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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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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시간
눅5:1-8
2009.12.13
나루의 친 할아버지가 스위스로 돌아가기 전에 꼭 하고 싶어 했던 일은, 고성에 있는 '금강산 전망대'와 바다회를 먹어보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남북분단'과 '생선회'는 신기한 나라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사돈과 자연산 활어회를 시켜놓고 먹으면서 오늘 성서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유독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생선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마14:17, 막6:38)말씀도 그렇고, 부활 하신 다음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선을 좀 가져오라는 것으로 이야기를(요21:9)풀어 나가셨습니다. 산상수훈 훈화에서도 생선이(마7:10)중요한 이야기의 주제였습니다. '누가 생선을 달라하면....'하는 거였죠.
시간이 조금 지나서, 로마황제 밑에서 박해를 받던 교우들이 총 길이 900Km의 지하 동굴에 숨어서 예배를 할 때 그들이 비밀스레 사용한 신호도 생선이었습니다. 생선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라는 다섯 개의 희랍어 단어들의 첫 글자 '잌두스ikthus'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생선이야기죠. 게네사렛 호수가 그 배경입니다. 갈릴 호수의 북쪽을 그렇게 부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디베랴'바다에 나타나신 걸로 되어 있지만 이 또한 갈릴리 호수를 부르는 다른 이름입니다.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다시는 '갈릴리 바다'로 부르지 말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로 부르라고 한데서 그렇게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하튼 여기 '갈릴리 호수에서 잡히는 고기들은 모두 얕은 곳에서 잡히는 생선입니다. 그래서 이 생선을 흔히 '표층생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더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하고 말합니다. '깊은 데'고기가 많다는 암시가 아닙니다. 그들이 잡는 고기는 표층생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항상 얕은 곳에서 그물질을 하고 고기를 잡던 그에게 '깊은 데로 가라'는 말씀은 '고기가 없는 곳에 그물을 던져라'와 같은 뜻입니다.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곳에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말입니다.
5절을 보세요. 베드로는 어이없어 합니다. "우리가 밤 새 수고를 해도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깊은 곳으로 가라'는 말씀은 참으로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 '밤 새 수고를 했다'는 이 말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에 의지하여..깊은 곳에 그물을 던진"결과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점이 바로 하나님의 출발점임을 알게 하는 단초가 됩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종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됩니까? 그것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절감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짐으로 자기의 자신만만함을 포기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능력의 말씀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이 마감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분주하게 노력하는 우리의 상황이 희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주님의 능력을 수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이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 멈추어 있는 것은 '그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대로 살기를 바라고 또 그런 입장에 어울리는 인생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불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거부하려는 욕구가 더 강렬히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성서적인 가치관과 비성서적인 가치관이 적당하게 병행되는 게 아니라 늘 비성서적인 가치관으로 후퇴하려는 유혹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르다는 것이 오늘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일 유일한 준비입니다. 베드로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진'일은 더 많은 고기를 잡아야 겠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징표였습니다. 8절 이하를 보아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곳에...'했더니 그물이 찢어지게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좋아하는 대신 황급히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이것이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의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나를 떠나 주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사람의 욕심대로 된 일이라면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ㅓ나지 말고 더 곁에 있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이 행위는 우리에게 의미가 큽니다. '죄인'이라는 용어가 현대인에게는 지나치게 추상화되었으나, 당시대 사람들에게 '죄인'은 사회에서 인간 이하로 멸시받던 사람들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의인이 되고 싶어 했고, 누구나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이런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에 대해 바울은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여하간 누구나 '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나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해 인정하고 한 단계 더 깊은 곳으로 자기를 내려놓은 셈 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스스로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처했던 바리새인들,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뿐만이 아니라 아예 주님더러 자기 곁을 떠나 달라고 합니다. 이제 성서가 제대로 이해가 되십니까? 베드로가 고기를 그렇게 많이 잡고도 왜 이렇게 했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너무나 자신이 보잘 것이 없어서, 낮은 자신을 발견하므로 예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이 버거웠던 것입니다.
성서 기록자 누가가 바라보는 베드로의 위대함은 이것이었습니다. 누가는 오늘 우리에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베드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기 많이 잡는'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 베드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목사나 평신도가 있다면 그는 세계관이 세상과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새롭게 체험하게 됩니다. 사소한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당연한 게 없어집니다.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베드로는 익숙한 자기의 경험세계를 포기하고 주님의 능력의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가 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에서 바울은 신앙의 지침이 될 만한 고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의 깊음이여, 그이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의 길을 알아낼 수 없도다."
이 고백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외친 베드로의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고, 다른 하나는 맨 밑바닥에 놓여진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정입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실현 불가능한 명령, 또는 실천하기 어려운 명령들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예수의 명령을 "말씀에 의지하여"감격스러운 심정으로 따르려는 결의를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서 그걸 배우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우리의 능력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여'깊은 곳에 그물을 칠 때 그때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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