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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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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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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좁은 길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자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예수님이 신자더러 넓은 문 대신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꾸 좁은 문을 찾아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예컨대 일부러 양보하고 희생하며 낮아져 힘이 더 드는 방향으로 가야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자라면 당연히 남을 세우고 자기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 문제에 있어서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마치 자기가 그 좁은 길을 택한 양, 또 택해야만 하는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신자가 분석하고 판단한 후에 스스로의 의지를 동원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마지막 결단의 순간에 자신의 지정의가 분명히 동원된 것은 맞지만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간섭과 은혜였습니다. 심지어 그런 의지가 동원되는 것마저도 그분의 은혜요 간섭입니다.
비유컨대 구원은 마치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선물이란 오직 주는 사람의 마음과 선택에 달렸습니다. 또 주는 사람이 받는 자 모르게 미리 다 준비해야 참 선물입니다. 예쁘게 리본을 붙여서 포장까지 주는 사람이 다 합니다. 그러다 받는 사람이 전혀 예상도 준비도 안 되어 있을 때에 불시에 꺼내 놓습니다. 그렇지만 받는 사람이 받기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선물을 자기 지정의를 동원해 받았다고 자기 의지로 선물을 고르고 택했다고 또는 얻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 만큼은 어느 날 갑자기 예배당에 나와 앉아서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내가 사상적으로 고상하고 도덕적으로 선하며 영적으로 신령해서 예수를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 구원을 얻게 되었다면 그때 벌써 좁은 길 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 삶과 인생의 방향은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잡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얻어서 회개했다는 자체가 죄에서 하나님 쪽으로 유턴(U-turn)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유턴은 분명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자가 정작 자신의 지정의 특별히 의지를 동원해서 붙들어야 할 믿음은 가장 먼저 이미 자기가 좁은 길에 들어서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좁은 길에서 다시 넓은 길로 옮기워질 리가 전혀 없으며 또 그럴 마음도 아예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평생을 두고 가는 길은 당연히 좁은 길이고 또 그 길을 후회, 미련, 실망, 불만 없이 주님과 함께 가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문제일 뿐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마치 자기가 그 좁은 길을 선택한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또 다시 그런 선택이 강요당하는 경우에 때때로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안 듣기에 내가 의지로 그런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어 넓은 길 대신에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또는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 가지 사건, 장소, 인물, 시간으로만 국한해 보면 그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한번쯤 주일 예배에 빠지고 세상 재미를 즐겼다고 갑자기 비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좁은 길에서 넓은 길로 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전히 좁은 길 위에 있지만 단지 돌부리에 부딪혀 넘어진 것뿐입니다. 아니면 잠시 고개를 넓은 길이 펼쳐져 있는 뒤 쪽으로 돌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문이 크고 넓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또 문이 좁고 협착한 길은 멸망의 반대인 생명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그것도 그 문을 통과해 들어선 자이며 불신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고 있는 자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신자가 잘못된 선택을 해 자신의 생명에 잠시 활력을 잃을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결코 멸망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참 신자라면 이미 좁고 협착하고 특별히 외로운 길을 가고 있기에 더 이상 생명과 멸망의 두 길을 두고 선택하는 일로 고뇌할 필요가 없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방향은 정해져서 앞으로 가고 있는데 잠시 쉬고 싶고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만 죽이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가 현재 가고 있는 길이 참 생명의 길임에 추호의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평생 예수를 믿고 그분을 따라 가겠다는 소원과 헌신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해도 신자가 아닙니다. 사실은 넓은 길로 가면서 계속 좁은 길이 있는 뒤쪽을 돌아보면서 가니까 마치 생명의 길로 가는 양 착각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 그런 자가 잠시 선하고 의로운 길을 택했다고 갑자기 신자가 되고 생명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길에 들어선 자가 잠시 악하고 죄 많은 길을 택했다고 갑자기 불신자가 되어 멸망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신자를 바라 볼 때도 그가 얼마나 선한 일을 했는가 심지어 그 마음의 중심이 착한가 아닌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일시적 행동과 말과 생각을 본다면 다른 말로 매번 어느 길을 선택하는지 본다면 우리 가운데 멸망으로 떨어지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자의 중심에 자기 평생을 두고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요컨대 자기가 이미 좁은 길에 들어섰고 그 길이 세상적으로는 비록 괴롭고 힘들긴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평강, 위로, 기쁨, 은혜, 권능이 함께하는 신나는 길이라고 확신하는가를 봅니다.
