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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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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성소와 축복
2006-11-01
I. 본문해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시편 20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탄원의 시를 많이 썼지만 오늘 이 20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의 시입니다. 다윗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많이 찬송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찬송시는 고난으로 얼룩진 그의 삶 속에서 그가 어떻게 영혼의 원기를 찬송을 통해 얻으며 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시 속에서 시인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함께 언약 백성 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삶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신데 어떻게 아브라함보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하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비유하자면 주님은 복의 저수지이고, 아브라함은 그 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받은 작은 옹달샘으로서 또 다른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원천적 근원이시고, 신자들은 파생적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이 많아야합니다. 지식의 빛도 많아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은혜도 많아야 합니다. 그 모든 지식, 은혜, 사랑, 물질... 모든 것들이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것을 많이 받아서 사람들에게 베풀어줘야 합니다. 그것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우리의 덕을 입게 하는 것입니다. 그 덕을 입으면서 사람들이 그 속에서 소생하고, 무지한 자들이 빛을 발견하고, 물질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도움을 받고, 미움과 질투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사랑을 누리는 것을 보며 행복해 하는 것, 이것이 신자의 복된 삶입니다.
ㅣI. 언약 백성의 삶: 축복함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의 삶이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축복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받은 강복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백성들에게 강복이 되시는 방법이 오늘 성경에 세 가지로 등장합니다.
A. 응답하심
첫째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입니다. “환란 날에 네게 응답하시며”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택해놓으시고 한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한번도 후회하지 않으시고, 선택하신 후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인도와 보호라는 방법으로 마지막에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을 향하여 이끌어 가시는 일을 하십니다.
B. 높여 주심
둘째로 높여 주심입니다. ‘높인다’라고 하는 것은 가치의 질서 상 다른 모든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영광의 몇 가지 의미가 있지만, 이 문맥과 관련해서 영광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효과를 가리켜서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시편 2편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요 나의 영광이시며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방패는 보호하는 것이죠. 수많은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도 방패 뒤에 숨어있으면 목숨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방패이시며 모든 화살로부터 자신을 막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악인이 아무리 정확하게 시인의 심장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려도 방패 되신 하나님 뒤에 숨으니까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시인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과 가치를 인정받는 효과를 발휘하게 합니다.
C. 도와주심
셋째로 하나님이 도와주심입니다. 뒤에 나오는 붙드신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도와주신다’는 이야기가 사실 우리말에서 보면, ‘도와준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주도권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내 힘에 무엇을 보태어준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도와주심’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특히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여”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에제르’입니다. ‘에벤에셀’ 할 때에 ‘에셀’이라는 말로 번역된 것이 ‘에제르’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도움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날개를 달아주시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 때문에 다 기울어가던 우리 인생의 막판에 역전의 드라마가 연출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언약 백성들의 축복입니다.
III. 성도: 강복의 중심
그런데 이런 일들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강복을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우리들이 받을 때에 비로소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축복할 때에 우리에게 내리신 그 강복을 그들이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성소에서 너를 붙드시고 너를 도우시고” 이것이 결국은 성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쓸 때까지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막이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성막이 있는 그 주위를 가리켜서 성소라고 하고, 혹은 제사장들이 들어가는 방을 가리켜서 성소라고도 불렀습니다. 어떻든 이곳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성소가 보여주는 생각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많은 땅 중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내려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기로 지정하신 곳, 이것이 바로 언약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성소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때에 우리도 파생적 근원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누리며 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서 모든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의 가시가 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를 배에 태운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까? 하필이면 요나가 그 배를 타서 그 사람 때문에 풍랑을 만나고 사람들의 짐도 다 버리고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까지 가게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요나를 태운 배에 있는 사람은 그에게 배표 판 것을 땅을 치면서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갑판을 치면서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반대의 사람이 누구일까요? 요셉이죠. 돈 몇 푼에 팔려서 끌려왔을 때에는 말도 안통하고 무식하게 보였는데 불러다가 마당이라도 쓸어라하고 일을 시켰더니 성경에서 뭐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이 요셉을 생각하사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온 집과 온 땅에 복을 내리시니라” 그렇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뭡니까? 요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근원이 마른 사람이었고, 요셉은 비록 비천한 노예살이를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결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도우심의 자원이 흘러들어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잘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보물들을 가득 소유한 파생적 근원이 되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일일 수 있습니다.
IV. 결론: 복의 근원이 되라
그럼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지치고 곤고한 많은 영혼들이 쉬게끔 하나님 내게 더 넓은 가슴을 주십시오. 지친 영혼들이 내 품에서 쉬면서 주님을 배우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내 팔을 두 배나 네 배나 길게 해주십시오.” 왜?“ 여러 명이 내 팔을 베고 눕게 해주시옵소서. 내게 더 많은 물질을 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것들로, 물질이 부족하여 구겨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펴드리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하면서 하나님 앞에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수가 있게 됩니다. 200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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