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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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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산마루서신 http://www.sanletter.net]
커다란 스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곁에 있던 아내가 한 마디 던진다.
"꼭 당신 같은 스님이!"
고생시킬 아내 가진 스님이야 없지 않겠나 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익히 아는 분이었다.
강남 봉원사 주지였던 명진스님이었다.
읽어보니 여섯살에 어머니가 자살하셔서
'죽는 것은 뭘까, 사람은 왜 살까" 하는 생각을 시작했다고 한다.
실은 구도자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그 나이 아무도 없는 적막한 한옥 툇마루에 앉아
'도대체 여긴 어딘가, 어디에서 와서 이렇게 내가 있는 건가!" 하며
그 낯설음에 숨죽이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이것은 평생 오늘날에도 이따금씩 젖어드는 나의 존재감이기도 하다.
그 생각은 사춘기 적엔
가위 누르는 숨막히는 낯설음으로 나를 압도하기도 하였다.
30후반까진 낮잠을 자면 그런 감정이 때때로 밀려와
잠결에 방바닥을 헤메던 시절도 있었으니
기막힌 노릇이었다.
결국 고3 시절 어머니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는 병환 중에도 교회에서 금식기도하시더니
천사가 모시러왔다고 하며
"너 때문에 내가 이리되었다" 는 말씀을 하셨다.
날 목사 만들려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는 뜻이었다.
그리곤 3일 후 떠나가버리셨다.
그때 "하나님만 믿는다"는 유언이
마지막 숨이셨다.
"도대체 생사란 무엇인가
사형선고 받은 놈이 오늘 죽나 내일 죽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인생은 이런 것인가" 인생 무상이 맥을 풀어놓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소리였다.
그때 어머니 장례를 치루어주셨던 목사님이
신학교에 들어가면 "생사에 대한 대답을 얻는다"고 하셨다.
그날부터 나는 신학교 입학을 고대하며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정작 더큰 절망 속에서
신학교를 3개월만에 때려치우고 나왔다.
신학교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지식 쌓는 공허한 놀이판이고 전도 훈련소였다.
그 당시 내 눈엔 그렇게 비쳤다.
비 맞고 날개부러진 새처럼 축쳐져서
신학교 정문을 초라하게 빠져나오던 날
속았다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
그 답은 스스로 얻어가는 것이었다.
결국은 그분께 사로잡히는 은혜 사건으로 끝이 난다.
그 스님은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고
한평생 동생이 중노릇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내게도 동생은 하나인데 그가 30중반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를 보내고, 며칠 밤마다 잠을 자다
울고 있는 나로 인하여 깨어났다.
그것은 진짜 슬픔이었다. 원망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었다.
그때 나는 그것을 "맑은 슬픔"이라고 적었다.
그래도 인도하심이 있어
전도사가 되어 도시 노동자와 함께 지내던
깨진 안경에 흙 올라오는 구두 신고 다니며
사회적 모순에 온 몸을 부대끼며
생사의 질문에 번뇌하며 살던 나날이 흘러지나갔다.
최전방 양구 골짜기에서 군종장교로 의무복무하러 갔다가
가자마자 자살한 젊은이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때 울부짖는 한맺힌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병역의무를 회피하면서 지도자 노릇하는 작자들과
남북의 독재자들과 분단세력에 대한 분노가 피를 꺼꾸로 흐르게 하였다.
그 시절 보안부대까지 가서 조사받던 처지도 머릿속을 스친다.
신학교 학생회장으로 데모까지 하며 도피하던 시절에도
당하지 않는 운좋은 사내였는데.
기성 교회에 들어갔다가
"이게 교회냐"며
먼지를 털고 나왔던 초년 목사시절도 있었다.
담임자 청빙을 하겠다며
이력서 받으러 심부름 온 후배 목사에게
"내 인생에 이력서란 없다"는 말로 되돌려 보냈던 일들........
무작정 21세기 첫 부활절 아침엔 새로운 교회가 서야 한다며
우리 집 마루에서 교회를 시작한 것들이
새삼 유별난 짓이었다는 생각을 다시한다.
게다가 지금은 노숙인 자활촌까지 만든다며
판을 벌리고 있으니<연>
*하루 한단 기쁨으로
영성의 길 오르기*
눈을 감고 고요히 묵상해 보십시오.
길이 보일 것입니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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