신자에게 좁은 길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필수적인 의무 사항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현재 진행형의 현실일 뿐입니다. 나아가 미래형, 아니 종착지가 확정되어 있는 미래 완료형입니다. 그 좁은 길에는 지름길, 우회로, 샛길, 곁가지 길 어느 것도 없을 뿐 아니라, 특별히 반환로는 아예 없습니다. 오직 직선으로 된 외길뿐입니다.
좁은 길은 좁은 길일뿐이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여지고 도저히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그래서 일단 갔다가는 되돌아오곤 하는 복잡하게 뒤엉킨 미로가 아닙니다. 너무나 뻔히 종착점이 보이는 직선 길입니다. 길은 여전히 좁고 협착하지만 주님이 우리가 종착점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떠나지 않고 동행해 주시기 때문에 사실은 쉬운 길입니다. 특별히 선택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면에서 또 신자 자신이 그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즐겁고 신나기 때문에 쉬운 길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가 제한적 의미로는 잘못된 선택을 해서 죄와 시험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 자체를 선택해서 방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여전히 좁은 길 위에서 잠시 넘어져 있는 것뿐입니다. 언제든 그 자리에서 발딱 일어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출발점에 되돌아 와있거나 멀리 후퇴한 것이 아닙니다. 가던 길 거기에서 잠시 멈춘 것뿐입니다. 얼어나 앞만 보고 다신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 빠르면 빠를수록 당연히 더 좋지 않겠습니까?
7/7/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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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자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예수님이 신자더러 넓은 문 대신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꾸 좁은 문을 찾아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예컨대 일부러 양보하고 희생하며 낮아져 힘이 더 드는 방향으로 가야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자라면 당연히 남을 세우고 자기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 문제에 있어서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마치 자기가 그 좁은 길을 택한 양, 또 택해야만 하는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신자가 분석하고 판단한 후에 스스로의 의지를 동원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마지막 결단의 순간에 자신의 지정의가 분명히 동원된 것은 맞지만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간섭과 은혜였습니다. 심지어 그런 의지가 동원되는 것마저도 그분의 은혜요 간섭입니다.
비유컨대 구원은 마치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선물이란 오직 주는 사람의 마음과 선택에 달렸습니다. 또 주는 사람이 받는 자 모르게 미리 다 준비해야 참 선물입니다. 예쁘게 리본을 붙여서 포장까지 주는 사람이 다 합니다. 그러다 받는 사람이 전혀 예상도 준비도 안 되어 있을 때에 불시에 꺼내 놓습니다. 그렇지만 받는 사람이 받기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선물을 자기 지정의를 동원해 받았다고 자기 의지로 선물을 고르고 택했다고 또는 얻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 만큼은 어느 날 갑자기 예배당에 나와 앉아서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내가 사상적으로 고상하고 도덕적으로 선하며 영적으로 신령해서 예수를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 구원을 얻게 되었다면 그때 벌써 좁은 길 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 삶과 인생의 방향은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잡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얻어서 회개했다는 자체가 죄에서 하나님 쪽으로 유턴(U-turn)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유턴은 분명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자가 정작 자신의 지정의 특별히 의지를 동원해서 붙들어야 할 믿음은 가장 먼저 이미 자기가 좁은 길에 들어서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좁은 길에서 다시 넓은 길로 옮기워질 리가 전혀 없으며 또 그럴 마음도 아예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평생을 두고 가는 길은 당연히 좁은 길이고 또 그 길을 후회, 미련, 실망, 불만 없이 주님과 함께 가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문제일 뿐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마치 자기가 그 좁은 길을 선택한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또 다시 그런 선택이 강요당하는 경우에 때때로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안 듣기에 내가 의지로 그런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어 넓은 길 대신에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또는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 가지 사건, 장소, 인물, 시간으로만 국한해 보면 그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한번쯤 주일 예배에 빠지고 세상 재미를 즐겼다고 갑자기 비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좁은 길에서 넓은 길로 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전히 좁은 길 위에 있지만 단지 돌부리에 부딪혀 넘어진 것뿐입니다. 