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11:23-26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망각과 기억의 12월에
고전11:23-26
2009.12.6
성만찬에 관한 바울의 전승이 기록된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바울은 '성만찬'이 '주께로부터 받은 것'(23절)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아울러 예수님이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두 번씩이나 강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기억하는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념하라'는 말은 '기억'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10장 3절에도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단어와 같은 단어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생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기억'은 다릅니다. 생각이라 함은, 과거의 것으로도 미래의 것으로도 구성될 수 있는 두뇌활동의 지칭입니다.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억'이라함은 과거의 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미래나 현재에는 사용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구절도 '생각'보다는 '기억'이라고 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자신을 기억하라고 했다는 말씀을 고린도교회에 소개하는 목적은,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기억하려면 과거 그 예수님이 무엇을 행했는가가 밝혀져야 가능한 것이죠. 그 예수님의 과거를 드러내 놓지 못한다면 기억의 내용이 공허하죠. 드러낼 것도 없는 데, 뭘 기억을 하라면 그건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럼 바울이 예수를 기억하라고 할 때, 뭘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예수의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당한 수치(羞恥)를 기억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참한 처형과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26절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곧 기억의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가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에서나 기억되리라고 예수님이 큰 찬사를 한 이유도 그 여인이 예수님의 치욕스러운 '죽음'을 미리 준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막14:8).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물론 기억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는 사람 역시 그 치욕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치욕을 당할 각오를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자체를 기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삶의 내용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유대교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설정해 놓은 규격에 따라 죄인 취급당했던 소위 '죄인들'의 권익을 위해 살았던 예수님의 절절한 관심과 사랑의 활동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했을 것을 예상하여 예수를 처형하기로 음모를 꾸몄던 당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만행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멀게는 수천 년 전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당했던 과거의 수치와 고난을, 아직도 매년 유월절 행사를 통해 재현합니다. 오늘날 유월절 예식은 14개의 식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 세 번째 순서가 눈물을 상징하는 소금물에 야채를 찍어 먹는 것입니다. 네 번째 순서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형편없는 과자를 쪼개면서 이집트 노예 살이 때의 가난함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는 쓴 나물을 쓴 양념에 두 번 찍어 먹는 것입니다. 열 번째는 누룩 없는 과자와 쓴 나물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과거의 수치를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의 가까운 역사가운데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어마어마한 고난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신시가지 안에 '유대인 학살 기년 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독일의 만행과 그 만행에 희생되었던 자신들의 수모와 수치를 영구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들어가 보면, 기둥을 세워 놓고 나라별로 한 기둥씩을 정해서 그 나라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의 숫자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또 어린이 희생관은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둑어둑한 실내에 촛불을 켜 놓고 희생된 백이십만명의 아이들 이름을 한명 한명 부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처형 기구들, 잔혹한 처형장면, 학살 현장을 담은 사진이나 증거물들을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학교 교육은 '유대인 학살 기념관'에서 시작되어 거기서 끝난다고 합니다. 공무원이나 장교 임용, 입학과 졸업식등과 같은 중요한 일들에는 꼭 그곳을 참배 하도록 되어 있답니다. 피하고 싶은 수치, 없애버리고 싶은 부끄러움, 끔직해서 눈감고 싶은 과거의 일들을 되풀이해서 기억해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시실 2층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았습니다.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지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그들의 수치를 남에게도 기억하게 하기위해 [지붕위의 바이올린], [쏘피의 선택], 쉰들러 리스트]등의 영화도 만들어 냈습니다.
성만찬의식의 중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슬픔과 수치와 고난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삶이 어떤 것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아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아껴주었던 예수의 행위를 지금 여기서 네가 확산 시키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런 일을 가로막는 일들을 단호히 거부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역사는 이른바 자기에게 이롭고 달콤한 것들만 기억하고, 쓰고 아픈 것들과 부끄러운 것들은 감추는 속성으로만 발전되어 왔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들, 자기가 경험한 부끄러운 것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잘한 것들만 진열해 놓습니다. 구약 성서에서부터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노아에서부터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이게 성서의 맥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되레 잘난 일들만 늘어놓고 부끄러운 것은 아예 빼 버립니다. 그래서 장례식에 가면 마치 그가 천사처럼 살았던 사람처럼 그려집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의 진면목입니다. 잘했다는 사람천진데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못했다고, 수치스러웠던 삶을 스스로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무뇌아 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역사의식이 없다는 말은 '역사를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란 '기억'입니다. 그러니 '역사의식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저지른 자신의 삶에 대해, 수치스럽고 창피한 삶에 대해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들은 망각하고, 반대로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들, 잘난 척할 거, 스스로 잘했다고 뽐낼만한 것들만 기억하는 존재들이 바로 '역사의식이 없는'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불행한 삶을 반복하고 있고,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렇게들 살기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되지 않는 사건은 죽은 사건입니다. 기억되지 않은 삶은 죽음 삶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자기 삶, 그 삶 중에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행위들이 기억되지 않는 다면 그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자기 삶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죽은 삶인 것 입니다. 그래서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신화가 아니라 기억입니다. 지난 한 해 나의 부끄러움은 무엇입니까?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던 삶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것을 스스로 기억해 내고 되살려 기억의 장치를 해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스스로의 수치스러웠던 과거를 드러내므로 다시는 그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의 장치로서 12월이 있는 것입니다. 한해를 마무리한다는 뜻은, 신앙인에게 '마무리'란 이런 것입니다. 제발 잘 한 일들은 잊어버리세요. 그건 남들이 먼저 기억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잘못한 일들, 내 생애에서 다시는 반복해서 살지 말아야 할 일들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그런 삶은 스스로 두고두고 기념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끄러웠던 삶을 기념하고 기념하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성만찬이기도 합니다. 이게 12월입니다.
당회하기 전 일주일입니다.
모든 목회자도, 평신도 직분자들도 잘한 거 말고 못 한 거, 가장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고 싶은 거 들춰내서 기억하는 저장의 시간으로서의 당회가 되길 바랍니다.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지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