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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9:31,3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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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마음으로 드리는 착한 섬김
2006-10-22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개인의 영적인 건강함은 교회의 건강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은혜 안에서 복된 삶을 사는 것도 교회의 평안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적 성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중심축이 여전히 자신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과 교회생활, 믿음 안에서 나누는 성도의 교제, 나아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까지도 자기 자신의 평안과 행복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취급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교회의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던 때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마음을 다하여 작은 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겼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교회를 능력 있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그러한 부흥의 능력 아래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I. 본문의 배경
본문은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회심한 직후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시작했고, 이는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혹감을 주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A. 사울의 회심과 박해 (23-25절)
회심한 사울은 먼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을 머물렀습니다(19절). 이때 사울은 제자들로부터 복음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은 즉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사울은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변증하였으며, 다메섹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을 복음의 도에 굴복시켰습니다(22절). 그러나 이러한 복음의 성공과는 별도로 회심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기 위해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습니다. 사울은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자신을 담아 성에서 달아나게 해주는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났으니, 이것이 사울이 경험한 최초의 박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과 함께 받게 될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B. 핍박에 굴하지 않음 (27-29절)
사울이 그러한 박해를 받았으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경험이 이처럼 담대한 확신을 불러일으키고 굳세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가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교제하고자 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루살렘을 출입하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변론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에 대한 담대함은 오직 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교회 안에 신자들로 하여금 늘 복음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그 큰 성령의 능력 속에서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실로 이러한 복음의 경험 없이는 그들이 결코 이 복음 전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영적 군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II.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감 (31절)
사울과 자들이 후에 힘을 합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주를 믿는 사람들은 든든한 공동체를 이루어 갔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본문으로 미루어 볼 때,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하는 참된 부흥 아래 있는 교회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나타냅니다.
A. 교회의 평안함: 외적 상태
첫째로 교회의 외적 상태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회심한 사울 때문에 잠시 큰 핍박이 있는 것 같았지만 곧 평안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에 흩어진 많은 교회들이 평안한 가운데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의 평안한 외적 상태는 내적인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평안함 그 자체가 교회의 건강함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영적인 욕구나 섬김에의 도전이 없기 때문에 평안한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의견을 앞세우고, 분쟁할 수 있을 만한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획득되는 평안함, 신자의 수가 현저히 감소하였기 때문에 생겨나는 무기력한 평안함 같은 것들은 부흥의 결과로서의 평안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31절). 보십시오. 교회가 외적으로 평안하였지만, 내적인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든든히 서가게 되었습니다. 핍박과 어려움도 잠시 멎었고 교회의 분열이나 다툼 같은 것도 없이 평안함을 누리는 가운데, 교회 안에 부어주시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교회 자체를 든든히 하는데 온전히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자그마한 섬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바위틈에서 자란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섬을 안내하는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3-4 미터 밖에 되지 않는 그 작은 소나무가 천년이나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바위틈에 싹이 나서 비바람을 맞으며 기름진 흙도 없이 생명을 부지 하는 가운데 살아왔기 때문에 천년이 흘렀지만 분재와 같은 소나무로 남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은혜를 주시지 않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특별한 영적 충만함을 경험케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분쟁하며 다투거나 혹은 가치가 적은 일에 몰두함으로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의 에너지를 쓸 데 없는 일에 소모함으로써 결국 교회가 든든히 서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안하여야 합니다. 외적인 핍박은 우리의 힘으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의 능력이 우리 자신의 오류와 허물, 그리고 죄와 무관심으로 인해 낭비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이 부어주시는 말씀의 은혜가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B. 교회의 경외함: 내적 상태