아니면 잠시 고개를 넓은 길이 펼쳐져 있는 뒤 쪽으로 돌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문이 크고 넓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또 문이 좁고 협착한 길은 멸망의 반대인 생명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그것도 그 문을 통과해 들어선 자이며 불신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고 있는 자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신자가 잘못된 선택을 해 자신의 생명에 잠시 활력을 잃을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결코 멸망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참 신자라면 이미 좁고 협착하고 특별히 외로운 길을 가고 있기에 더 이상 생명과 멸망의 두 길을 두고 선택하는 일로 고뇌할 필요가 없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방향은 정해져서 앞으로 가고 있는데 잠시 쉬고 싶고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만 죽이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가 현재 가고 있는 길이 참 생명의 길임에 추호의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평생 예수를 믿고 그분을 따라 가겠다는 소원과 헌신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해도 신자가 아닙니다. 사실은 넓은 길로 가면서 계속 좁은 길이 있는 뒤쪽을 돌아보면서 가니까 마치 생명의 길로 가는 양 착각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 그런 자가 잠시 선하고 의로운 길을 택했다고 갑자기 신자가 되고 생명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길에 들어선 자가 잠시 악하고 죄 많은 길을 택했다고 갑자기 불신자가 되어 멸망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신자를 바라 볼 때도 그가 얼마나 선한 일을 했는가 심지어 그 마음의 중심이 착한가 아닌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일시적 행동과 말과 생각을 본다면 다른 말로 매번 어느 길을 선택하는지 본다면 우리 가운데 멸망으로 떨어지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자의 중심에 자기 평생을 두고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요컨대 자기가 이미 좁은 길에 들어섰고 그 길이 세상적으로는 비록 괴롭고 힘들긴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평강, 위로, 기쁨, 은혜, 권능이 함께하는 신나는 길이라고 확신하는가를 봅니다.
신자에게 좁은 길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필수적인 의무 사항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현재 진행형의 현실일 뿐입니다. 나아가 미래형, 아니 종착지가 확정되어 있는 미래 완료형입니다. 그 좁은 길에는 지름길, 우회로, 샛길, 곁가지 길 어느 것도 없을 뿐 아니라, 특별히 반환로는 아예 없습니다. 오직 직선으로 된 외길뿐입니다.
좁은 길은 좁은 길일뿐이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여지고 도저히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그래서 일단 갔다가는 되돌아오곤 하는 복잡하게 뒤엉킨 미로가 아닙니다. 너무나 뻔히 종착점이 보이는 직선 길입니다. 길은 여전히 좁고 협착하지만 주님이 우리가 종착점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떠나지 않고 동행해 주시기 때문에 사실은 쉬운 길입니다. 특별히 선택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면에서 또 신자 자신이 그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즐겁고 신나기 때문에 쉬운 길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가 제한적 의미로는 잘못된 선택을 해서 죄와 시험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 자체를 선택해서 방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여전히 좁은 길 위에서 잠시 넘어져 있는 것뿐입니다. 언제든 그 자리에서 발딱 일어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출발점에 되돌아 와있거나 멀리 후퇴한 것이 아닙니다. 가던 길 거기에서 잠시 멈춘 것뿐입니다. 얼어나 앞만 보고 다신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 빠르면 빠를수록 당연히 더 좋지 않겠습니까?
7/7/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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