리의 말씀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였습니까? 혼자 울며 기도하던 수많은 날들, 가슴앓이와 방불한 마음지킴의 삶, 알지 못했던 진리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눈뜸, 수없는 결단의 연속, 그 모든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이만큼밖에 못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진리의 빛과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녀가 회심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자녀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며 변화되어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성장해 가도록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뜻을 모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에 여러분의 황혼은 그들로 인해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V. 결론: 네 자녀를 버리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아무리 회심하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아무리 완고하다 할지라도, 그 회심의 영광스러운 날이 아무리 더디다 할지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생명과 결탁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날이 속히 오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말씀 앞에 세우며 애써야 할 것입니다.
1. 지난주의 말씀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창 35:1-2)”를 듣고 한 주간 실천했던 삶이나 받은 은혜들 을 나누어 봅시다.
2. 사무엘은 어떤 점에서 뛰어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까? 우리와 비교하며 생각해 봅시다.
3. 경건한 사무엘의 아들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4. 그들의 회심치 않은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성장함에 따라 혹은 환경이 변함에 따라 회심치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회심치 않음을 숨길 수 없는 것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5. 우리 자녀들의 회심의 여부, 혹은 은혜 상태 안에 있는 지에 대한 여부를 이야기 해보고, 기도제목을 나누어 봅시다. 200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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