둘째로 교회의 내적 상태입니다. 이는 교회가 주를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은 내적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교회가 주를 경외하게 된다는 것은 교회를 공동체적 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에서 깊어져 갈 때, 그러한 경외함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례전적인 공동체의 경외함으로써 하나님께 봉헌됩니다. 교회가 아무리 평안함을 누리고, 많은 신자들로 붐빈다고 할지라도 그 성도들이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에서 깊어가지 않는다면 그러한 성장은 교회로 하여금 더욱 힘을 얻어 공동체적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의 성장은 이런 면에서 많은 반성을 촉구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교회가 더욱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흔합니다. 작은 교회이던 시절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뜨겁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던 공동체였는데, 교회가 성장하면서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은 늘어나고, 미끄러진 상태에서 회복되지 않는 교인들이 교회의 대세를 이룬다면, 그 교회는 덩치는 크지만 몸은 병든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에 기여하는 것은 그 크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 적은 수의 무리들이었지만 오늘날의 초대형 교회가 꿈도 꾸지 못할 본질적인 사역들을 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건강한 교회 안에는 반드시 그 성령의 충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통치를 받는 교인들, 그 사랑에 감화되어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신자들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외적인 성장이 이런 내적인 성장, 곧 예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성도들로 교회를 가득 차게 하였는지 반성하여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목회자와 온 성도들이 깨어있어서 외적인 성장에 도취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겸손입니다. 어떠한 때에든지 신자 개개인이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교회 또한 자신의 존립과 그 모든 영적 상태를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마음이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의 은혜의 도움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대중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교회가 우리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랑의 중심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경외의 마음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C. 성령의 위로함: 영적 상태
셋째로 교회의 영적 상태입니다. 이는 성령의 위로로 나타났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사역은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사랑과, 성자 하나님이 은혜와 관련된다면, 성령 하나님은 위로와 관련됩니다. 죄를 책망하고, 회개케 하는 성령의 역사는 결국 그렇게 사람들을 깨뜨려 당신의 위로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교회들은 이런 성령의 위로로 충만하였습니다. 핍박 받고 고난을 받던 성도들이 공동체 속에 모였을 때, 성령의 위로를 경험하였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성령의 위로는 곧 그리스도의 위로였으며 하나님의 사랑이었으니, 성령의 위로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체의 모임에서 위로를 받으며, 모진 핍박과 고난도 이길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세상과 맞서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임 속에도 이런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까? 혹시 성령의 위로는 사라지고, 낯간지러운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아첨만이 우리의 위로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성령의 위로입니다.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참회할 때, 성령의 위로를 통해 자신을 용납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발견하고, 자기 같은 더러운 죄인을 하나님 앞에 부르신 그리스도의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속에서 경험한 신령한 위로를 통해 부족한 지체들을 용납하고 사랑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사랑으로 섬길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물질과 재능과 시간을 드려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위로를 나눠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령의 위로는 어떻게 주어질까요?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한 순수한 부흥 아래 있으므로 온전히 성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함께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면 그 속에서 이런 위로가 창출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가 고갈된 성도들의 교제가 성령의 위로를 불러올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통 속에 성령의 위로가 있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이러한 강력한 은혜의 부흥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한 위로를 경험하게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죄에 실패하고 넘어진 자들, 완고함 속에 곤고한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모두 이 성령의 위로를 따라 섬기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III. 부흥 아래서의 성도의 삶 (36-39절)
교회가 이러한 큰 성령의 능력 아래 말씀의 부흥을 경험하고 살아갈 때, 욥바에 다비다라는 한 여제자가 있었음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생생한 부흥과 공동체적 성장의 문맥 뒤에 부록처럼 연결되어 있는 이 다비다라는 여제자에 대한 짧은 보도는 얼핏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기사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저자인 성령께서 이 두 기사를 연결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부흥 아래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A. 욥바의 도르가의 착한 삶 (36, 39절)
도르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욥바에 살면서 사람들을 섬겼던 이 여제자는 착한 삶을 산 여인이었습니다. 한번 생각 해 보십시오. 강력한 신적인 부흥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휩쓸고 있을 때, 이 여자는 마치 그런 부흥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묵묵히 한 마을에서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날마다 부흥을 기대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기회주의적인 삶이 진정으로 부흥을 갈망하는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착한 삶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1. 온 마음으로 이웃을 섬김
첫째로 그는 온 마음으로 이웃을 섬긴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선행하고,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보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과부들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돌보는 이 없는 그 사람들을 위해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그들은 도르가가 자기들을 위해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내어 보이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도르가가 온 마음으로 이웃을 섬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괄목할 만한 부흥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도르가도 그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도 그런 부흥을 사모하였겠지요. 그러나 그런 위대한 부흥에 대한 기대가 이 도르가로 하여금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이 일을 그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부흥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그 부흥의 능력 아래서 받은바 은혜를 따라 온전한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출한 사도들과 같이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올릴 수 있는 처지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여인에게 있어서 아무래도 괜찮은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끌든, 그렇지 않든 그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로 이웃에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낮춘 섬김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워지는 그리스도인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많은 물질들과 권세를 가진 자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성품이 예수를 닮아 착하게 된 사람들, 그 모든 섬김과 헌신의 뿌리를 사랑에 둔 사람들,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수고의 뿌리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은 겸손에 둔 사람들입니다. 커다란 부흥의 능력 아래서 한 착한 성도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는 이 도르가의 모습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2. 자기를 돌보지 않은 섬김
