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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2: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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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윤은철 목사 |
참고 : | 갈릴리교회 |
어떤 가치관으로 살 것인가?
골 2: 8-23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서 살 것인가? 이 질문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다같이 한 번쯤은 생각도 해보고 고민도 해 보았을 법한 명제입니다. 지금도 자신의 인생을 위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이 명제는 단순하지만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찾았다고 확신을 했지만 그것은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진리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리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 리비아에서 42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었던 카다피 국가원수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국가 원수로서 인터넷 동영상에 그처럼 처참하게 죽는 모습이 보여진 것은 아마 처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도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나라를 위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아주 신선한 느낌을 주는 젊은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얼마 가지 않아 모든 국민들을 억압과 공포로 몰아 넣는 독재자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념의 변질은 자신을 비참한 말로로 끝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숭고한 삶의 목적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변질되고 타락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라를 위한 것이고 사회와 가족을 위한 것이라도 먼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진리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오늘 우리들은 바로 그것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졌다는 가치관으로 살아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10)
주님 안에서 우리들이 충만하여졌다는 말씀은 다른 말씀으로 우리들이 완전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씀이지만 이것은 예수님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에 예배를 드릴 때 그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전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때의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라도 반드시 희생제물의 피가 있어야 죄를 사함 받고 비로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들이 죄를 사함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나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제물을 요구하셨다면 역시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동물의 피를 가지고 나와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금 짐승을 제물로 가지고 나오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죄인으로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는 이미 실패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예배만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통해서 죄인에서 의인이 되기 위해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것처럼 동물의 피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동물의 피가 없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들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에는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10:14)라고 하셨고 18절 19절에는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10:18~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희생 제물로 인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한 자들을 완전하게 하셨고 그래서 죄가 사함을 받아 다시는 제사를 드릴 것이 없는 자들이 되어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가장 높은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님의 피입니다. 다른 것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어떤 다른 것이 필요하다면 분명히 더 집어 넣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행이나 착함, 율법의 온전한 지킴 등이 들어갔다면 우리들은 그런 것들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 졌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믿어야 그 사람의 예배가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배를 통해 의로워지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드림으로 인해 우리들의 죄가 사함받게 된다는 생각으로 드린다면 이미 그 예배는 드려질 수 없는 예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이미 의인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배는 이미 거룩해진 백성들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최고의 가치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승리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14절과 1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셨으며 정사와 권세를 벗겨내어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4~15)
우리들이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들도 알지 못하는 환경에 태어나 그것으로 고생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좋은 환경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우리들이 어렸을 때 전혀 우리들의 부모나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우리들은 우리들의 환경을 선택하며 지금 이 순간에 왔습니다만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이 만들어준 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지금의 나의 나 된 것은 과거의 어렸을 때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인격은 이미 어렸을 때 거의 형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부모님을 선택해서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환경으로 나의 인격과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나는 얼마든지 세상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는 나지 진정한 나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여러분들은 정말로 여러분 자신입니까? 여러분들은 진정한 여러분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나의 모습은 알고 보면 부모님이나 주위의 영향, 즉 선생님이나 이웃, 친구들에 의해 형성된 나지 결코 진정한 나의 모습은 아닙니다. 세상의 주위의 사람들에 의해 학습된 나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여러분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여러분의 모습은 더 이상 옛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는 하늘의 상속자로서 하늘에 속한 것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이 땅에서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사람이 지금까지 사람들과 환경에 의해 학습되어 살아 왔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에 의해 학습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이냐를 분명히 깨달은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원래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지만 그것을 마귀에게 속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반드시 되찾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고 있는 법령을 지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천년 전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이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이유는 나를 대신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서 하신 모든 일들이 다 나를 위해 하신 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내 인생이 예수님의 인생과 어떻게 하나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맨 정신으로 이것을 믿으라고 하면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 나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 분이 부활하심으로 나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인하고 입술로 고백할 때 그것을 가지고 성령님께서 그 사람이 고백한 것을 실제화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요 그것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사실로 만들어 나가시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나도 반드시 죽은 것입니다. 그 분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입니다. 우리들의 옛사람은 살아있을 동안에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옛사람은 죄의 값을 치러 스스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일을 우리를 위해 대신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께서 죽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 분과 함께 다시 산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모습과 부활하신 모습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과 다시 살았다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나의 죄인의 모습은 이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내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승리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세상의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20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골2:20)영어 성경에 “세상에 사는 것 같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as though living in the world” 이제는 우리들이 세상에 속한 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어떻게 세상에서 사는 자처럼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 지내게 하옵소서."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마8:21~22)."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는 것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사단 후세인이나 이번에 죽은 카다피나 참 잘 죽었다. 국민을 그렇게 괴롭히고 전 세계를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준 사람 참 결론이 잘 끝났다”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은 살아 있으나 다 이미 죄 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렇게 카다피처럼 민중의 심판으로 죽으나 남들처럼 평범하게 죽으나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 죽는 모습은 다 같은 것입니다. 나쁜 일을 많이 한 악인들의 죽음이 좀 더 처참하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세상에서 존경 받는 사람의 죽음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은 받는 성철 스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성철 스님은 아주 유복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일생을 지낸 분이십니다. 이 분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불교의 차원이 한층 너 높아졌다고 합니다. 이 스님은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론을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수행이 더 필요하지 않다)’를 주장해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돌아가실 때 영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 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 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철 스님이 지옥에 간다고 했다면 카다피도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죽음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같은 차원의 죽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한 번 살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 때문에 이미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인생입니다. 동시에 이미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굳건히 믿고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변화된 사람은 변화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것을 믿고 그것을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살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러한 삶을 위해 늘 최선을 다해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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