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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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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요1:43-51
2009.12.27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제자 삼으려고 부를 때 사용한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말만을 듣고 그렇게 순순히 따라 나섰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의 사회적인 환경이 오늘과 같을 리는 없지만, 어느 시대건 단지 말 한마디를 듣고 모든 걸 포기하고 누군가를 따라나서는 모험을 감행 하기란 어려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몇몇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른 이야기가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부름을 받은 빌립은 즉시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가 어찌하여 그렇게 나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나다나엘에게로 옮겨집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할 때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며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어요(45절). 그러나 나다나엘은 빌립의 이런 설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빌립에게 반문했거든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속한 작은 마을입니다. 예루살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을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부르면서 멸시하였습니다(마4:15). 갈릴리는 한 때 이방 나라에 속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땅과 사람들이 더렵혀졌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 같은 곳에서는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예언자도 나올 수 없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습니다(요7:41-52). 그러니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다나엘이 이 말을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려 태조가 역대 왕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글이 [훈요십조(943)]라는 겁니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는 '차령 이남 금강 아래의 산형지세는 배역하니 그 지방 사람은 등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지방 사람은 반역을 일으키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곳 사람들은 가급적 관리로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그릇된 관념은 1천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의 골머리가 된 지역주의는 이렇게 뿌리가 깊은 것입니다.
사람을 그의 사람됨이 아니라 그의 출신과 가문과 거주지의 배경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구현해가는 교회도 이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당시대 사람들이 마음 밖에 두었던 바로 그곳, 동네가 신통치 않아 거기 사람조차 깔봄을 당하던 갈릴리 지방 출신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날 필요를 손톱만큼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만나보나마나 뻔 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빌립이 그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믿지 못하겠거든 와서 보면 될 거 아니요?'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중한 건의가 아니라 성화에 해당합니다. 그 성화에 못 이겨 나다나엘은 그럼 한 번 보기나 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로 갔던 것입니다. 쉽게 예수를 따라가기로 결단하는 모험을 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예수가 자기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까?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47).
빌립의 성화에 못 이겨 예수에게 나아갔는데 뜻밖에 예수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나다나엘은 기뻐하기보단 놀랐습니다. 마치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추켜세우며 칭찬한 것 같아 보이지만,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코 간단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던 것입니다.
"나를 아십니까?"
만약 47절의 예수님 말씀이 나다나엘을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이라면, 나다나엘이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다면 이렇게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랬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나를 아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주석가(필로 philo)는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다나엘뿐만 아니라 누구든 훤히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필요 없는 접근 입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이 나다나엘의 물음은 '어디서부터'라는 뜻도 됩니다. 이 말은 '전에 만난 적도 없는데 나를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도 되지만, '전에 어디서 나를 본적이 있습니까?'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을 하십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가 자신을 '어디서부터' 또는 '언제부터'알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왜 나다나엘에게는 예수님이 그를 알고 있는 시점이 중요했던 것일까요? 혹시 나다나엘이 감추고 싶은 과거라도 있는 것일까요?
나다나엘의 과거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측할 만한 단서는 있습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주변 베다니에 살고는 있지만 본시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요21:2). 여기가 이상한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와 같은 갈릴리지방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나사렛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동향이라고 기뻐하기 는 커녕 오히려 무시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우리도 가끔 이런 일을 만나지 않습니까? '성탄 피크닉'(민음사)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도 로또에 맞아서 압구정에 살게 된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늘 걱정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 버릴 것 같아서였습니다. 드라마에도 자신의 어두운 과거 또는 초라한 시절이나 비난이 되는 출신지역을 은폐하려는 장면들을 보지 않습니까? 나다나엘도 이런 겁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멸시하는 갈릴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다니로 이사 온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 자신을 감추고 싶은 행동이 지나쳐서 갈릴리 지방을 멸시하는 말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자신의 뿌리를 감추고 예루살렘 사람인 것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는 이런거였습니다. '언제부터 나를 아십니까?'라는 물음에는 그런 두려움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나다나엘을 관통하여 예수님이 물었던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이미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문장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어떤 장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일종의 상징과 같은 말로써 '갈릴리 사람으로써 예루살렘 사람인척 하며 살아가는' 그 어두운 삶의 단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의 행동에서 자신의 고향과 과거를 은폐하고 아닌 척 하며 사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믿음도 없으면서 있는 척, 가난하면서도 부자인척,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 등등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도 여러 방면에서 자신을 위장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나다나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나다나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이스라엘 사람'이란 나다나엘이 그토록 바라는 예루살렘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틀림없는 갈릴리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에게 자신을 들키고 만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전부가 예수에게 들킨 사람들입니다. 마음까지, 삶까지, 생각까지 들켜서, 더 이상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 전부가 그리스도에게 노출되어서 다른 길을 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고백 속에 면면히 숨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아직도 자신을 숨기고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이기주의자들 아닙니까?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나다나엘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숨기고 은폐해도 이미 우리의 전부를 아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마치 쫓기던 닭이 몸뚱이는 그대로 두고 머리만 감추고 안도하는 꼴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들킨 사람들입니다. 들킨 줄 알아서 그 어느 것도 은폐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있고 없음과, 죽고 사는 것을 그리스도에게 내맡기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들킨 사람들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 밑에서, 하늘이 주는 평강으로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미 나의 전부를 알아 버렸으므로 나는 더 이상 내 꾀를 따라 살지 않는다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자신의 전부를 들키지 않은 사람,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한 해 한 해 우리가 사는 삶의 뜻은 이겁니다. 예수에게 들킨 사람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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