둘째로 그는 자기를 돌보지 않고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37절). 그때가 언제입니까?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절). 이 두 절 사이에 인과 관계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도르가가 병들어 죽게 된 그 때에도 그는 구제하고 선행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르가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섬김으로 봉사하다가 결국 병들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자신의 이름을 알아주고, 명예가 높아질 때에는 모범적으로 봉사하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에는 자신의 사명을 헌신짝처럼 내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그들의 섬김이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는 사심이 없는 섬김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안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생명과 같이 여기며 그 자리가 높든지 낮든지, 그 일이 크든지 작든지 상관없이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본을 따라 착한 성품으로 섬기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패역한 세상을 뒤엎는 부흥을 꿈꾸면서 자신은 그것을 꿈꾸는 것 이외에 아무런 섬김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부흥에 대한 갈망이 참된 갈망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부흥은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신령의 통치가 시작된 사람들에 의해 추구되어야 할 바입니다. 도르가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B. 마음을 다하는 착한 생활
도르가의 이런 착한 삶은 부흥 아래서 살아가던 성도의 삶이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부흥이 없는 날에는 더더욱 필요한 섬김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마음을 다하여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사람의 착한 성도로서 조국 교회의 한 모퉁이를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부흥을 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르가에게서 그 아름다운 모범을 발견합니다. 확신이 넘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랑이 부족하기 쉽고, 사랑이 많은 성도들은 종종 진리에 대한 단호함이 결핍된 사람이기가 쉽습니다. 이 모든 어긋남은 각각의 것들이 참으로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향한 온전한 마음은 사랑을 축출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불의에 대해 용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향하여 선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추구하는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는 착한 삶은 은혜 받은 성도가 이처럼 창조와 구속의 목적인 하나님의 선을 따라가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착한 생활, 선한 양심, 이런 마음과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지치지 않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부흥을 구할 수 있습니다.
C. 착한 삶으로 칭찬 받는 교회 (행 2:47, 11:24)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던 교회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또한 사람에게 인정받는 교회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을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이러한 사실은 개인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4). 그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 인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회심한 사울을 그리스도께서 큰 인물로 쓰시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스스로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자신은 그를 돕는 자로 자처합니다. 그의 착한 인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바나바의 사역 속에는 항상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지평을 공동체적으로 확장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착한 사람으로 칭찬받을 때 주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그 사랑의 열매를 보고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자신이 깨닫게 된 교리적 지식을 형제들을 판단하는 큰 칼로 사용하는 사람들, 본질적이지도 않은 사소한 일들로 쉽게 다른 사람과 원수 맺고 도무지 화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허탄하고 거짓된 일에 마음을 빼앗겨 공동체적 마음의 일치에 자신의 마음을 보태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은 진정으로 말씀과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착한 사람들로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 착한 마음으로 말씀과 성령의 충만한 부흥을 구하십시오.
IV. 부흥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부흥은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공동체적 은혜의 경험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 사랑의 공동체적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 열매가 사랑으로 나타남으로써 그 공동체에 임한 은혜가 참으로 진리의 말씀과 성령 하나님의 부어주심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 온 성도들이 기이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부흥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오래도록 기도하여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런 부흥이 올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부흥이 오지 않아도 항상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한편의 설교로 수많은 죄인들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회심하는 축복이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진리와 양심을 따라 설교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선교사들이 일 년에 단 몇 사람 밖에 구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도하며 후원할 것입니다. 부흥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전도할 것입니다. 부흥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섬기셨을 사람들을 섬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하는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그렇게 착하게 섬기게 하신 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기에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서럽도록 하늘이 푸르른 날에 부흥의 소낙비가 쏟아져 우리의 오래된 기도가 응답되는 날에도 우리는 이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섬김의 행진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1. 지난 주간의 말씀 “영적인 위기를 극복한 교회(행 5:41~6:7) ”를 듣고 실천 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사울이 핍박과 박해에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변론할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교회가 든든히 서갈 때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성령의 위로는 어떻게 주어질까요?
4.하나님 주도하시는 부흥아래서 살았던 욥바의 도르가의 삶은 크게 어떤 삶이었는지 두 가지로 말해봅시다. 앞으로 구역 안에서 이런 구체적인 섬김의 삶과 사역을 하게 된다면 할수있는 일에 대해 서로 나누어 봅시다.
5.부흥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또한 부흥이 오지않은 시대속에서 신자가 섬겨야할 최고의 섬김은 무엇일까요? 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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